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 막심 빌러의 짧은 이야기
막심 빌러 지음, 허수경 옮김 / 학고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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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열매 맺지 못하고 끝나는 스물일곱 편의 사랑이야기

쿨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읽는 이를 경탄하게 하는, 애매하기 그지없는 순간들

 

작가는 인터뷰에서, '나는 다만 들려주고 싶다. 두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한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깊으며 또한 얼마나 복합적인가 하는 것을' 이라고 했는데, 책을 완독하고나니 인터뷰 내용 중에 공감이 가는 건 '얼마나 복합적인가' 이 한 대목이다. 소통 부재로 실패한 연애담은 아름답기는커녕 전혀 쿨하지 않을 뿐더러 더러는 막장이고 더러는 찌질하다.

 

화남금녀라고, 여자의 언어를 이해 못 하는 남자와 남자의 언어를 이해 못 하는 여자가 만나면 두 사람 사이에 생길 일은 뻔하다. 언성을 높여가며 제 말만 하다 결국 상대방 얼굴에 침을 뱉고 돌아서는 거지. 이 소설엔 이런 화남금녀가 가득하다. 그러니 당연한 얘기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에게 물리적 화학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장면 중 특별히 아름답다거나 인상적이라고 느껴지는 장면은 없다. 아이러니한 건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스물일곱 편의 단편은 적게는 4페이지, 많게는 18페이지, 평균 10여페이지인데 단편인 걸 감안해도 분량이 매우 적다 싶은 이 소설집을 읽은 전반적인 감상은 '플롯은 넘치는데 서사가 없다'. 비유하자면 경찰서 사건 조회 기록을 읽은 기분인데, 딱히 줄거리로 요약할 만한 서사가 없다 보니 소설이, 혹은 작중 인물이, 혹은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가 뭔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쯤되니 독자가 이해하라고 쓴 소설이 아닌가 의심도 들지만. 어쨌든 이것도 일종의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작가의 집필 의도라면 매우 성공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는, 그게 입으로 하는 거든 몸으로 하는 거든, 내내 일방적이어서 남자와 여자 누구의 입장에 감정이입해봐도 도무지 상황과 내용을 알아먹을 수가 없다. 마치 평행선으로 달리는 두 기차 사이를 커다란 방벽이 가로 막고 있는 기분인데 이러니 그 연애가 잘 될 리가 있나. 다른 대륙의 언어를 쓰면서도 비언어적 표현으로도 충만한 사랑에 빠지는 연인은 오히려 기적 같다. cf. 영화 <러브 액츄얼리>

 

스물일곱 개의 단편은 맥락이 상통하다 보니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정점에 둔 다양한 변주처럼 읽힌다. 따지고 보면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사연은 대개 거기서 거기이기 마련이라 내 사연만 특별하고, 내 사연만 기구한 것 같지만 이도 저도 결국은 '흔한 사랑 타령'인 거다. 

 

사랑하려고 일곱 번이나 시도했다는 건, 결국 그 사랑이 별 거 아니었다는 걸까.

혹은, 일곱 번을 시도해도 포기가 안 될 만큼 그 사랑이 대단하다는 의미일까.

 

"만나는 사람, 있어?"

"아니."

"그렇지 뭐, 그게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렇지, 그게 중요하지는 않아."

"나, 다시는 프라하로 오지 않을 거야."

"이해해."

그녀는 울기 시작하더니 몸을 돌리고는 갔다. 그는 문에 서서 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발코니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쇼피노바를 따라 내려갔고 세 걸음쯤 걷고 난 뒤 서서 울고는 다시 걷다가 다시 울면서 갔다. 

 

-pp.28-29,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이 선집에서 한 편을 꼽으라면 마지막 목차「Ziggy Stardust」. 18페이지 분량인 이 단편은 그나마 기승전결이 뚜렷하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이자 연인이다. 데이트 중에 우연히 옛 연인으로 추정되는 지인을 만난 여자는 한 달 뒤 약속한 시간에 남자가 있는 도시로 오지 않는다. 늦어질 것 같다는 통화가 마지막이다. 그리고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나 캄캄한 밤이 되도록 여자는 나타나지 않고 소식도 없다. 남자는 이 일방적인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나는 이른 저녁까지 그녀를 기다리다가 프리드리히하인 시민공원으로 갔다. 풀밭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내 또래 남자 몇이서 축구하는 것을 보았다. 그해 들어 처음으로 맞이하는 따스한 저녁이었다. 바닥은 차갑지도 축축하지도 않았다. 어둠도 천천히 내려왔다. 어느새 나는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주위는 컴컴했고 공원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나는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고 천천히 집으로 갔다. 그곳에도 에드나는 없었다. 


-p.262, 「Ziggy Stardust」


사랑이 스러지는 순간은 한낮의 빛이 차츰 온도를 잃고 그 자리를 저녁의 어둠이 메꾸듯이 '서서히 그러나 어김없이' 그렇게 온다. 인용한 장면은 읽을 때 기시감이 일었는데 기시감의 출처는 은희경 『태연한 인생』. 어떤 이에게 사랑이 끝나는 순간은 뜨거운 한낮을 견뎌낸 저녁노을을 닮았다. 외롭고 씁쓸하고 아름답다.

 

예전에 J가 그런 얘기를 했다. 대화 주제가 아마 권태였던 것 같은데, 최초의 연애감정이 지속되려면 계속해서 상대의 다른 매력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처음엔 그냥마냥 좋아서 좋아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는 손이 예쁘고, 발이 예쁘고, 웃는 소리가 예쁘고, 성질내는 것도 예쁘고... 그렇게 계속계속 예쁜 게 보여야 된다는 거다. 그러면 최초의 연애감정이 지속된다나. 

 

한쪽의 일방적인 변심으로 야기된 이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로 남는다. 누군가에게, 하물며 한때 좋아했던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기꺼운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랑이 일생인 것 같고, 목숨인 것 같고, 그래서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그리고 상처에 새 살이 오르듯 느리게 느리게 어느 순간 회복된다. 오죽하면 관용적으로 쓰지 않는가. 연애는 사건이라고. 실패한 연애는 그냥 교통사고 같은 거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피하지 못한 그런.


 

역자 후기에 공감가는 대목이 있어 옮긴다.


1960년 대에 태어난, 도시에서 삶을 살고 있는, 유목민도 정착민도 아닌 많은 이들의 불우한 사랑이야기. 작가는 자신을 발설하면서 발설 뒤에 자신을 철저히 숨긴다는 생각. 한 작가의 세계는 그 작가 자신이 아니라 그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라는 고전적인 아포리가 명명백백해지는 순간을 나는 다시 막심빌러의 책 번역을 마치며 경험했다. p.267

 

내용 중 '책 번역을 마치며'를 '마지막 장을 덮으며'로 고치면 내 감상과 일치한다.

 

 

 

'아포리'가 '아포리즘'의 오타인가 싶어 찾아보니 '논리적 궁지(난점)'라는 의미의 불어라고 한다.

++ 소설을 완독했던 동력은 두 가지다. 역자가 故허수경 시인이라는 점, 소설 첫 페이지에 인용된 파스테르나크.


아마도 이 모든 것은 칠월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보리수나무에 꽃이 피니 말이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책에 부치는 편지」

 

 

그리고 파스테르나크 인용을 보는 순간 떠올랐던 브레히트.  

 

생각나는 건 단지, 내가 언젠가 그 얼굴에 키스를 했다는 것.

그 키스도 구름이 떠있지 않았다면,

오래전에 잊어버렸을 것이다.

 

- 브레히트 '마리아 A.의 회상'

 

취향 어디 안 간다고 이런 아포리즘 같은 문장에 한결같이 치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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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 조국 이후의 한국 정치
고종석.지승호 지음 / 싱긋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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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 인지부조화에 빠지면 답이 없다. 이에 비하면 광신도는 귀여운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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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이스탄불
부르한 쇤메즈 지음, 고현석 옮김 / 황소자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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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우리가 고통 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p.389

'부르한 쇤메즈'

책을 읽는 동안 종종, 그리고 책장을 덮고 나서 한 번 더. 버릇처럼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고 기억한다.


이 소설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듣고 싶은 얘기도 많고. 

내용과 형식 면에서 '소설'이라는 전통적인 정의에 걸맞는 소설을 읽은 지가 얼마인지 꼽아보게 하는 『이스탄불 이스탄불』. 읽는 내내 이토록 스토리텔링이 강한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에 감동했다.


책 소개에 '21세기 고전'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소설을 완독하고 나니 이 표현이 얼마나 적확한가 새삼 공감한다. 장담컨데 이 소설은 오래오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회자되는 고전이 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렇게 되어야 하고.


소설이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너무 고통스럽다. 영상이나 이미지와 달리 텍스트가 구현하는 온갖 표현과 장면에는 비위가 무척 강한 편인데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 왜 세 손가락인가 하면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이 소설이 유일하진 않을 것이므로. 


모든 생명은 유한하기 때문에 고통에 내성이 없도록 태어났다. 고문은 그 고통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하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위정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도구이다. 아마 고문을 금하는 국제 조약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 모두가 다 알다시피 유명무실한 약속이다.


작가의 이력과 소설 속 배경으로 추측컨대 시기는 아마 2010년 대, 구체적으로 에르도안 집권 중반기 쯤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와 동시대 인물로 보인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고통스럽고 가슴 아팠던 이유 중에는 바로 이런 배경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소위 정치범으로 지하감옥에 갇힌 화자 네 명의 입을 통해 진행된다. 이들은 고문으로 극한에 몰린 육체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돌아가며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심문 중에 자신의 동료들 혹은 사랑하는 이들의 정보를 누설하지 않기 위하여 상상의 얘기만 나눈다.


『이스탄불 이스탄불』이 고전적인 소설 형식을 빌어왔다는 건 이런 전개 방식 때문이다. 


어떤 계기로 인하여 한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 상상 속 이야기를 나누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꼽는데 쇤메즈는 화자들의 입을 통해 보카치오를 대놓고 그것도 여러번 언급함으로써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소설적 형식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사실 나는 보카치오보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를 떠올렸는데, 아마 이런 형식의 소설의 계보를 그린다면 '보카치오 - 초서 - 쇤메즈'이지 않을까. 사적 감상으로 내가 그리는 계보는 그러하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쇤메즈의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보카치오의 외형적 형식과 초서의 내형적 서술 구조가 문학적으로 진일보한 소설이라고 느꼈고 소설로도, 문학으로도 거의 완벽한 인상을 받았다. 스토리텔링, 서사 구조와 내러티브, 플롯 등 소설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독자의 오감을 충족시킨다. 이제 3월이지만 아마 올해 내가 읽은 그리고 이후 읽을 소설 중 최고의 소설일 것이 틀림없다.


목차는 첫째 날부터 열째 날까지 열흘로 나누어져 있고 씨줄과 날줄을 엮듯 화자들의 상상 이야기와 화자들의 사연이 플롯을 이루며 정교하게 서술된다. 작가의 대단한 점은, 화자들의 상상 이야기도 화자들의 현실 이야기도 모두 하나같이 문학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난지도에서 핀 이름없는 들꽃의 감동과 여운이 이렇지 않을까.


나의 애정은 데미르타이에서 의사로 다시 데미르타이로 넘나들었는데 결국 일격을 당한 건 이발사 카모에게서였다.

다음은 소설을 읽다가 전율했던 장면.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던 심문자는 손에 쥔 진압봉을 마치 장난감인 양 빙글빙글 돌리다가 위로 치켜들었다. 심문자는 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심문자가 치켜든 손을 한 번에 잡아챘다. 진압봉은 공중에 떴다. 심문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p.120


'나의 오늘이 누군가는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라는 신파같은 아포리즘이 유독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스탄불 이스탄불』이 터키 현대사의 한 장면을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면의 주인공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펜의 힘'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쇤메즈는 한 권의 소설로 지구 다른 나라에서 터키와 무관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던 타국인인으로 하여금 터키의 현대사를 공부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정자들을 향한 저항과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게 했다.


소설은 작가 후기도, 역자 후기도 없이 바로 끝난다. 내겐 그것이 '이스탄불'에 대한 예의처럼 느껴졌다.


故신영복 선생이던가, 어느 정치인이던가. 사상범으로 수감되었다가 출소하고 몇 년 후 우연히 길에서 자신을 고문했던 당사자와 마주쳤는데 상대가 머쓱하게 웃으며 인사 비스무리하게 하고 지나치더라는 거다. 길에서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멱살을 쥐고 내게 왜 그랬냐고 악을 쓸 거라고 상상했는데 막상 마주치니 그냥 허무하고 기운이 빠지더라고.


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그건 마치 죄는 미워하고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일종의 면죄부처럼 느껴진다. 성선설, 성악설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악은 그냥 악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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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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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There is only good vodka and very good vodka. there is no such thing as bad vodka.”
(번역) ˝보드카 좋은 거, 아주 좋은 걸로 주시오.- 나쁜 보드카야말로 최악이지.˝

이쯤되면 번역이 아니라 창작이지.
완독하긴 했지만 읽는내내 읽는 게 의미가 있을까 씨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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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9-11-18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나쁜 번역이네요.

안녕하세요? 최근에 <최후의 증인> dvd를 사서 다른 알라디너들은 어떻게 보셨나 살피다 여까지 오게 됐어요. 반갑습니다.
 
수용소군도 세트 - 전6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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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안 작아요. 기존 열린책들 세계문학 판형보다 조금 더 큽니다. 가독성도 나쁘지 않아요. 다만 양장이 아닌 건 아쉽네요. 그리고 박스 내구성이 정말 별로예요. 뚜껑은 금방 떨어질 거 같고 박스 표면은 접착불량으로 우글거리고. 그래도 전권을 다시 출간해주신 열린책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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