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세 달 전인가, 알라딘에서 중고샵 책 상태에 관한 설문을 할 때 선택 항목을 보고 불안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최상 항목에 책에 서명하고, 줄 긋고, 표지 찢어진 등의 내용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됐다. 혹시 이런 항목들을 보고 '아, 이 정도는 최상이라고 해도 될라나?' 생각하는 어설픈 판매자들이 등장하는 건 아닌가 노파심도 들었다.

내 경우, 책을 구입할 때 기본적으로 소장 목적이 포함된다. 일단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이유가 뭐든 사정이 어떻든 타인에게 주는 건 물론이고 되팔거나 버리지 않는다. 때문에 중고샵을 이용할 땐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 - 품절/절판으로 책을 구할 수 없을 때 고민고민 하다 구입한다. 상태가 좋은 책이 없으면 차라리 읽기를 포기하고 그게 언제가 되든 재출간을 기다린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말 그대로 새 책입니다' 

라는 설명이 부연되어 있으면, 구매자는 '말 그대로 새 책이려니'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중고책인데, 중고에 새 것을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배송비까지 물면서 적지 않은 가격을 치를 땐 판매자의 '최상'을 믿기 때문이다. '새 책에 가깝다' 하면 '새 책에 가까우려니' 기대하는 게 잘못인가?  

중고샵에 바라는 건 아주 소박하고 단순하다. 책 상태에 관해 판매자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라는 것.

읽지만 않으면 새 책인가? 정체불명의 오염 흔적에 알 수 없는 도장들이 잔뜩 찍히고 묵은 먼지로 책은 누렇게 변색되고. 이게 말 그대로 새 책인가? 분명한 건 상품 설명에, '새 책이지만 심한 노끈 자국이 있습니다', '먼지로 인한 오염 자국이 심합니다' 등의 솔직한 설명만 있었어도 구입하지 않았을 거다.

돈 버는 판매자가 아니라 돈 쓰는 구매자를 위해 알라딘은 보완책을 마련하길 바란다.

중고 상품을 등록할 땐, 하다 못해 상태를 '최상'으로 등록하는 상품엔 최소한 상품의 사진이라도 올리게 하던가. 상태가 설명과 다르면 간단하게 환불처리 할 수 있도록 해주던가.

이게 어려운가? 아주 간단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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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SF 작가라는 아서 C. 클라크의 단편집(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1960 / 황금가지)의 첫 번째 단편은「다른 호랑이」(The other tiger)인데 원래 제목은 '반박'이었으나 프랭크 스탁턴의「숙녀일까 호랑이일까」(The lady or the tiger)에 헌정하는 의미로 제목을 바꾸었다고 한다.
실제로 불과 4페이지 분량의 짧은 단편은 내용만 보면 프랭크 스탁턴의 단편과 그닥 연관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원래 제목 '반박'이 딱 제격인데, 또 한편 생각해 보면 '인생은 예측불허'라는 동일한 주제를 보여주니 바뀐 제목도 그다지 나쁘진 않다.
'무한한 우주'를 가정하는 데서 시작하는「다른 호랑이」의 결론은 이러하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는 태어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태어난 것이다. - p.16 「다른 호랑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매년 어마어마한 인세 수입을 올리는(비교하자면 '해리포터'보다 더 많이 벌어 들인)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밀레니엄』의 작가 스티크 라르손은 스웨덴 출신의 기자인데 이 사람의 삶이 참 드라마틱하다. 
모아 놓은 재산이 없었던 그는 은퇴 후 노후에 도움이 될까 해서 생애 첫 소설『밀레니엄』3부작을 쓰는데 출간 6개월 전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7층 사무실까지 걸어서 올라갔다가 심장마비로 급사하고 만 것. 이후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엄청난 수입을 벌어 들였지만 정작 장본인은 수입은커녕 자신의 원고가 책으로 만들어진 것도 못 보고 죽은 셈이다. 한 치 앞을 모르면서 백년대계하는 인간의 나약함이랄까 어리석음이랄까...
참고로 이 사람의 소설은 내 취향엔 조금 어긋나는데, 때문에 얼마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며 어마어마한 인세 수입을 올린 소설이라는 기사를 읽고 좀 많이 놀랐다.


스티그 라르손 외에도 자신의 소설이 가져다 준 행운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비운의 작가 중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인기를 끈『마이너리티 리포트』『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페이첵』의 필립 K.딕도 있다.



다시「다른 호랑이」로 돌아와서...
인생이 예측불허라는 건 아마도 인간의 마음이 예측불허인 데서 기인하는 바가 크지 않을까.
같은 맥락에서, 프랭크 스탁턴의「미녀일까 호랑이일까」는 공주의 선택을 보여주지 않고 끝을 맺는데 사실 나는 공주가 연인을 위해 '미녀'(the lady)를 선택했을 거라는 데에 '매우' 회의적이다.

노예의 두 눈은 어느 쪽이냐고 묻는 듯 이글이글 타올랐다. 공주도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공주는 손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켰다. 아무도 그녀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 그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고, 그는 자신 있는 손길로 오른쪽 문을 열었다.

자, 한번 생각해 보라. 공주는 지난 수주일 동안 호랑이가 소름 끼치는 이빨을 드러낸 채 뛰쳐나오는 광경을 상상해 왔다. 다른 쪽 문을 연 모습도 상상했다. 처녀를 보고 미소 짓는 그의 얼굴! 결혼식 종이 울리면 공주는 입술을 깨물며 머리칼을 쥐어뜯는 것이다. 차라리 그가 당장에 죽어 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무시무시한 호랑이와 사랑하는 이의 비명소리!

공주는 노예가 물어 올 줄 알고 있었고 무슨 대답을 할지도 생각해 두었다. 한 순간의 지체도 없이 공주는 오른쪽 문을 가리켰다. 나는 이 물음을 여러분에게 던지고자 한다. 과연 무엇이 나왔겠는가. 미녀일까, 호랑이일까?

-「미녀일까 호랑이일까」, 프랭크 스탁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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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는 추석 연휴 때 부산에서, <무적자>는 어제(금요일) 저녁에 봤는데, 간단평을 하면 '시라노'는 오밀조밀 아기자기하고, <무적자>는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거친 인상이 든다. <시라노>는 코믹 멜로이고, <무적자>는 액션 느와르이니 당연한 얘기인가 싶기도 하고.

<시라노>를 연출한 김현석 감독의 예전 작품은 <YMCA야구단>과 <스카우트>를 봤는데 이 감독은 연출보다는 각본 쪽에 더 재능이 있는 듯하다. 연출을 못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야기는 조밀하게 잘 쓰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늘 얼마쯤 부족하다 싶은 찜찜함이 남는다.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 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5막 시극에 등장하는 인물로 박색의 외모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숨기고 친구의 연애편지를 대필하는 인물. 이러한 플롯을 그대로 빌려온다는 점에서 영화는 이를테면 극속 극 형태를 취하는데, 연애에 서툰 사람들의 연애를 성사시켜주는 일을 업으로 하는 '시라노 에이전시'를 중심으로 이곳을 찾는 연애 초보들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하지만 능동적으로 시라노 역할을 자처했던 에이전시 대표 병훈(엄태웅)은 어느 날 에이전시를 찾아온 상용(최다니엘)으로 인해 소설 속 시라노처럼 옛 애인 희중(이민정)과 고객 상용 사이에서 매파 노릇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는 뭐랄까, 요소 요소에서 톡톡 튀는 대사와 설정들은 웃음도 나고 재미도 있지만 막상
극장에서 나온 후에 영화를 기억할만한 인상적인 임팩트가 없다. 다만 영화에서 헤어진 옛 애인과 재회했을 때 병훈이 보여주는 몇 가지 행태들이 눈에 띄는데 기존 로맨틱물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정형을 탈피한, 지극히 현실적인 병훈의 반응/역반응이 꽤 신선하다. 시라노의 거대한 코가 병훈에겐 어떤 형태로 감춰져 있는지 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재미.

<무적자>는 리메이크 원작 <영웅본색>을 못 본 이유로 일단 비교는 불가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원작을 안 본 것이 득일까 실일까 갸우뚱 기우뚱 했고, 덕분에 영화관에서 나올 때 제일 먼저 한 건 원작인 <영웅본색>을 봐야겠다는 결심이었다.
내용은 딱, 남자들 얘기다. 영화를 보는 중에 두 번 웃었는데 모두 <영웅본색> 주제가 나올 때였다(영화는 안 봤지만 주제가는 안다).
송해성 감독의 영화는 이번이 처음인데 감독의 스타일을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 건, 그만큼 이 감독의 노선이 분명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송승헌 씨 연기. "은서야~" 할 때 고개를 비틀며 입가를 아래로 살짝 늘이는 버릇이 여전히 남아 있긴 한데 발성이 굉장히 묵직해졌달까, 배우 느낌이 물씬 나는 것이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 했다.
여하튼 재미있는 건 나는 영화 속 남자들의 의리, 우정, 형제애 이런 것에 제법 유치한 감동을 느꼈는데 정작 이 영화를 본 (내 주위)남자들은 상당히 냉정하게 반응하더라는 것.
여담이지만, DVD가 출시되면 꼭 한번 세어보고 싶다. 태민이 끌고 온 부하들과 영춘의 총에 맞힌 태민의 부하들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많은지.
영화 전반에 걸쳐 리얼리티는 많이 떨어진다. 줄거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이야기야 어차피 픽션이므로 감안하고 본다) 단적인 예로, 대한민국 현실에 어울리는 건 아무래도 총싸움보다는 칼싸움인지라 비록 등장인물들이 무기밀매업에 관계되어 있다고는 하나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시도 때도 없이 해대는 총질은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니올시다 싶다. "마이 뭇다 아이가"가 달리 명대사이겠는가.
(그러고 보니, '고마해라'가 '마이 뭇다' 앞에 오냐, 뒤에 오냐로 친구랑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이 난다) 

<시라노>도 <무적자>도 원형을 과거의 작품에서 빌려오거나 가지고 왔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마침 요즘 읽고 있는『클래식 중독』(조선희 / 마음산책)은 저자의 옛 영화 다시 보기 기록으로, 영화 얘기에 덤으로 영화와 얽힌 내외적 수다로 가득하다.
나는 기자 혹은 기자 출신이 저자인 책은 사전 정보가 없어도 거의 고민 없이 장바구니에 담는데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대부분)서술간 사실 관계가 명확하고, 글이 의도하는 바가 뚜렷해서 가독성이 좋으며 무엇보다 기자 특유의 촌철살인의 어법을 읽는 것이 즐겁다는 것이 그들을 신뢰하는 이유다.
이 책은 작가가 기자 출신(연합통신 기자, '씨네21' 편집장 등)이라는 점 외에도 옛날 영화에 대한 호(好)가 나와 통했다는 점에서 꽤나 재미있게 읽고 있다.
사실 옛날 영화는 '옛'이 풍기는 어감 탓인지 왠지 촌스럽고, 고루하고, 밍숭맹숭 심심할 것 같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례로 내 경우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옛날 영화와 마주쳤을 때 거의 대부분 그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되는데, 반면 영화가 현대물인 경우 금방 다시 채널을 돌려 버리는 일이 많다.
참고로 내가 좋아하는(-라기 보다는 여러 의미로 깊은 인상을 받은) 옛 영화는 국내 작품은 <최후의 증인>, 국외 작품은 <줄 앤 짐>(프랑소와 트뤼포 연출)이다. <최후의 증인>은 몇 년 전에 <흑수선>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는데 원작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었던 김성종의『최후의 증인』. 이 외에도『클래식 중독』에서도 언급되는 <어제 내린 비>도 무척 인상이 깊었던 영화로 기억에 남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혹시 원작 소설이 있을까 찾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각본은 (조선희 씨에 의하면)당대 최고 신문 연재 인기 작가였던 최인호이다. 

시간이 관여하는 모든 사물은 저마다 고유한 역사를 가지는데 영화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작품의 품질을 시간의 선/후로 가리는 것은 소모적인 낭비로 보인다. 이번 연휴에 영화를 고를 때 확 끌리는 작품이 없어 고민을 많이 했는데 요즘 들어 옛날 영화가 여러모로 양적 질적으로 더 풍성했고 더 재미있었다는 아쉬움이 부쩍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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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문지 푸른 문학
김도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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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성장소설이라는 건 책을 다 읽고서야 알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느꼈던 감상은 어른을 위한 동화랄까, 소설이 참 착하다라는 것. 정말 소설이 착하다.
내용은 제목이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중2 때 담임이 내준 반성문을 30년이 지나서야 쓰게 된 나의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통로였던 웅변을 그만둔 직후 나선 백일장. 그리고 그 백일장에서 중압감을 못 이기고 우연히 읽은 남의 글을 '일부' 가져다 쓴 것이 빌미가 되어 쓰게 된 원고지 500매의 반성문. 그러나 벌을 수행하면 죄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에, 또 그 외에도 내,외적인 이유와 변수들로 인해 나는 반성문을 쓰는 것을 자꾸만 미루게 된다. 그리고 30년 만에 담임선생님의 병실에서 다시 화두처럼 떠오른 아직 쓰지 않은 반성문과 과거의 기억들. 그리하여 목련을 보면서 마침내 쓰기 시작하는 반성문은 자신의 잘못과 마주하는 당혹감을 지나자 이내 지나간 시간을 향한 향수를 불러오는 추억 여행이 된다.
내용 중에 아내가 나에게 '반성이 아니라 변명처럼 보인다'고 지적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어쩐지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다.
사실 긴 학창시절 동안 반성문을 써 본 경험이 없어 잘 모르지만 만약 반성문을 쓴다면 나 역시 자기 최후 변론 같은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성을 들인 문장이 참 예쁘게 다가오는데 그래서인지 목련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마치 시인의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담인데, (소설 속)김 작가가 쓴 백일장의 글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눈 오는 겨울, 정거장, 소녀, 소녀가 두고 간 사진... 그 위에 덧입혀진 까까머리 중2 남학생의 정서가 궁금하다.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이 어른을 위한 착한 소설이라면 이어지는 단편「진부의 송어 낚시」는 한 편의 유쾌한 콩트를 읽은 듯한 느낌이 든다.
짧은 분량임에도 상당한 존재감을 가지고 다가온 정미도, 정미의 담임도, 송어축제 게시판을 수놓는 글들도 모두 깨알같은 잔재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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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퍼케이션>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이퍼케이션 1 - 하이드라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이우혁의 신작 소설 『바이퍼케이션』을 받아 들고 책 후면의 소개글을 읽었을 때 조금 당황했다. 배경도, 등장인물도 모두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국내 작가가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쓰는 소설에 알러지가 있다. 물론 서양이든 동양이든 보편적인 가치관의 바탕 그림은 대동소이할 것이나 중요한 건 정서의 뿌리가 다르다는 차이점은 상대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정도로는 쉽게 좁혀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말이 통하는 것과 정서가 통하는 건 엄연히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다행히 작가가 이에 대해 후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사실 작가의 말처럼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이 이야기의 큰 기둥을 이루는 이 소설은 이야기의 규모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질감의 무게를 볼 때 국내가 감당하기엔 확실히 시놉시스의 규모가 지나치게 방대하다. 무엇보다도 본문에서 잠깐 언급되지만 서양사를 크게 양분하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그 중에서도 헬레니즘의 근간이 되는 그리스 신화가 이야기의 기둥이고 보면 이야기의 무대가 국내를 벗어나 미국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바이퍼케이션』을 끌어가는 요소는 미국 소도시. 연쇄살인범. 모방 범죄. 과격하지만 인간적인 베테랑 형사. 유년기 상처를 지닌 천재 프로파일러 청년이다. 여기까지는 같은 장르의 여느 소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연쇄살인범을 쫓는 형사와 프로파일러가 엽기적이고 불가사의한 사건의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이야기도 큰 줄기만 보면 흔하고 익숙한 이야기다. 그런데 작가는 이 흔한 이야기에 신화를 끌어온다. 그것도 그리스 신화다. 주인공은 헤라클레스. 그리고 헤라클레스의 12과업. 헤라클레스의 정적으로 부활한 하이드라. 이쯤 되면 책장이 넘어갈수록 궁금해진다. 천재 프로파일러 에이들의 분석처럼 이 모든 이야기는 단지 헤이워드 부인의 분열된 자아가 만들어낸 허무맹랑한 이야기인 걸까, 아니면 과학과 이성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린 것일까. 그리하여 『바이퍼케이션』은 읽는 동안 두 개의 추리를 요구한다. 첫째, 과연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분열된 자아인가 아니면 그의 주장처럼 실제로 부활한 신화 속 영웅인가. 둘째, 하이드라는 과연 누구이며(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그리고 제각각으로 보이는 엽기적인 사건들은 모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쯤 되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여 책을 손에서 놓지 않게 되는 건 당연한 일. 

책장을 넘어가게 하는 속도, 소일을 제쳐두고 독서를 우선 순위에 놓게 하는 흡인력. 이는 모두 작가의 힘이다. 서머셋 몸도 말했다. 소설은 첫째도 둘째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그런 의미에서 이우혁은 정말 얘기를 재미있게 하는 작가이고『바이퍼케이션』역시 세 권이라는 분량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단숨에 읽힌다. 오히려 이야기의 규모를 봤을 때 분량이 짧은 듯 느껴진다. 데이터가 너무 많아 흘러넘친다고나 할까. 장르의 전형에 충실한 한편 그 안에 꾹꾹 눌러 담은 작가의 세계관까지 읽어 내기엔 여러 모로 시스템의 과부화가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신화만도 벅찬데 데카르트와 융까지 등장하니 머리가 바빠지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일까, 갈 길이 바빴던 탓인지 이야기를 통해 펼쳐져야 할 그리스 신화와 관련한 내용의 상당수가 에이들의 입을 통해 서술되는데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새로운 장이 시작할 때마다 등장하는 인용은 그 자체로 엽기적인 한편 흥미진진하여 나중에 따로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담이지만 언젠가 여행을 갔을 때 가이드 분이 여행객들 중에 가장 골치 아픈 부류는 머리 나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했던 게 인상적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세계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부류를 들라면 나는 두 말 않고 어설픈 휴머니즘으로 무장한 어설픈 영웅을 꼽겠다.

사실 그리스 신화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신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신화의 주인공인 신들이 우리 인간들과 하등 다르지 않아서인데 특히 신화 속 얘기를 풍성하게 하는 일등공신은 뭐니뭐니 해도 질투하는 신들이다. 물론 질투하는 신의 최고봉은 헤라(로. 주노) 여신이고. 헤라가 없었다면 그리스 신화를 다룬 책의 두께는 상당히 얇아지지 않았을까. 물론 이 소설 『바이퍼케이션』도 탄생할 수 없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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