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21.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배우들은 모두 중죄를 범한 수감자들이다. 영화 속에서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를 연기한다. 살인이나 조직범죄에 연루된 수감자들이 브루투스가 시저를 암살하는 장면을 연기한다는 설정부터가 대단히 흥미롭다. (뭔가 이상하다.. 난) 원로원이 배경이지만 시저의 암살은 엄연히 살인이고, 그것도 범죄다. 이들은 대중에게 인기가 높은 독재자 시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 배경은 고대 로마고 원작자는 셰익스피어이며 공연장은 다시 현대 로마의 감옥이다. 영화는 수감자들이 연극을 올리는 과정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종의 페이크 다큐에 가깝다. 그러니까, 수감자들은 '교도소에서 <줄리어스 시저>를 무대에 올리는 수감자들'을 여기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수감자들이 극중 극인 <줄리어스 시주>의 장면들을 연기할 때는 대단히 그럴 듯 한데, 오히려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연기할 때는 매우 어색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기 연습을 마치고 자기 감방으로 돌아와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 같은 대사를 치는 장면은 브루투스와 시저, 안토니우스를 연기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부자연스럽다. '극중 인물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혹은 '극과 현실을 혼동한 나머지' 수감자들이 서로 다투거나 불화하는 장면 역시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다. 수감자 배우들은 시저와 브루투스 역할은 멋지게 해내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역할은 잘 해내지 못했다.
[...]
"인간에게 연극적 자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극적 자아가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렸을 때 소꿉놀이를 생각해보세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엄마, 아빠, 의사와 간호사 연기를 합니다. 인간은 원래 연극적 본성을 타고 납니다. 이 본성을 억누르면서 성인이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 다른 사람인 척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사회화가 되는 겁니다. 연극은 사람들 내면에 숨어 있는 이 오래된 욕망, 억압된 연극적 본성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연기하면 신이 나는 거예요"
나는 이말에 100% 동감은 못한다. 연기를 못하기에.. 하지만 내가 연기를 못하는 이면엔 언젠간 들킬거라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 안들킬거라는 확신만 있다면 난 정말 훌륭한 연기자가 될지도 모른다. 내 본모습을 아는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연기할 수 없는 내 결벽만 없다면, 난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천의 얼굴을 가진 연기자가 되고 싶을거다. (아니면 정말 됐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난 보이고 싶지 않은게 많으니까^^)
p123.
조이스 캐럴 오츠는 메릴린 먼로를 모델로 한 역작 <블론드>(올, 2011)에서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생활, 즉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힘겨워하는 메릴린 먼로의 육성을 들려준다. "대디, 난 너무 무서워요, 영화 밖 실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장면은 왜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걸까요?(...)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일상에서는 누구도 '컷'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삶은 때로 끝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만 같다. 그럴 때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면 참 좋을 것 이다.
'자, 다시 갑시다."
난 싫을 것 같다. 다시 가야하나? 정말 싫다. 복구하는게 더 힘들지 모르겠지만, 다시 가고 싶진 않다. 난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얘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래봐야, 그당시로 돌아가봐야 어차피 같은 선택을 할테니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지금 깨달은 걸 과거에 도입하려고하는 건 욕심이 아닐까? 그때로 돌아간들 지금의 내가 깨달은 걸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돌아가면 어차피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도는 결국 같은 선택을 할거다. 난 어차피 나니까. 미래를 아는 내가 아닌 이상 내가 과거로 돌아간들 다른 선택을 할까? 난 아니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