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삶을 사랑하는 철학]
p32~34.
니체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들을 진짜 사랑인지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니체는 예수의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사람들이 수단이나 조건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사랑하라. 그러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이 말에 따르면 사랑이 곧 천국이라는 결실을 위해 감내해야 할 희생이 되고 마는 거지요.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겁니다. "사랑하라.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니체는 그리스도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도 딴지를 겁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이 아닌 자를 배제하고 억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소유욕, 이기심, 예속, 숭배, 패거리 이런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니체의 사랑법은 무엇일까요? 니체는 이런 멋진 말로 표현합니다. '위대한 사랑은 그 자신이 사랑할 자까지 창조한다." 위대한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먼저 사랑스럽게 창조하는 행위라는 것이죠. 진리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사랑할 만한 진리를 창조해야겠죠. 세계를 사랑한다면? 먼저 사랑스러운 세계를 창조해야겠죠.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한다면 이 세상이 망가진 것을 볼 수 없을 것예요. 그런 의미에서 혁명가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저는 혁명은 정치나 사회 이론 이기 전에 미학이라고 생각해요.
니체는 이런 사랑법을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불렀어요. 저는 니체의 사랑법을 조각가에 비유하고 싶어요. 마치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조각한 것처럼 조각가는 돌 속에 숨은 위대한 형상을 끌어내기 위해 망치로 그것을 부수죠. 그것은 그가 돌을 사랑하는 방식이에요. 철학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도 철학을 부수고 철학으로 부터 떠나죠.
내 삶에도 다비드가 있어요. 세계에도 있고, 친구에게도 있어요. 사랑이란 사랑할 대상을 만드는 행위이지 이미 있는 대상을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에요. 무엇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사랑스럽게 만들어 보세요.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심리학에 '행동과 태도' 심리학이라는게 있다. 태도가 행동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행동이 태도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행복해서 웃는다'는 전자의 경우이고, '웃으니 행복을 느낀다'는 후자의 경우가 된다. 대부분은 전자의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내가 원하는 상태에 들어서려면 마치 내가 현재 그런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너무나 느끼고 싶은데,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대상이 없다면, 내가 스스로 대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나 찍어 사랑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면 정말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될까?
p39.
Q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라고 하셨고 너무 사랑해서 뜯어고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서 누군가를 구속하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 역시 폭력이 아닐까요?
A. 맞아요. 그럴 가능성이 커여. 하지만 친구를 바꾸려고 할 때, 그 친구는 '그래 날 바꿔 줘' 하고 가만히 있을까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추한 것을 추한 채로 그대로 두고 계속 친구라고 하는 것은 위선이에요. 그 상태로는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조각가를 예로 들면, 미켈란젤로는 대리석을 조각해서 다비드상을 만들었지만, 그 행위는 자기를 조각한 것이에요. 대리석을 조각하면서 그는 그의 인생을 조각했던 거예요. 내가 너를 사랑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너를 내 편으로 만들겠다고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조각하는 행위예요. 내가 친구에게 던지는 말, 친구에게 하는 얘기는 결국 친구를 바꾸는 게 아니라 나를 바꾸는 일이라는 거죠. 저는 이것을 '이중변형'이라고 표현해요. 하나의 마주침에서 '누가 누구를 변형시키는가'하고 주체와 대상을 놓는 것은 잘못된 경우가 많아요. 교육이 그렇지요. 배움의 장에서 둘은 서로를 통해 배우고 성장합니다. 두 사람이 춤을 출 때 박자가 안맞아서 서로 발을 밟으면 박자를 맞추기 위해 두 사람이 동시에 변화합니다. 한 사람만 고쳐지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적응하면서 변화해 나가는 거죠. 이건 상대방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는 폭군과는 다릅니다. 상대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그래서 섬세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나자신밖에 없다고들 말한다. 나 자신이 바뀌면 그에 따라 주변(상대)도 바뀔거라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도 이런 얘기겠지. 내가 하는 말에 따라 상대의 반응도 달라진다. 그런데 가끔 내가 바뀌어도 상대가 바뀌지 않을 때가 있다. 그건 나혼자 바뀌었다고 착각한 걸까? 아니면 아무리 내가 바뀌어도 안바뀌는 상대가 있다는 걸까?
배병삼 [논어에서 배우는 삶의 자세]
p111.
제자인 자공子貢이 "벗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공자가 대답하길 "진심으로 충고하여 좋은 길로 이끌어 주는 것이 벗이다. 허나 두어 번 충고를 해도 듣지 않으면 그 관계를 끊는 것이다. 친구랍시고 지나치게 안달복달하다가는 도리어 친구로부터 욕을 당하는 수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친구란 것이 고작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사로운 관계가 아니라, 진심으로 충고를 해 주되, 몇 차례의 조언에도 엇나간다면 칼로 베를 자르듯이 관계를 끊어 버린다는 것이니까요. 공자에게 친구 관계, 즉 우정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이 아니라 도리어 '의식화된 길'을 걷는 데서 비롯되는 만남이라는 차가운 생각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정말 노래가 부르고 싶어서 가수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렇게 가수의 길을 가는 가운데, 그와 같은 뜻을 가지고 가수를 지망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벗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자꾸 방황하면서 옆길로 샌다고 합시다. 그럴 때 충심으로 조언해 줘야 해요. "그렇게 흔들리면서 연습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라고요. 이렇게 두어 번 충고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요? 충고를 멈춰야 합니다. '무자욕無自辱', 즉 스스로 욕을 자초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정은 '길'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어떤 구체적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때 공자의 '우정'이라는 것을 단순히 죽마고우로 인식하거나 이해하면 안 됩니다. 공자나 맹자의 눈으로 볼 때, 우정이란 '성숙한 존재들 사이의 만남', 즉 의식적으로 마이웨이를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친구가 먼 데서 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정말 즐겁겠죠? 나와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락樂한 존재', 벗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얻는 가장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벗입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거지만, 같은 길을 가는 '락한 존재'가 와닿았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도 시간은 시간일뿐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좁을 수 있다. (물론, 예전을 향유하는 좋은 시간을 보낼 순 있지만, 서로 먼길을 걸어온 만큼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의 폭은 조금씩 조금씩 멀어졌을 확률이 높다.) 그럴 땐 현재 나와 같이 가는 옆 사람, 죽마고우만큼 오랜 시간을 보내진 않았지만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은 미래를 보는 친구가 있다면 외려 시간과 상관없이 진정한 친구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친구만한 친구가 없다고들 말하지만, 난 조심스럽게 그 의견에 반대를 표하고 싶다. 시간은 그저 시간일 뿐이다. 단순히 보낸 시간의 길이보다는 교감한 시간의 길이와 깊이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p120.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于學), 30세가 되어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而立), 40세가 되어서는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고(不惑), 50세가 되어서는 천명을 알았으며(知天命), 60세가 되어서는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耳順), 70세가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從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