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11~214. 단테 [신곡]

나를 거쳐 고통(슬픔)의 도시로 들어가고,

나를 거쳐 영원한 고통(비탄)으로 들어가고,

나를 거쳐 길 잃은 무리 속에 들어가노라.

정의는 높으신 내 창조주를 움직여,

성스러운 힘과 최고의 지혜,

최초의 사랑이 나를 만드셨노라.

내 앞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들뿐,

나는 영원히 지속되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편, 제3곡 1~9행)

 

Through me the way is to the city dolent;

Through me the way is to eternal dole;

Through me the way among the people lost.

 

Justice incited my sublime Creator;

Created me divine Omnipotence

The highest Wisdom and the primal Love

 

Before me there were no created things,

Only eterne, and I enternal last.

All hope abandon, ye who enter in!

(롱펠로 영역본, 지옥편, 제 3곡 1~9행)

 

여기서 흥미있는 구절은 "나를 거쳐"입니다. "Through me"는 이탈리아어로 "per me"인데, 이 말에는 '나 때문에, 나로 인해'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분명 지옥문입니다. 지옥문 위에 쓰여 있는 글귀이므로 지옥문이 문 앞에 선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나'를 지옥문의 비명(碑銘)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갑자기 분위기가 묘해집니다. 나 때문에 슬픔의 도시로 들어간 사람은 없는지, 나 때문에 영원한 비탄에 빠져든 사람은 없는지, 나 때문에 길 잃은 무리 속에 들어간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내가 남을 지옥으로 집어넣는 입구가 된 적이 있다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지옥문인 겁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에 들어가려면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합니다. 지옥은 절망의 장소입니다.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이 문장을 "지옥에 가지 않아도 현실세계에서 희망을 버리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란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지옥은 저 땅 밑에 있는 구체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희망을 버리면 그 순간부터가 지옥입니다. 남의 희망을 빼앗으면 그는 지옥문입니다. 남에게 지옥문 역할을 하는 것만큼이나 큰 죄악은 없을 것입니다.

 

p385. [통치론: 물질주의적 인간관]

 

대부분의 자손들이 죽어야 한다면(모두가 제한된 자연생태계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종의 개체들은 서로 다 다르므로 평균적으로(항상 그런 것이 아니고 통계적으로 봐서) 생존자들은 국지적으로 변하는 환경에 우연히 가장 적합한 특성을 가진 개체들이다. 유전이 일어난다면 살아남은 개체들의 자손은 성공적이었던 부모를 닮을 것이다. 오랜 세월 이렇게 유리한 변이가 축적되면 진화적 변화가 일어난다. <풀하우스>

 

스티븐 J.굴드가 정리한 다윈이론의 핵심입니다. '더 뛰어난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우연히' 환경에 적합했던 종이 살아남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종이 미생물보다 뛰어난 존재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종의 기원>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진화는 단지 국지적인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종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허망할 정도로 뻔합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옹호했던 토마스 헉슬리는 <종의 기원>을 읽고 나서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 하기도 했습니다.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 중에서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와 그의 동생 줄리안 헉슬리가 있습니다. 고상한 생물학자였던 줄리안은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습니다. 여기서 "성공"은 "우연히 적응한"이라는 뜻입니다. 서로 경쟁해서 이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은 '정말로 오랜 세월'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에서는 겪어볼 수도 없는 세월입니다. 굴드의 설명을 더 보겠습니다.

 

p459~461. [법의 정신: 직업으로서의 정치 - 근대의 정치, 악마적 힘들과 관계맺기]

 

정치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정치를 '위해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 먹고사는 게 해결된 사람입니다. 반면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은 이른바 생계형 정치가입니다.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면 안됩니다. 그들은 정치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자는 이에 대하여 경제활동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그 스스로가 직접 지속적으로 자신의 노동력과 사고력을 전부 또는 상당 부분 영리활동에 투여하지 않고도 자신의 수입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활동에 묶여있지 않은 가장 완벽한 경우는 금리 내지 지대생활자입니다. 그는 완전히 불로소득 생활자입니다. 이 불로소득의 원천은, 과거의 영주와 오늘날의 대지주 및 귀족의 경우에서와 같이 지대일 수도 있고 - 고대 및 중세의 노예와 농노의 공납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 유가증권이나 이와 유사한 근대적 금리수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는 물론이고 -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 기업가도, 특히 근대적 기업가도 방금 언급한 금리생활자가 누리는 것과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 국가나 정당이 (경제적 의미에서) 정치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치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된다 함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지도층이 '근권 정치적'으로 충원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베버는 근대국가에서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을 하나 이야기 합니다. 근대국가에서 여유 있는 사람만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입이다.

 

재산이 없고 따라서 기존의 경제체제의 존속을 바라지 않는 집단에 속하는 계층이야말로 - 물론 전적으로 이 계층만이 그런 건 아닙니다만 - 가장 철저하고 절대적인 정치적 이상주의의 주창자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비일상적, 즉 혁명적 시기에 그러합니다.

 

물론 재산이 없고 기존의 경제체제의 존속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이상주의적인 정치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상적인 시기가 아닙니다. 모든 정치가에게 청렴결백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근대 정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당 간의 모든 투쟁은 본질적 목표를 위한 투쟁일 뿐 아니라 관직 수여권을 위한 투쟁이기도 합니다.

 

정당들은 관직 참여에서 뒤지는 것을 자신들의 본질적 목표를 배반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관직을 얻고자 하는 일 역시 근대 정치가 처할 수박에 없느 필연적인 상황입니다. 정당이 정권을 잡으려는 것은 자신들이 내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더욱 구체적으로 관직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미합중국의 정당들은 헌법 해석에 대한 과거의 대립이 사라진 후에는 순전히 관직사냥 정당이 되어버렸으며,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핵심적 정강도 득표 가능성에 맞추어 바꾸어 버립니다.

 

근대 정치의 모습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당들을 지탱하던 정치적 이념이 사라지고 순전히 관직사냥 정당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는 근대국가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정치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근대사회에서 정치는 더러운 것입니다. 종교와 도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권력을 추구하는 집단으로서의 정당이 형성됩니다. 정당은 근대국가의 민주주의 제도가 낳은 조직입니다.

 

p502~503 [파높티콘: 내면화되는 감시의 시선]

벤담의 자유주의와 로크의 자유주의는 다릅니다. 벤담 식의 공리주의에 입각하면 토론이 필요 없습니다. 얼마나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효용을 얻을 수 있는지만 따지면 됩니다. 벤담의 공리주의에 근거해서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것은 사회 연구가 아니라 사회 공학이 됩니다. 벤담의 논의를 받아들이면 행정부가 입법부를 대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행정부는 경제성의 원칙에 따라 굴러갑니다. 이러한 행정부의 우위가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에 의회를 경시하는 정치지도자는 기본적으로 벤담의 공리주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잘 구현된 조직이 기업입니다. 기업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생산요소나 비용으로 봅니다. 기업 논리를 완전히 받들이면 효용 중심의 인간이 탄생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업이 작동하는 원리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원리는 정반대에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업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면 민주주의 정치도 발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논리의 효용을 믿기 때문에 기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정치에서도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다는 말조차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폴라니는 이러한 효율화의 원리에 따라서 세계를 움직인 결과 파시스트가 등장했다고 주장합니다. 자기조정 시장을 믿고 경제 시스템을 운용했는데 그게 잘 안되니까 피시스트적인 해법이 나왔다는 겁니다. 폴라니가 보기에 파시스트 체제에서 인간은 이익을 따지는 존재조차 되지 못합니다. 그저 체제 전체의 부속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p565. [논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

남이 나를 알아준다는 느낌은 '스쳐도 죽는 독약'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느낌을 잊지 못하고 이 느낌에 중독되어 버립니다. 이 느낌이 생기면 사람이 오만해지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미디어에 나가면 남들이 알아줍니다. 그런데 미디어에 중독이 되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봐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그 걱정은 자신의 내면을 갉아먹는 좀벌레이고, 결국에는 그 좀벌레가 자신을 지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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