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12~113
죽는 건 쉬운일이 아니다. 영원히 잠드는 건 더더욱 그렇다. 얼마나 많은 자살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던가? 실패하기 직전에, 정말이지 바보처럼 죽기 직전에 사람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서 "잘 봐, 난 죽을 거야......"하고 말한다. 그런데 죽을거라 말하면서 당신은 무얼 원하고 있는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그런 짓을 하는가? 죽으려고 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어찌됐든 언젠가 죽게 마련이지 않은가. 삶을 구하는 건 자살이 아니다.
p113
진정 자비로운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죽는 날 아무도 슬퍼하지 않기를 온 영혼으로 열망하는 것이다.
p115
이 애늙은이는 아비가 죽고 나서 며칠간 자신이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독수리처럼 영민한 표정에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하늘이 내린 선물과도 같이, 어린 그녀에게 광적인 슬픔을 조장했다. 비올레트는 마치 의사로부터 자신이 암에 걸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고 흐뭇해하는 행복한 신경쇠약증 환자처럼 비쳤다. 그렇게 비올레트는 애도를 표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이로서는 영광의 날이었다. 만일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울 줄 알았다면, 거울 앞에서 붉게 충혈된 자기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비올레트의 가식적인 태도는 그 곳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뜻밖의 형벌을 안겨 주었다. 그들 본래의 고통이 더 이상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p116
'사람들은 방앗간으로 들어가듯 죽음 속으로 들어간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죽음은, 사냥꾼들이 쏘아 죽이기 전에 저들끼리 제멋대로 다투는 토끼들과도 같은 포획물이다. 삶에 어떤 의미를 찾는자들은 얼마나 안심이 되겠는가.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으려면 자신을 포획한 자의 손에 자기 시체를 내맡기면 그 뿐이고, 살아남은 자들은 거리낌없이 그 고귀한 의미로 존재의 덧없음을 대신하면 된다. 이때 자유가 잠들어버리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음이나 허무가 아닌, 충만함이며 넘쳐흐르는 기억들이고 찬사들이다. 그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미 완성된 이야기를 새 비석위에다 쏟아 붓는 자명한 사실일 뿐이다.
p126
좋은 생각이란 걸을면서 젖어드는 생각이다......
세상에는 다른 길과 닮지 않은 전혀 다른 길이 존재하고,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헤치고 나아갈 수 없는 길이 있다.
그 길이 당신은 어디로 이끌까? 그런 의문을 품지 말고
그저 그 길을 따라 가라.
- 프리드리히 니체
p127
스승이란 무엇인가?
성실한 사람은 전적으로 자신을 의지할 뿐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권한이 있다면 단연 복종을 거부하는데 있다.
p130
나는 한 남자를 상상해본다. 그만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여인의 곁에서 한평생을 살다가 정작 그녀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 채 죽었을 그녀의 연인을
-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p148
자신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을 숨기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p155
자신에 대해 쓴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며, 다른 대상에 대해 쓰는 것 역시 헛된 일이다. [...] 몽상은 자백이나, 자백 또한 몽상이다. 그 누가 글 속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만들어내겠는가. 누가 진실로 여겨지는 고백들 속에 숨겨진 삶을 이야기한단 말인가.
진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어떤 작가들도 결코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작가는 겉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만큼만 이야기 할 뿐이다. 모든 고백이 고백할 대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니 모든 창작은 속내 이야기인 것이다. 헤겔은 말한다. "내 사상체계에서 나와 흡사하다고 여겨지는 건 거짓이다." 바로 그와 같다. 따라서 모든 건 거짓이다.
p162
결혼은 죽음을 부르는 진정제이자, 아타락시아(마음의 평정)이며, 고통을 줄이는 모르핀이고, 비극을 겪은 후 찾아드는 평온이다. 어떤 사랑도 고통을 피해갈 수 없으나, 어떤 고통도 타성에 저항하지는 못한다. 타성은 아무것도 바구지 않으나, 부지불식간에 사랑하는 존재를 다만 매일 얼굴을 맞대는 존재로 바꾸는 위력을 지닌다. 따라서 결혼은 습관이나 권태처럼 현실에서 부딪치는 일상적인 수련이다. 상대의 옷을 벗기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상대의 속살은 더욱 잘 알게 되고, 눈가의 그늘이라든가 강박증이라든가 비열함이라든가 나쁜 취향들이 더욱 눈에 잘 띄게 된다. 결혼은 법적인 삶의 거세여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지루한 무거움의 위력 앞에서 멀찍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그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받을까? [......]
괴로원한들 무슨 소용인가? 오히려 둘이 함께 땅에 묻히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p163
결혼식은 백색의 장례식이다. 친구들의 환호 속에 식을 마치고 나면, 요술을 부리 듯 사랑과 욕망은 땅속으로 매장되고 만다. 고통받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긴 인간은 스스로 목에 족쇄를 채운다. 그러고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던 유년의 고통들에 종지부를 찍고, 축복에 휩싸여 인생의 자잘한 고민거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어른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자살이란 감히 생각지도 못할 인생의 금기라고 여긴다면, 당신은 언제든지 결혼할 수 있으리라. 마약은 금지되어 있지만 결혼은 합법적이니, 그 편이 훨씬 낫지 않은가. 감정의 안락사에 매달리지 않고서, 잉걸불에 타들어 가는 재도 없이, 아니 불구덩이 속에 얼음을 간직한 채로 어떻게 결혼을 할 것인가? 그러니 결혼은 시작의 행복한 종말인 것이다.
p203
그 창조주(스피노자의? 라이프니츠의?)는 겉으론 의지주의자의 면모를 지니나 자신의 신성한 무관심을 더욱 잘 은폐하려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