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사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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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선배 부원들이 손뼉을 치며 과장스럽게 기뻐하자 신입 부원인 1학년들도 즉시 흉내를 낸다. 판에 박힌 전개 과정이다. 부원들은 선생님의 작은 실수에도 깔깔 웃어주고, 선생님의 필사적인 개그-그러나 그다지 신통치 못한-에도 깔깔대며 맞장구쳐줌으로서 올해부터 고문을 맡은, 백발에 입이 좀 비뚤어진 설교자 풍의 선생님을 ‘엄격하나 어딘가 좀 모자란 선생님’이라는 전시품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선생님 역시 ‘나도 알고 보면 재미있는 사람이란다’하는 식으로 그녀들에게 다가간다. 어쩜, 서로의 수요와 공급이 잘 맞아떨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시절의 배구부가 떠오른다. 그런 단체 경기는 이젠 무리다. 분명 몸이 따라주지 않을 거다. 홀로 싸워야 하는 육상을 알아버린 지금, 팀원들과 주고받는 눈 사인은 낯간지럽다.

“터진 상처를 보기가 무서우니까 이렇게 반창고를 붙이는 거야”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샤

처음에는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까지 읽고 나니 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아이가 세상을 보는 눈이라는 것은. 내가 십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 그 절대 고독(사실 이렇게 우아한 단어로 표현될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의 상태를 너무나 잘 그려냈다. 기대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서 결국 자꾸 튕겨져나오는 미칠 것 같은 젊음. 손 내밀 수 없는 두려움.

"홀로 싸워야 하는 육상을 알아버린 지금, 팀원들과 주고받는 눈 사인은 낯간지럽다"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런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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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 지음, 조규형 옮김 / 책세상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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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억하나요, 나의 크루소. 엄청난 폭풍에 지붕이 날아가버린 후, 우리는 밤에 누워 떨어지는 별을 쳐다보곤 했잖아요. 눈부신 달빛 때문에 대낮인 줄 알고 잠에서 깨기도 했지요. 영국에서 우리는 어떤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는 지붕을 갖게 될 거에요. 그러나 우리 섬의 달이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영국의 달보다 더 크고, 별 또한 더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마 우리는 거기서 달에 더 가까웠겠지요. 우리가 분명 태양에 더 가까웠듯이 말이죠.”
p. 63


존 쿳시의 <포>는 로빈슨 크루소의 섬에 살았던, 크루소가 죽은 뒤 프라이데이를 데리고 영국으로 가서 작가 포에게 무인도 이야기를 팔았던 여자 수잔 바턴에 대한 이야기이다(디포DeFoe가 De Foe로 분리 가능한 이름이며, 그래서 결국 로빈슨 여행기를 쓴 다니엘 디포의 성은 '포' 라는 말). 원작에 없는 여성을 크루소의 무인도에 보낸 쿳시는 프라이데이는 벙어리로 만들었다.


역자 후기를 인용해서 크루소라는 인물을 설명하자면,
그(크루소)는 성실하다기보다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뿌릴 씨도 없으면서 밭을 갈고, 용감하다기보다는 잔인하며, 독실하다기보다는 아집으로 가득 찬 인간이다. 그는 씻지도 않고 잘 때는 이를 갈며 (‘잊어버린 것은 어떤 것도 기억할 가치가 없어’) 일기도 쓰지 않고, 심지어는 섬에서 탈출하려 하지도 않는다.


1, 2장은 수잔 바턴이 처음 크루소의 섬에 갔을 때 부터의 이야기를 편지글 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미 구출된 바턴은 작가 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사서 소설로 써 달라고 수기를 보내는데 그게 1장이다. 하지만 파산을 해서 도망가버린 포 때문에 바턴과 프라이데이는 결국 포의 텅 빈 집에 얹혀 있으면서 포의 물건을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 수잔은 프라이데이를 그의 고향에 돌려보내주려고 브리스톨 항구로 가지만 포기한다는 데 까지가 2장. 3장에서 수잔과 프라이데이는 포와 함께 살게 된다. 수잔은 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수잔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한 소녀는 포의 집까지 수잔을 따라오고, 프라이데이는 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4장은 판타스틱한 짧은 꿈 같은 이야기.


ps. 짜증나는 것 하나. 역자 후기에 보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쓴 미셀 투르니에에 대해 이런 말이 적혀 있다.
"프랑스 작가 미셀 푸르니에의 <프라이데이>"
이름 오타도 짜증이고, 한국에서 출간된 책 제목을 자기네 멋대로 저렇게 쓰다니. 인상깊은 구절/


브라질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죠. “사람의 마음은 어두운 숲이다.”
-p. 13


아마도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파타고니아에서는 일 년 내내 바람이 불어대지만 그곳 사람들은 머리를 감싸쥐지 않는데 이 여자는 왜 이럴까?’ 하지만 파타고니아 사람들은 다른 곳을 모르기 때문에 사방에서 사계절 내내 바람이 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요. 저는 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
p.20


포르투갈 선박에서의 반란과 살인, 크루소의 성, 그의 사자머리와 원숭이 가죽으로 만든 옷, 벙어리 노예 프라이데이, 크루소와 프라이데이가 만든 넓지만 아무것도 없는 밭, 오두막의 지붕을 앗아갔고 해변에 죽어가는 물고기를 가득 쌓아 놓았던 무서운 폭풍. 반신반의하며 이렇게 생각해봐요. ‘이런 일들이 이야기의 소재가 될 만큼 기이한 경험들일까?’ 머지않아 저는 새롭고 기이한 경험들을 꾸며내게 되겠지요. 크루소가 난파선에서 연장과 총을 건지고, 아주 조그만 배라도 한 척 만들어 탈출을 시도하고, 섬에는 식인종이 찾아와 전투를 벌이고 유혈이 낭자하고 식인종들이 죽고, 마침내 금발의 낯선 이들이 한 자루의 옥수수를 가지고 와 파종을 하게 된다는 둥의 이야기를 꾸며내야겠지요? 아, 언제쯤 기이한 경험이 없이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p.97


내가 그랬고, 너도 그랬듯이, 크루소 역시 나름대로 분명 섬의 삶이 지겨웠을 거고, 그래서 스스로 긴장을 풀지 않으려고 식인종이 올 거라고 생각해낸 걸 수 있어.
p. 119


낙담한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팔을 뻗어 머리를 뒤로 젖혀, 프라이데이가 춤추던 대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이게 좋겠다고 생각해 산들 바람을 일으켜 옷을 말렸어요. 몸도 따뜻해지더군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저는 얼어 죽었을 거에요. 턱이 풀어지고 열이, 아니 열이라는 환각이 온몸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어요. 발 밑의 건초조차 따뜻하게 느껴질 때까지 춤을 췄지요. 프라이데이가 왜 춤을 췄는지 알게 된 것 같아 기뻤어요. 당신의 집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전혀 알 수 없었을 거에요. 온몸이 흠뻑 젖어 통 빈 헛간의 어둠 속에 주저앉아 않았다면 발견할 수 없었겠지요. 이를 통해 우리의 삶에는 어떠한 밑그림이 있다는 것과,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면 그 밑그림이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양탄자를 짜는 이를 보면 첫 눈에는 실타래만 들어오지만, 인내심을 갖고 계속 지켜보다보면 눈앞에 꽃들과 껑충거리는 일각수와 작은 탑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과 똑같지요.
p. 127


당신은 아리아드네 공주가 떠나버린 테세우스를 원망하듯 아조레스 제도에서 딸을 그리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나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시간은 흐릅니다.
p. 170


그래서 포 옆에 자리를 잡았다. 대낮의 잔인한 햇빛 아래서 그가 앉아 있는 지저분한 침대 시트, 그의 길고 더러운 손톱, 눈 아래로 축 늘어져 있는 눈두덩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늙은 매춘부”라고 포가 말했다. “어둠 속에서만 거래를 해야 하는 늙은 매춘부.”
p.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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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타이거! 그리폰 북스 9
알프레드 베스터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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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육체는 강하지만 야심 부족으로 지적 잠재력이 성장하지 못했음. 에너지는 최저 상태. 상스러운 인간의 전형. 예기치 못한 충격을 받으면 잠재력이 깨어날 수도 있지만 정신 분석 전문가는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없었음. 승진을 추천하지 않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 있음.
-걸리버 포일의 인사기록 중에서, p. 23

SF판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고 가장 쉽게 설명되는 <타이거! 타이거!>는 한 남자가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특정 순간에 도달하기까지의 이야기인 동시에 절망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복수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다. 가장 깊은 절망에서 시작된 복수에의 욕구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고, 포일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잠재력을 깨웠다. 복수하려던 대상의 실체를 알고 복수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사내는, 결국 '진짜' 복수를 해야 하는 대상을 찾아내게 되었다. 이렇게 상스럽고 천박하고 단순한 주인공에게 사랑을 느끼고 연민을 느끼다니. <타이거! 타이거!> 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제목은 이야기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독자 머릿속에서 탄식이 되어 울린다.

화려하고 아름답고 눈물나고 답답하고 간절하다. SF물이라 단어들이 생소해서 처음에는 재미있는 플롯 전개에도 불구하고 읽고 또 읽고(하다가 편집상의 실수도 발견). 하지만 중반부를 지나면 책장이 막 혼자 넘어간다. 캐릭터 설정이 대단히 극적이고 만화적인데, 저자 베스터의 이력을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입이 떡 벌어진다. DC 코믹스의 작가로 <배트맨> <슈퍼맨> 집필에 참여한 그는, TV쪽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찰리 챈'과 같은 아이콘을 만들어냈다.

최근 읽은 가장 마음에 드는 몇몇 글은, 무기력과 권태과 고독의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를 지나, 무엇이 기다릴 지 모르는 출구의 가느다란 빛줄기를 보는 것에 관련되어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가 썼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귀여운 남작 이야기 <화촉>에서 시작된 이런 계시의 연속이 내게 뭔가 변화의 계기가 되어줄까.

"나는 지금까지 줄곧 호랑이였습니다. 내 자신을 훈련시켰습니다...... 좀 더 긴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더 강한 호랑이가 되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가르쳤습니다...... 더 빠르고 치명적인 존재가 되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그랬어요. 가장 무서운 존재죠."
"아니, 아닙니다. 나는 너무 와버렸습니다. 단순함을 넘어버렸습니다. 나는 이제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보이지 않는 눈을 궤뚫어보고, 내가 혐오하는 내 사랑을 보고, 내 자신을 보았습니다. 호랑이는 사라졌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묻지 마십시오. 그냥 사는 겁니다."

ps.1 확실히 복수는 가장 갈렬한 동기. 복수하려는 마음을 지탱하는 용기도 쉬운 것은 아니다.
ps.2 책을 덮고 나서 한참이 지났는데도 심장박동이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가장 매혹적인 tortured hero. 다음에는 어렸을 적 축약본으로만 읽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완역본과 베스터의 첫 작품인 <파괴된 사나이>를 읽어야겠다. 대체 베스터는 왜 책을 두권밖에 쓰지 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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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법정 동서 미스터리 북스 19
존 딕슨 카 지음, 오정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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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딘버러 시내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마녀를 감별하던 연못이라고 한다. 마녀로 의심되는 여인을 물에 빠뜨린다. 여인이 떠오르면 마녀, 떠오르지 않으면 마녀 아님. 떠오르면 불에 타 죽고, 가라앉으면 물에 빠져 죽는 것이다. 수백년이 지나,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연못 바닥에 가라앉은 수많은 유골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연못이 떠올랐다.

딕슨 카의 추리소설 <화형법정>은 오컬트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만한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스티븐스는 인기 작가 고던 클로스의 원고를 하라는 상사의 지시를 받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원고를 펼친 스티븐스는 클로스가 저술한 17세기 실존 살인마들에 관한 원고에 딸려 있는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다. 희대의 독살범으로, 교수형을 당한 뒤 화형에 처해진 17세기의 여자 살인마 마리 도브리가 자신의 아내 마리와 똑같이 생긴 것. 심지어 액세서리마저 똑같은 것을 보고 스티븐스는 할 말을 잃는다.

그런데 2주 전에 죽은 동네 마일즈 노인의 사인이 지병으로 인한 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이라는 이야기를 마일즈 노인의 아들 마크로부터 듣게 된다. 스티븐스와 마크,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납골당에서 마일즈 노인의 시체를 꺼내 부검을 해 보기로 하고 시체를 가지러 한밤중에 몰래 납골당에 가는데, 관 속에는 시체가 없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시체를 가져갈 가망성이 없다는 말(이른바 ‘밀실’이었던 것)을 들은 일행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마일즈 노인이 죽던 날 밤, 그 집 거실에 걸려 있던 마리 도브리(로 추정되는, 얼굴 부분이 손상된) 초상화와 똑 같은 옷을 입은 여인이 노인의 방으로 들어갔다는 증언이 가정부의 입을 통해 나오면서 사건은 점점 꼬여간다. 스티븐스가 아내 마리의 처녀시절 이름이 마리 도브리라는 것과,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이 바로 17세기 살인마 마리 도브리와 관련된 곳이었음을 기억하면서 17세기의 독살 사건과 현재의 사건이 복잡하게 얽힌다.

루이 14세의 궁정 귀부인들이 악마주의를 예찬했다던가, 17세기 프랑스에서 독약을 이용한 살인을 자행하는 귀족 여인들이 등장했다거나, 비밀 결사 여인들이 6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독살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살인사건에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마지막 장 까지 긴장을 풀 수 없는 책이었다. 최근 읽은 <차이나 오렌지의 비밀>이나 이 <화형법정>이나, 시간을 뛰어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돋보이는 추리소설의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읽지 마세요.

아내의 정체에 관해 고민을 거듭하는 스티븐스의 시점에서 진행되던 이야기가 마지막 장 ‘평결’에서 시점이 바뀌면서 뜻밖의 반전을 맞는다. 이 반전으로 인해 풀렸던 것 같던 사건은 다시 복잡하게 바뀌고, 오컬트적인 분위기는 강화된다. 논리적인 결말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황당한 느낌으로 다가갈 듯.

사라진 시체의 ‘밀실’ 트릭이 깨지는 과정은 추리소설을 많이 읽은 독자라면 대충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밀실 트릭이나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 그 자체만큼이나 인물들 간의 복잡한 관계와 과거와 현재의 교묘한 교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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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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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0분 동안만 지속되는 기억력으로 80분마다 다시 시작되는 삶을 사는 박사의 파출부로 일하게 된다. 나의 아들을 본 교수는 아들의 정수리가 평평하다며 ‘루트(√)’라고 별명을 붙여주고, 박사와 나와 아들은 우정을 키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야마다 에이미의 코멘트("지금 누군가에게 가장 권해주고 싶은, 너무도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책")를 읽고 호기심에 사 두고 처박아 둔 책이었다. 나는 수학이라는 과목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거의 질병 수준으로 수학에서 버벅거렸었다. 이 책에서는 옛날 나를 매혹시켰던 숫자들의 아름다운 법칙들과 함께 80분짜리 삶을 사는 할아버지가 나온다.

외로운 세 사람-노년의 박사, 미혼모의 딸인 동시에 미혼모인 나, 나의 아들 루트-이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며 일상을 살아간다. 박사는 주인공이 출근할 때 마다 낯선 얼굴로 쳐다보고, 옷 자락에 붙여놓은 메모지의 ‘새 가정부’라는 말을 읽고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고, 매일 “신발 사이즈가 어떻게 되나?”하고 묻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도 빛이 바래지 않는 것은 숫자의 다양한 매혹과 사람 사이의 따뜻함이다. 슬픔을 조장하는 장면 따위는 없는데도, 책의 중반이 넘으면서부터는 박사가 입만 열면 막 눈물이 쏟아지는 책이다. 눈물을 닦을 틈도 없이 마구 쏟아져 내린다. 박사가 천재라거나, 박사와 ‘나’ 사이에 로맨스가 싹튼다거나 했다면 아주 식상했을테지만, 이 이야기는 그런 만용을 부리지 않는다. 마지막 몇 장은 카포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는 성장하고, 나이가 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 가고, 더 이상 함께 나눌 수 있는 추억은 없지만 모두 그 상태 그대로 행복하다.

수학에 대한 박사의 말을 읽다 보면, 꼭 숫자 뿐 아니라 인생에도 적응되는 말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이 제 손으로 발명한 것이라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나. 수학자도 필요가 없지. 숫자의 탄생을 지켜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알았을 때는 이미 거기에 있었을 뿐이지.”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이 다 그렇지 않을까. 음악도 글도. ‘루트’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인간이지만 루트로 설명 가능한 세계는 이미 자연 속에 있었던 것이니까.

“반드시 답이 있다고 보장된 문제를 푸는 것은, 가이드를 따라 저기 보이는 정상을 향해 그저 등산로를 걸어 올라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수학의 진리는 길 없는 길 끝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있는 법이지. 더구나 그 장소가 정상이란 보장은 없어. 깎아지른 벼랑과 벼랑 사이일 수도 있고, 골짜기일 수도 있고.”

“신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수학에 모순이 없으니까. 그리고 악마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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