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쿳시 지음, 조규형 옮김 / 책세상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기억하나요, 나의 크루소. 엄청난 폭풍에 지붕이 날아가버린 후, 우리는 밤에 누워 떨어지는 별을 쳐다보곤 했잖아요. 눈부신 달빛 때문에 대낮인 줄 알고 잠에서 깨기도 했지요. 영국에서 우리는 어떤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는 지붕을 갖게 될 거에요. 그러나 우리 섬의 달이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영국의 달보다 더 크고, 별 또한 더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마 우리는 거기서 달에 더 가까웠겠지요. 우리가 분명 태양에 더 가까웠듯이 말이죠.”
p. 63


존 쿳시의 <포>는 로빈슨 크루소의 섬에 살았던, 크루소가 죽은 뒤 프라이데이를 데리고 영국으로 가서 작가 포에게 무인도 이야기를 팔았던 여자 수잔 바턴에 대한 이야기이다(디포DeFoe가 De Foe로 분리 가능한 이름이며, 그래서 결국 로빈슨 여행기를 쓴 다니엘 디포의 성은 '포' 라는 말). 원작에 없는 여성을 크루소의 무인도에 보낸 쿳시는 프라이데이는 벙어리로 만들었다.


역자 후기를 인용해서 크루소라는 인물을 설명하자면,
그(크루소)는 성실하다기보다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뿌릴 씨도 없으면서 밭을 갈고, 용감하다기보다는 잔인하며, 독실하다기보다는 아집으로 가득 찬 인간이다. 그는 씻지도 않고 잘 때는 이를 갈며 (‘잊어버린 것은 어떤 것도 기억할 가치가 없어’) 일기도 쓰지 않고, 심지어는 섬에서 탈출하려 하지도 않는다.


1, 2장은 수잔 바턴이 처음 크루소의 섬에 갔을 때 부터의 이야기를 편지글 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미 구출된 바턴은 작가 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사서 소설로 써 달라고 수기를 보내는데 그게 1장이다. 하지만 파산을 해서 도망가버린 포 때문에 바턴과 프라이데이는 결국 포의 텅 빈 집에 얹혀 있으면서 포의 물건을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 수잔은 프라이데이를 그의 고향에 돌려보내주려고 브리스톨 항구로 가지만 포기한다는 데 까지가 2장. 3장에서 수잔과 프라이데이는 포와 함께 살게 된다. 수잔은 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수잔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한 소녀는 포의 집까지 수잔을 따라오고, 프라이데이는 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4장은 판타스틱한 짧은 꿈 같은 이야기.


ps. 짜증나는 것 하나. 역자 후기에 보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쓴 미셀 투르니에에 대해 이런 말이 적혀 있다.
"프랑스 작가 미셀 푸르니에의 <프라이데이>"
이름 오타도 짜증이고, 한국에서 출간된 책 제목을 자기네 멋대로 저렇게 쓰다니. 인상깊은 구절/


브라질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죠. “사람의 마음은 어두운 숲이다.”
-p. 13


아마도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파타고니아에서는 일 년 내내 바람이 불어대지만 그곳 사람들은 머리를 감싸쥐지 않는데 이 여자는 왜 이럴까?’ 하지만 파타고니아 사람들은 다른 곳을 모르기 때문에 사방에서 사계절 내내 바람이 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요. 저는 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
p.20


포르투갈 선박에서의 반란과 살인, 크루소의 성, 그의 사자머리와 원숭이 가죽으로 만든 옷, 벙어리 노예 프라이데이, 크루소와 프라이데이가 만든 넓지만 아무것도 없는 밭, 오두막의 지붕을 앗아갔고 해변에 죽어가는 물고기를 가득 쌓아 놓았던 무서운 폭풍. 반신반의하며 이렇게 생각해봐요. ‘이런 일들이 이야기의 소재가 될 만큼 기이한 경험들일까?’ 머지않아 저는 새롭고 기이한 경험들을 꾸며내게 되겠지요. 크루소가 난파선에서 연장과 총을 건지고, 아주 조그만 배라도 한 척 만들어 탈출을 시도하고, 섬에는 식인종이 찾아와 전투를 벌이고 유혈이 낭자하고 식인종들이 죽고, 마침내 금발의 낯선 이들이 한 자루의 옥수수를 가지고 와 파종을 하게 된다는 둥의 이야기를 꾸며내야겠지요? 아, 언제쯤 기이한 경험이 없이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p.97


내가 그랬고, 너도 그랬듯이, 크루소 역시 나름대로 분명 섬의 삶이 지겨웠을 거고, 그래서 스스로 긴장을 풀지 않으려고 식인종이 올 거라고 생각해낸 걸 수 있어.
p. 119


낙담한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팔을 뻗어 머리를 뒤로 젖혀, 프라이데이가 춤추던 대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이게 좋겠다고 생각해 산들 바람을 일으켜 옷을 말렸어요. 몸도 따뜻해지더군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저는 얼어 죽었을 거에요. 턱이 풀어지고 열이, 아니 열이라는 환각이 온몸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어요. 발 밑의 건초조차 따뜻하게 느껴질 때까지 춤을 췄지요. 프라이데이가 왜 춤을 췄는지 알게 된 것 같아 기뻤어요. 당신의 집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전혀 알 수 없었을 거에요. 온몸이 흠뻑 젖어 통 빈 헛간의 어둠 속에 주저앉아 않았다면 발견할 수 없었겠지요. 이를 통해 우리의 삶에는 어떠한 밑그림이 있다는 것과,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면 그 밑그림이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양탄자를 짜는 이를 보면 첫 눈에는 실타래만 들어오지만, 인내심을 갖고 계속 지켜보다보면 눈앞에 꽃들과 껑충거리는 일각수와 작은 탑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과 똑같지요.
p. 127


당신은 아리아드네 공주가 떠나버린 테세우스를 원망하듯 아조레스 제도에서 딸을 그리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나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시간은 흐릅니다.
p. 170


그래서 포 옆에 자리를 잡았다. 대낮의 잔인한 햇빛 아래서 그가 앉아 있는 지저분한 침대 시트, 그의 길고 더러운 손톱, 눈 아래로 축 늘어져 있는 눈두덩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늙은 매춘부”라고 포가 말했다. “어둠 속에서만 거래를 해야 하는 늙은 매춘부.”
p.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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