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공항으로 가는 길에, 나는 창밖을 본다. 공중을 떠다닐 수 있을 듯 가벼운 기분이다.“행복은 정상 이하의 중력에 있는 것 같아.” 내가 말한다.
마저리의 시선이 느껴진다. “깃털처럼 가볍게, 그런 뜻이야?”
“깃털은 아닐지도 몰라. 풍선에 더 가까운 기분이야.” -54

나는 SF라는 장르를 거의 알지 못한다. 크게 정을 붙여본 적도 없다. 환타지라는 장르도 그렇다. 가끔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날 때면, 실제로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건 사실이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읽은 책이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내가 환타지나 SF의 매력을 느끼는 순간은 책보다는 영화에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 본 <스타워즈> 시리즈, 극장에서 멍하게 화면을 바라보던 순간의 강렬한 매혹(어렸을 땐 내가 모르는 세계를 보는 게 가장 좋았다, 일상이라는 단어 따위 엿이나 먹어라). 빨려들어갈 것 같은 공간과... 뭐 <토탈 리콜>과... 스탠리 큐브릭과... 음음 빗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그런 게 다다. SF를 안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현재 상황에서 책을 골라야 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게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안 날 추리소설의 목록 쪽이 우선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SF 팬들에게 다소 겁을 집어먹은 것도 사실이지만. -ㅅ-

<마일즈의 전쟁>과 <어둠의 속도>를 연달아 읽었는데, 두 책의 느낌은 무척 다르다. 그러니까 이 두 권이 같은 장르로 분류된다고? 누가 그렇게 물으면 아니라고 답해야 할 것 같을 정도다. <어둠의 속도>는 장르문학쪽 레이블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일즈의 전쟁>이 스페이스 오페라라면, <어둠의 속도>는 철학책이다. 똑같이 생각하기는 힘들 수밖에. 특히 나같은 SF 문외한에게는.

<어둠의 속도>를 읽으면서 감탄한 점 중 하나는, 엘리자베스 문이 자폐인인 루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루의 생각의 속도와 습관에 독자를 길들인다는 데 있다. 누구나 지나치고 말 소소한 것들을, 루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게다가 루는 미래의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치료과정을 통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도 다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폐인이 아닐 수는 없다. 루의 관점에서 보는 세상은 변덕스러운 애인과 같다. 루는 빛에 예민한데,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얼굴과 화를 내는 얼굴은 그의 눈에 똑같이 빛난다. (그래서 처음엔 그 둘을 구분하는 게 힘들었다) 혹은, 속을 알 수 없는 애인 같기도 하다. "정상인"들은 할 말이 없다고 분명히 말하는 대신 에둘러 시간이 없다고 우물거리기 일수다. "정상인"들이 표현하는 삶의 이면 읽기는 루에게 늘 버겁다. "정상인"들에게도 버겁듯이. 별로 다르지 않은 거다.

...뭐 이런저런 설명은 다 집어치우고, 이 책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엘리자베스 문이 너무나 분명하게, "루를 위해 슬퍼하지 말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루를 동정하지 말것. 루를 위해 슬퍼하지 말 것. 마지막 부분에 루를 바라보는 톰의 시선에 맞닿으면 결국 울컥하면서 슬퍼지는데, 그 슬픔은 톰을 위한, 그리고 나를 위한 것이다. 이기적이고 속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현재 사랑하는 모습 그대로 있어주지 않는 데 대한 억울함이다. 나도 톰처럼 생각했고, 톰처럼 슬퍼했는데- 그걸 루를 위해서라고 착각하지 말 것. 루는, 행복해할 줄 아는 인간이다. 정상 따위의 꼬리표와 상관없이.

+
이 글을 쓰고 싶었던 건 대학교 때의 프랑스어 회화 교수님 때문이다. 그때 문제가 된 말은 정확히 말해 정상적인normal은 아니고 자연스러운naturel이었는데, 그 수업때 우리는 불어로 시를 지어오게 되어 있었던가 그랬다. 동기 중 하나가 시를 "설명"하다가(미친 게 틀림없다, 뭘 설명해) 자연스러운 어쩌고 운운했는데, 그 단어 하나로 교수님 뚜껑이 열린 거다. 그 때부터 "니네 자연스러운 게 뭐야? 너네가 사는게 자연스러워? 약 안 먹으면 죽을 걸 약을 먹어서 살아, 그게 자연스러워? 자연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어? 니들이 하는 것 중에 인위적으로 수정되지 않은 게 있어?" 정상적인, 자연스런... 이런 말들의 폭력성. 참고로, 엘리자베스 문은 그 교수님보다 더 우아하게 독자를 설득한다만.

++
루는 마저리가 예쁘지 않았어도 좋아했을 거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그건 거짓말이라고 믿는다. (웃음) 왜 남자들은 예쁜 여자친구를 자랑하면서 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거지. 마저리가 착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ㅎㅎ 나는 루가 천재가 아니어도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천재인 루를 좋아하게 된 마당에 그런 걸 주장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
나로서는 <마일즈의 전쟁>과 <어둠의 속도> 중 뭐가 더 좋은지를 가를 수 없다. 내가 SF를 종종 챙겨 읽을 정도의 애정을 갖는 건 <마일즈의 전쟁> 같은 책들 때문인 게 사실인데, SF라는 꼬리표 없이도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읽힐 가능성이 높은 <어둠의 속도>는 아무리봐도 대단하다고밖에 생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긴다이치 코스케를 좋아하지만 또한 필립 말로를 좋아한다. 장르적 재미라는 건, 아름다운 글이 주는 만족감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롤러코스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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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7-05-26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흥미로운 책과 리뷰를 발견합니다.
가끔 발견하는 이런 소설에 열광을 해요.

marina🦊 2007-05-2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음, 한동안 소설 읽는 재미가 시들해졌었는데 말입니다.

asdgghhhcff 2007-07-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려고 하는데^^ 정말 재미있을 듯 하네요

marina🦊 2007-07-12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네,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