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관 1 - 법의관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5
퍼트리샤 콘웰 지음, 유소영 옮김 / 노블하우스 / 2004년 11월
구판절판


죽은 사람은 무방비 상태다. 다른 시신들과 마찬가지로, 이 여자에 대한 모욕 역시 이제 시작일 뿐이다. 살해당한 로리 피터슨의 온몸을 까발리고 구석구석 사진을 찍어서 각 분야의 전문가, 경찰, 변호사, 판사, 배심원들이 보게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육체적인 특징이 어떻군, 이런 건 별로군 하며 이러쿵 저러쿵 품평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범인이 아닌 피해자가 심판의 대상이 되고, 그 인물 됨됨이와 삶의 방식이 시시콜콜 드러나고, 판단의 기준이 되며, 때로는 유치한 농담과 냉소적인 귓속말로 모욕당할 것이다.-21쪽

나는 탱크처럼 단단한 차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동을 걸기 전에 늘 안전벨트를 맨다. 우리 집은 곳곳에 화재경보기가 달려 있고 값비싼 도난 경보 시스템도 장착되어 있다. 비행기를 타는 것도 가능하면 피하고 되도록 기차로 여행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신(死神)과도 같은 카페인과 담배, 콜레스테롤은 도대체 끊을 수가 없다.-66쪽

일이 잘 안 풀릴 때 나는 요리를 한다.
일진이 지독히 안 좋을 때 밖으로 나가서 테니스 공을 죽어라 때리는 사람도 있고, 헬스클럽에 가서 관절이 삐걱거릴 때까지 조깅을 하는 사람도 있다. 코럴 게이블스에 사는 내 친구 하나는 접는 의자를 가지고 해변으로 나가서 모든 스트레스를 햇볕에 태워 없애며, 사회 생활을 하면서 절대 그런 택을 읽고 있는 모습을 들키면 안될 선정적인 연애소설을 읽는다. 이 친구는 지방법원의 판사다.-181쪽

우리는 우리가 그 나이 또래였을 때 어른들이 하던 거짓말을 믿지 않았으면서도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루시한테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어른 못지 않게 눈치가 빠른 아이한테 말이다.-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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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관 1 - 법의관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5
퍼트리샤 콘웰 지음, 유소영 옮김 / 노블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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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케이 스카페타라는 이름의 법의관이 등장하는 시리즈 물 중 첫번째 책이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이 발생하는데, 피해자들 간에는 외모상의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스카페타 박사는 이 사건을 수사하는데, 사건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기밀 유출과 멈추지 않는 살인 등으로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는 줄거리.

CSI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만한 책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씌어진 게 90년인데, 그 때만 해도 DNA로 범인을 색출하는 게 무척 드문 일이었던 모양이다. DNA를 구해도 그게 실제 증거로 인정받기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옛날 사람들, 진범 잡기가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살인의 추억>때도 느꼈던 거지만.) 앞으로 시리즈가 계속 나온다던데, 기대해 볼 만 한듯. 여자가 주인공이지만 감정적이지도 않고, 애비라는 여자 기자와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 그리고 처음엔 개와 고양이 같았던 마리노 형사와 일로 서로를 인정하게 되는 설정 같은 게 인상적이다. 패트리샤 콘웰은 깔끔하고 속도감있는 문체를 지녔는데, 덕분에 책장을 금방 넘기게 된다는 느낌. 스카페타 시리즈와 함께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도 다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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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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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는 불행은 이겨내야 하는 법이다. 나에게는 시간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있었다. 나는 파나마로 가기로 했다. 산토스와 카날 사이는 육로로 대략 4천 킬로미터의 거리였다. 하지만 그 정도는 길을 만들고자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별로 멀게 느껴지지 않는 거리이다.
-<파타고니아 특급열차> 루이스 세풀베다

요즘 읽는 책들에는 행복한 주인공이라고는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행복하다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자격은 없는 거니까. 사람들은 불행에 더 끌리는 법이다. 나는, ...이야기에 끌린다.

기행문이자 자전적 소설인 세풀베다의 <파타고니아 특급열차>는 길 위에서, 낯선 길 위에서 생기는 일들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하는 방식으로 남미라는 이름의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완성한다. 주인공은 '나'이지만, 진짜 이야기는 내가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담에서 시작된다. 마을을 찾아 밀림을 4개월간 헤매던 남매가 통정을 하고, 카톨릭 신부는 벌거벗은 원주민 여자들에게 홀려 다섯 아이를 낳고, 키가 너무 큰 시체를 운반하기 위해 경비행기 문짝을 뜯어내고 저공비행을 시도한다. 나치를 위해 싸웠던 과학자는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의 신망을 얻으며 노벨상도 포기하고 틀어박혀 삶을 마친다. 길 위에서 넘쳐났던 그 무수한 이야기들을 몰스킨moleskin 노트에 기록하는 세풀베다의 모습은 너무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주인공이 책 내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여행자들만이 느끼는 특유의 정취에 대한 묘사 부분이 남의 얘기 같지 않다. 아, 어디까지나 고생하는 여행자들 얘기이긴 하지만.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묘사들이 있는 것이다.

라 키아카에 도착한 것은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었는데,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안데스의 싸늘한 냉기가 혹독하게 안겨 들고 있었다. 나는 배낭을 열어 외투를 걸칠까 했으나 발걸음을 놀리다 보면 온몸에 훈기가 발산되리라는 생각이 들어 매표소를 찾아 총총걸음으로 내달았다.

호텔의 침대는 숫제 냉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어쩌면 밖에서 이미 냉기에 젖은 탓일지도 몰랐다. 침대에서 온기를 모으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행에서 오는 피곤함에 노인과 함께 다섯 병이나 비운 포도주로 인해 취기가 겹치고 있었지만 기차를 놓칠까봐 잠을 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담배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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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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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경식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가족사도, 그 가족사를 부정하지 않는 그의 태도도 좋다. 정말 많은 것을 머리에 담고 너무 많은 일을 경험하고 넘치도록 생각하고 수없이 말을 고른 글을 쓸 줄 아는 사람.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역사 뿐 아니라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서경식은 가족사와 자신의 내밀한 마음의 역사를, 자신이 성장했던 배경과 그 배경에 항상 함께했던 책들을 빌어 담담하게 기술한다.

인상깊은구절들/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급식비라든지 수학 여행 적립금 따위를 내는 일이었다. 이 외에도 간유나 구충제를 신청하는 일이라든가, 걸레를 만들기 위해 천 조각을 학교에 갖고 가는 일도 좋아하지 않았다.
내 어머니는 당신 자녀들의 학업과 관련된 그 잗다란 준비물들을 일일이 빠짐없이 신경 써서 챙겨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집이 극도로 가난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따금 급식비마저 제때 납부할 수 없었던 건 사실이다. 게다가 어머니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바쁘셨다. 하지만 진정한 속내를 이야기하자면, 어머니는 글눈이 어두워 학부형들을 위한 학교의 통지서나 공지사항 등을 읽으실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어머니는 당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기시려고 내 앞에서 오랫동안 글 읽는 시늉을 하며 지내셨다.
급식비를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봉착하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아차, 깜빡했다!"하며 큰 소리를 내는 것이 특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두 번 세 번 거듭되면 곧 들통이 나기 마련이었다.

혹시라도 이마무라라는 사람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아빠 지금 집에 안 계세요. 집에 아무도 없어요"라고 대답하도록 우리는 어머니께 단단히 교육을 받았다. '이마무라'는 금융업자의 이름인데 어느 해던가 섣달그믐에는 음울한 표정의 이마무라 씨가 방 안까지 들이닥쳐 우리 형제들과 '가요청백전'을 시청하며 내내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모두들 "어린 시절은 참으로 좋았다. 가능한 일이라면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나 역시 그 같은 마음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하나하나 꼼꼼히 되짚어보면, 그리움이나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어린아이 나름의 슬픔과 괴로움이 마음속 저편에서 되살아온다.
-<소년의 눈물> 서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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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5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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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원작소설. 감성적이지만 감상적이지 않은 이런 연애소설은 오랜만이다. 단편소설의 끝을 완전히 비튼 영화 각색자는 마술을 부렸다. 영화와 책 둘 중 어느 하나모자란 것이 없는 뛰어난 작품들이다.  


"아냐. 너무 좋아서 기분이 좀 나빠졌어."
츠네오는 웃으면서 조제에게 키스했다. 그런 조제의 모습을 보니, 외출하는 것보다 한 번 더 안고 싶은 욕구가 미칠 듯이 끓어올랐다. 가느다란 인형 같은 다리가 왜 그토록 에로틱한지. 두 다리 사이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바닥 모를 깊은 함정, 악어의 입 같은 올가미. 츠네오는 거기에 사로잡혀 눈이 뒤집힐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그러나 그가 뒤축을 눌러 신은 스니커즈를 벗어던지고 젊은 남자의 땀 냄새를 풍기며 안으로 들어오면, 현관문을 닫고 고리를 걸고, 드디어 먹잇감을 찾았다고 외치며 마구 웃어젖히고 싶은 기분에 빠져든다.
-사랑의 관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불안 때문이다. 상대방의 감정에 대한 불안 따위는 사실 별거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한 불안이다. 급격한 감정 변화가 가장 두려운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 후회할 걸 알고도 뛰어들고야 마는 그 착란의 순간. 이번만은 다르겠지, 라고 생각해서가 아냐. 이건 모두, 이번에야말로, 라는 믿음 때문이고, 혹은 희망을 이미 버렸다고 생각하는 오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30년 가까이 살면서, 죽는 날까지 취한 모습 따위는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남자 몇명의 코가 비뚤어지도록 취한 모습을 최근 몇달 사이에 보게 되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팔다리를 흔들거리며 걷는 술 취한 남자들이 싫은 것 보다 귀엽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나. 이제 정말 시작인가보다. 이 인생, 이제 진짜 시작하는 건가보다.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이제는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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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5-02-24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살까 말까의 망설임이 휙 날아가네요. 읽고 싶어라...

marina🦊 2005-03-20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좋습니다. 영화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