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 타이거! 그리폰 북스 9
알프레드 베스터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육체는 강하지만 야심 부족으로 지적 잠재력이 성장하지 못했음. 에너지는 최저 상태. 상스러운 인간의 전형. 예기치 못한 충격을 받으면 잠재력이 깨어날 수도 있지만 정신 분석 전문가는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없었음. 승진을 추천하지 않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 있음.
-걸리버 포일의 인사기록 중에서, p. 23

SF판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고 가장 쉽게 설명되는 <타이거! 타이거!>는 한 남자가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특정 순간에 도달하기까지의 이야기인 동시에 절망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복수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다. 가장 깊은 절망에서 시작된 복수에의 욕구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고, 포일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잠재력을 깨웠다. 복수하려던 대상의 실체를 알고 복수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사내는, 결국 '진짜' 복수를 해야 하는 대상을 찾아내게 되었다. 이렇게 상스럽고 천박하고 단순한 주인공에게 사랑을 느끼고 연민을 느끼다니. <타이거! 타이거!> 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제목은 이야기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독자 머릿속에서 탄식이 되어 울린다.

화려하고 아름답고 눈물나고 답답하고 간절하다. SF물이라 단어들이 생소해서 처음에는 재미있는 플롯 전개에도 불구하고 읽고 또 읽고(하다가 편집상의 실수도 발견). 하지만 중반부를 지나면 책장이 막 혼자 넘어간다. 캐릭터 설정이 대단히 극적이고 만화적인데, 저자 베스터의 이력을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입이 떡 벌어진다. DC 코믹스의 작가로 <배트맨> <슈퍼맨> 집필에 참여한 그는, TV쪽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찰리 챈'과 같은 아이콘을 만들어냈다.

최근 읽은 가장 마음에 드는 몇몇 글은, 무기력과 권태과 고독의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를 지나, 무엇이 기다릴 지 모르는 출구의 가느다란 빛줄기를 보는 것에 관련되어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가 썼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귀여운 남작 이야기 <화촉>에서 시작된 이런 계시의 연속이 내게 뭔가 변화의 계기가 되어줄까.

"나는 지금까지 줄곧 호랑이였습니다. 내 자신을 훈련시켰습니다...... 좀 더 긴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더 강한 호랑이가 되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가르쳤습니다...... 더 빠르고 치명적인 존재가 되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그랬어요. 가장 무서운 존재죠."
"아니, 아닙니다. 나는 너무 와버렸습니다. 단순함을 넘어버렸습니다. 나는 이제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보이지 않는 눈을 궤뚫어보고, 내가 혐오하는 내 사랑을 보고, 내 자신을 보았습니다. 호랑이는 사라졌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묻지 마십시오. 그냥 사는 겁니다."

ps.1 확실히 복수는 가장 갈렬한 동기. 복수하려는 마음을 지탱하는 용기도 쉬운 것은 아니다.
ps.2 책을 덮고 나서 한참이 지났는데도 심장박동이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가장 매혹적인 tortured hero. 다음에는 어렸을 적 축약본으로만 읽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완역본과 베스터의 첫 작품인 <파괴된 사나이>를 읽어야겠다. 대체 베스터는 왜 책을 두권밖에 쓰지 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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