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형법정 동서 미스터리 북스 19
존 딕슨 카 지음, 오정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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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딘버러 시내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마녀를 감별하던 연못이라고 한다. 마녀로 의심되는 여인을 물에 빠뜨린다. 여인이 떠오르면 마녀, 떠오르지 않으면 마녀 아님. 떠오르면 불에 타 죽고, 가라앉으면 물에 빠져 죽는 것이다. 수백년이 지나,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연못 바닥에 가라앉은 수많은 유골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연못이 떠올랐다.

딕슨 카의 추리소설 <화형법정>은 오컬트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만한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스티븐스는 인기 작가 고던 클로스의 원고를 하라는 상사의 지시를 받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원고를 펼친 스티븐스는 클로스가 저술한 17세기 실존 살인마들에 관한 원고에 딸려 있는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다. 희대의 독살범으로, 교수형을 당한 뒤 화형에 처해진 17세기의 여자 살인마 마리 도브리가 자신의 아내 마리와 똑같이 생긴 것. 심지어 액세서리마저 똑같은 것을 보고 스티븐스는 할 말을 잃는다.

그런데 2주 전에 죽은 동네 마일즈 노인의 사인이 지병으로 인한 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이라는 이야기를 마일즈 노인의 아들 마크로부터 듣게 된다. 스티븐스와 마크,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납골당에서 마일즈 노인의 시체를 꺼내 부검을 해 보기로 하고 시체를 가지러 한밤중에 몰래 납골당에 가는데, 관 속에는 시체가 없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시체를 가져갈 가망성이 없다는 말(이른바 ‘밀실’이었던 것)을 들은 일행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마일즈 노인이 죽던 날 밤, 그 집 거실에 걸려 있던 마리 도브리(로 추정되는, 얼굴 부분이 손상된) 초상화와 똑 같은 옷을 입은 여인이 노인의 방으로 들어갔다는 증언이 가정부의 입을 통해 나오면서 사건은 점점 꼬여간다. 스티븐스가 아내 마리의 처녀시절 이름이 마리 도브리라는 것과,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이 바로 17세기 살인마 마리 도브리와 관련된 곳이었음을 기억하면서 17세기의 독살 사건과 현재의 사건이 복잡하게 얽힌다.

루이 14세의 궁정 귀부인들이 악마주의를 예찬했다던가, 17세기 프랑스에서 독약을 이용한 살인을 자행하는 귀족 여인들이 등장했다거나, 비밀 결사 여인들이 6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독살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살인사건에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마지막 장 까지 긴장을 풀 수 없는 책이었다. 최근 읽은 <차이나 오렌지의 비밀>이나 이 <화형법정>이나, 시간을 뛰어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돋보이는 추리소설의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읽지 마세요.

아내의 정체에 관해 고민을 거듭하는 스티븐스의 시점에서 진행되던 이야기가 마지막 장 ‘평결’에서 시점이 바뀌면서 뜻밖의 반전을 맞는다. 이 반전으로 인해 풀렸던 것 같던 사건은 다시 복잡하게 바뀌고, 오컬트적인 분위기는 강화된다. 논리적인 결말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황당한 느낌으로 다가갈 듯.

사라진 시체의 ‘밀실’ 트릭이 깨지는 과정은 추리소설을 많이 읽은 독자라면 대충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밀실 트릭이나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 그 자체만큼이나 인물들 간의 복잡한 관계와 과거와 현재의 교묘한 교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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