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협의 빛
전혜정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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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몹시 인상적이고 강렬한 책, 그리고 작가의 등장이다.

 

최근 내가 읽은 소설의 경향을 최근 한국 소설의 경향이라고 말한다면 어폐가 있을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혜정 작가의 소설은 확실히 기존 한국 현대소설의 어떠한 경향에서 벗어나있고 개성이 강했다.

 

유려한 감성이 돋보이는 소설이든, 그로테스크하고 괴이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소설이든, 최근 읽은 많은 한국 작가의 소설들이 현대 속의 개인에 집중하고 있다면 전혜정 작가의 소설은 시대도, 개개인의 특성도 명확하지 않다. 주인공 중 하나가 다른 이름, 다른 얼굴로 대체되더라도 이야기의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을 정도다.

 

<나와 미스 마를렌>처럼 비교적 시대적 배경이 명확한 첫 번째 단편을 제외하면 이 소설집의 모든 작품은 공통적으로 마치 미래의 중세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명확한 신분 계급과 구시대적인 제도나 풍습, 복장 묘사 등은 분명 유럽의 중세를 떠오르게 하는데도, 그게 반드시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게 하는 오묘한 분위기와 미묘한 장치들이 마련돼 있어서인 것 같다.

 

이번 소설집 가운데서는 예외적이라고 한 <나와 미스 마를렌>도 주인공이 관찰하는 앞집 남자를 둘러싼 배경 등은 한국의 대도시를 떠올리게 하는 명확한 배경을 갖고는 있지만, 앞집 남자가 사는 세상은 다른 단편들 속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시대, 알 수 없는 세상 속이기도 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속사정과 나 자신이 소설 속 이웃 중 한 명이었으면 누구 못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을 게 분명한 엄청난 충격이 <나와 미스 마를렌>이라는 예쁜 제목 속에 숨어 있다. 그는 왜 그 집도 포기하지 못하고, 마를렌도 포기하지 못했을까. 둘 중 하나를 포기했다면 세상 속에 자신을 슬그머니 끼워 넣고 얼마든지 남들처럼 살 수 있었을텐데.

 

암소와 여배우라니, 다분히 이질적인 조합이었으나, 한편으론 어쩌면 그리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괴상한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이런 그를 유일하게 망측하다거나 미쳤다거나 욕하지 않고 일종의 이해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남부러운 직업 없이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던 주인공이다. 그리고 사건 이후 주인공은 이상을 버리고 현실에 순응하는 삶을 선택하는데, 이것은 현대사회에서는 조화시키기 어려운 이상을 가진 남자의 최후를 목격한 주인공의 선택으로 읽힌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알레고리로 끼워 맞추기에는 뭔가 아쉽지만, 더 많은 함의를 읽어낼 수도 있겠지만.

 

쉽게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빨리 포기하는 것도 이미 현대인의 한 습성이 돼버린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품 <죽음의 도시>, 표제작 <해협의 빛>, <봉인된 시간>, <침묵>, <노예들의 땅에서>는 한마디로 끔찍하고 암울하다. <해협의 빛>은 그 묘사가 더욱 상세하고 거침이 없어서 무서울 정돈데, 책을 읽으면서 끔찍하다’, ‘두렵다라는 다소 현학적인 느낌 말고 실제로 무서워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아무래도 8살 때쯤 읽은 오싹오싹 공포체험이후 처음인 것 같다.

 

<죽음의 도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 이후 유독 그 도시에서만 수많은 사람이 자살을 선택하는 괴상한 사건을 다룬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설정은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해프닝이나 최근 개봉한 한국 영화 연가시에도 등장하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죽음의 도시>에서는 끝까지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영화와 소설의 차이이기도 한 것 같다. 영화가 끝까지 원인을 알려주지 않고 살아남은, 그래서 또 그 상태로 살아남은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생존자의 모습을 비추며 끝이 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지만, 소설은 그들을 그냥 남겨둘 수 있는 거다. 그냥 그렇게.

 

아빠. 아이가 이안을 불렀다. , 왜 그러니? 아빠, 나 무서워.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너무 무서워, 아빠도 무서워? 아이가 물었다. 그럼, 나도 무서워. 이안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아침을 먹을 거야. 그러고 나서 다시 무서워해도 늦지 않아.

 

<해협의 빛>은 과연 표제작이 될 만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전혜정이라는 작가의 세계를 충분히 대변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촌스러운 이 제목이 이 소설의 가장 적절한 제목이고, 이 소설집의 표제작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작가가 해협의 빛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정보와 교류가 철저히 차단돼있는 D시와 오로지 D시에 대한 소문만으로 해협의 빛을 견디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역시 현대의 일면과의 알레고리가 보인다. 요즘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일 것 같지만, 그럼에도 과거가 아니라 현재나 미래의 이야기일 것 같은 <해협의 빛>.

 

빛이 가진 밝은 이미지와는 전혀 반대로 오로지 죽음만이 가득한 해협과 끔찍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누구도 실제로 가 본 사람은 없고 오히려 빛이 나오는 장소인 D시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는 현대인 모두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누구나 갖고 있을 공포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D시에 가 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주인공뿐인 거다. 주인공만이 감히 D로 가 볼 생각을 한다.

 

이렇기 때문에 <봉인된 시간>은 여전히 끔찍한 이야기이지만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군대와 매력적인 어린 여자. 많이 보고 듣고 실제로 겪었던 이야기니까. 주둔군은 패망하더라도 죽지 않는다면 자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지만, 속절없이 몸을 빼앗긴 여자는 패망하지 않아도 그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불편한 사실.

 

<봉인된 시간>마라, 뒤의 다른 소설에서도 작은 비중이지만 잠시 등장하는데, 왠지 자신의 끔찍한 운명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같은 고통이 계속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했다.

 

<침묵>도 마찬가지다. 끔찍한 고통과 죽음이 등장하고, 이단과 마녀사냥이 등장한다.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는 모두 인간이다. 특이하게도 양의 탈을 쓴 인간이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소설 안에서 실제로 구현되는데, 실제로 우리는 이 말을 보통 가해자에게 쓰겠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반대의 경우로 쓴다.

 

도저히 불가해한 현상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우리의 습관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습관이기도 하다.

 

<노예들의 땅에서>는 길이가 꽤 긴 중편소설이다. 시작과 끝이 한 장면으로 연결된 구조다. 본래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삶은 산화’, 말 그대로 시간의 흐름에 의해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전혜정의 작품 속에서 죽는 수많은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이 자연스러운 삶, 혹은 자연스러운 죽음을 허락 받지 못한다.

 

<노예들의 땅에서>는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노예들이 감히 인생의 가장 중대한 선택을 함으로써 결국 형벌을 받게 되는 슬픈 이야기다. 이런 곳에서 아름다움은 오히려 불필요하고, 불행하며, 잔인할 뿐이다.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감상도 굉장히길어졌다. 책을 보기 전 가장 기억에 남았던 평이 그로테스크한 서정성인데, 이렇게 잔인하고 암울한 데도 이 속에 서정성이 녹아 있다는 것도 참으로 놀랍다. 그리고 작가의 습관인지,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전체에 걸쳐 사위가 고요하다거나 사위가 적막하다거나(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이 비슷한) 하는 표현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아마 전혜정 작가의 이번 소설집 속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이 모두 이렇게 뼈저리게 고독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주변이 아무리 살육으로 소란하고 고통의 비명으로 시끄럽고 요란하게 피로 물들어도 우리 개개인은 모두 고요하고 적막한 사위에 둘러싸여있는 것만 같이 그저 고독하기 때문에.

 

근데 단지 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토록 고독하고 고통스럽다는 점 뿐일까. 왠지 그건 아닐 것 같다.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그냥 왠지 그럴 것 같다. 그 어디에도 명확한 희망의 징후는 없지만 그럼에도 왠지.

 

어쨌든 그 누구보다 용감해서 멋진 작가니까. (이쯤 쓰고 보니 명확하네, 난 전혜정 작가에게 첫눈에 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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