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 - 시대를 뛰어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 Wisdom Classic 7
김경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군주론 적령기

 

[군주론]은 제목이나 분위기가 주는 중압감에 비해 사실 어려운 책은 아니다. 지레 겁먹고 한 페이지도 펼쳐보지 않았다면 혹시 모를까, 한 장이라도 읽었다면 하루도 못돼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길지도 않고 크게 어렵지도 않은 책이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강렬하고 파격적이기 때문에 지금도 수없이 되읽히면서 논란거리가 되고있다.

 

그런데 왜 저자는 하필 마흔이라면 군주론을 읽으라 했을까?

 

내가 군주론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도서관에서 학습 만화로였다. 사실 그 당시에 그 책이 유명한 지도 몰랐고 읽는 내내 고전이라 그런지 꽤 비현실적이라고만 생각했다.

 

“악행은 한꺼번에, 선행은 조금씩” 이런 말들이 써 있는 책을 보면서 그래도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던 탓인지 조금 거부감이 들었었다.

"이런.. 딱 따돌림 당하기 좋은 책이네" 라는 생각이 그때 내 맘이었다.

 

대학교 때 한번 더 읽었을 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맞는 부분이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아직 마흔은 아니지만 서른을 훌쩍 넘긴 이 때 다시 군주론을 읽으니 이제 그 뜻을 알 것도 같다.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저자도 이런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현실의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는 인문학은 위험하지만, 특히 군주론은 더 위험하다. 같은 책을 읽고 어떤 이는 독재의 정당성을 얻었고, 어떤 이는 민주주의의 완성을 읽어내기 때문이다. 내가 사회적 경험이 부족했을 때는 이 책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경험은 있으나 개인적 성찰이 부족했을 때는 이 책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의 경험과 지식이 쌓이자 이 책은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고전은 책들과의 싸움에서 살아 남은 승리자들

 

서문에서 나오는 저자의 말처럼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 하는 자는 비난받는다'는 말이 마키아벨리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마키아벨리는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비록 군주론이 메디치가에 다시 중용되기 위해 쓰여지기는 했지만, 또 한 쪽에서는 군주의 악행을 민중에게 알리는 일을 해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됐건 그가 책에 담은 내용은 너무도 솔직해서 '불편한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버리지는 못하지만 안고 가지도 못한 채 여태껏 고전으로 간직하는 것이다.

 

고전의 가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읽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되지만, 그 기본 원리에는 인간이 생물이라는 평범한 이유가 숨겨 있다. 생물의 일차 목표는 ‘생존'이고, 2차 목표는 ‘번식'이다. 이를 사회구성체에 적용하면 번식 대신 ‘확장'이라는 개념이 치환될 뿐 큰 뿌리는 같다. 사마천의 ‘사기'가 2500년이 읽히는 이유도, ‘군주론'이 500년이 지나도 유효한 이유도, 이들이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설사 마음 속에 남을 향한 칼을 숨기고 있더라도 그 칼을 보여서는 안되며, 남들이 나를 공격했다 하더라도 짐짓 점잖을 빼며 포용력 있는 척 이해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이미 비난을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그 논란이 되는 문장들을 끄집어 내서 지금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 되는가 이야기 하고 있다. 책에 실린 유명한 일화나 사회 저명인사의 이야기는 군주론이 어떻게 현실에 적용되는 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또 맘에 드는 것은 동양의 마키아벨리라 불리는 ‘한비'의 이야기나 사기의 고사가 적절하게 배치돼 있다는 점이다.

 

'군주' 대신 '나'를 집어 넣고 읽어보자

 

저자는 크게 여섯 장으로 군주론을 분류하고 관련 문구를 인용했다. 1장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에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알려주며, 그를 위해서는 군주가 그만큼의 실력을 갖거나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신뢰만이 최고의 가치라는 기존의 생각의 헛점을 알려주고자 했던 마키아벨리의 생각에 부응하며 들려주는 록펠러나 노량의 이야기가 참 가슴에 와닿는다.

“군주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며 기만책을 쓰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칭찬받을 만한 일인가를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경험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군주는 자신의 약속을 별로 중시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혼동시키는 데에 능숙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의에만 입각한 군주들을 압도해왔다.”[군주론 18장]

 

2장 ‘리더를 리더답게 하는 것들’에서는 군주가 선만을 추구할 때 어떻게 파멸할 수 있는 지, 또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이야기 한다.

“완벽한 선을 추구하지 말고 악해지는 법도 배워야 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 속에서 파멸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키려는 군주는 악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군주론 15장]

 

3장 ‘사람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 법’에서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 두려움을 받는 것이 더 유효하다고 말하고 있다. 두려움과 인센티브가 사람을 움직이는 현실적인 동력이라는 사실은 냉정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군주는 잔인하다기보다는 인자하다는 평판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런 온정도 역시 서투르게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체사레 보르자는 잔인한 인간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잔인함은 로마냐의 질서를 회복하고 그 지방을 통일하여 평화와 충성을 지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군주론 17장]

 

4장 ‘위기를 사전에 차단하는 법’에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기만한 군주가 위험에 처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중간하게 승리하기 보단 확실하게 기선을 잡아야 하는 것은 어느 시기 어느 위치에서든 적용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장의 내용이 가장 잔인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돼있다고 생각된다.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안아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도 못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려면 복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예 크게 입혀야 한다.”[군주론 3장]

 

5장 ‘경쟁에서 이기는 법’은 이제 무엇이 현실인 줄 알았으니 그것을 상대에게 적용하면서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상대를 깔보고 짓밟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상대의 전력을 미리 알고 싸움에 대처해야만 한다. 자신의 능력을 뛰어 넘는 싸움은 이겨도 남는 것은 상처 뿐이다.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욕구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욕망이다. 따라서 능력 있는 자가 이를 수행할 때 그는 칭찬을 받으면 받았지 비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능력도 없는 자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그것을 손에 넣으려 한다면 이는 잘못된 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군주론 3장]

 

마지막 장은 변화를 주도하는 법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법을 말하고 있다. '창업이 수성난'이란 말도 있듯이 새로운 과업을 이루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켜 내는 것이다.

"현명한 군주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일만이 아니고 먼 장래에 있을 분쟁까지도 배려 해야 하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에 대처해야한다. 위험이란 미리 알면 쉽게 대책을 세울 수 있지만 코앞에 닥쳐올 때까지 그냥 보고만 있으면 그병은 악화되어 불치병이 된다."[군주론 3장]

 

‘군주론’에서 ‘군주’라는 말 대신 ‘나’를 집어 넣고 ‘백성, 신하’라는 부분에 ‘남’을 집어 넣고 읽어보면 왜 이 책이 이렇게 오랜 기간 많이 읽히는 지 이유를 알 수 있다. 세상은 분명히 더 잔인해졌고, 경쟁은 더 치열해졌으며, 약자에게 더 차가워졌다. 이 책은 군주론을 읽지 않았더라도 먼저 읽기에도 충분히 괜찮은 책이며, 군주론을 읽고 나서 읽는다면 응용 문제를 보여주는 참고서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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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20-06-21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마침 마키아벨리가 사망한지 493주년 되는 날이더군요.
저도 마침 오늘 우연찮게도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라는 유튜브 영상을 만들어 올렸습니다.
한가하실 때, 한 번 구경해 보세요~~
https://youtu.be/wQWzdMKLkwU
 


어떤 종의 개체군에는 두 종류의 싸움 전략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매파는 가급적 항상 맹렬히 싸우고 심하게 다쳤을 때가 아니면 굴복하지 않는다. 비둘기파는 그저 품위 있는 정통적 방법으로 위협을 줄 뿐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


매파와 비둘기파가 싸우면 비둘기파는 그냥 도망치므로 다치는 일이 없다. 매파끼리 싸우면 그들은 한편이 중상을 입거나 죽는다. 비둘기파끼리 싸우면 어느 편이든 다치는 경우가 없다.


점수 체계

승자 : 50점, 패자 : 0점, 중상자 : -100점, 장기전 시간 낭비 : -10점


만약 전원이 비둘기파인 개체군이 있다면 이들의 평균 점수는 15점이다
[승자 50점+시간낭비(-10), 패자(0)+시간낭비(-10)]


그런데 이 개체군에 돌연변이인 매파 개체군이 나타났다면 유일한 매파의 점수는 50점대를 기록한다. 이러한 막대한 이익은 결국 매파의 급속한 번식을 촉진시킬 것이며 결국 그 개체군 내의 싸움은 매파끼리 하게 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전체 개체군이 얻게 되는 이익이 전체가 비둘기파 일때보다 현저히 낮아진다. -25점이 된다. 그렇게 되면 소수 비둘기파는 싸움으로 마이너스가 되는 매파에 비해 0점으로 상대적으로 유리해지고 다시 비둘기파의 개체수는 증가한다.


결국 이 비율은 매파가 7/12, 비둘기파가 5/12일 때 가장 안정된 시기가 된다.

이때 매파와 비둘기파의 득점은 같아진다.


여기서,

가상의 개체군 전체가 비둘기파일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 경우 개체군의 이익은 최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개체군 내에서 단 하나의 매파도 나와서는 안 된다는 가정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하나라도 매파가 생긴다면 매파가 얻는 이익은 막대하므로 그 증가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7/12, 5/12는 그러한 내부 배신 행위에 대한 면을 갖춘 조직인 것이다.


인간 사회가 만약 100% 선인으로만 이뤄졌다면 그것은 매우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 중 하나라도 원칙을 깨뜨리는 악인이 있다면 그러한 행위로 얻는 이익이 월등하여 행위는 급속히 퍼질 것이다. 그러는 중 그러한 행위가 만연해 질 때 서로 피해를 보면서 그러한 범죄는 줄어들게 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악인과 선인의 비율은 매파와 비둘기파의 비율처럼 적정 수준을 찾아가고 있다. 일시적으로 그 비율이 무너지는 경우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적정 비율에 머물 수 밖에 없다.

 

결국 적정 수준에서 악인은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선인은 일정 부분 그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시스템이 형성될 수 밖에 없다. 악인이 한 명도 없는 사회는 면역력이 전혀 없는 생명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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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강의는 2011년도에 있었던 박경철의 릴레이 콘서트입니다]


 

강의의 큰 주제는 공감(empathy)이었습니다.

(본문은 원장님의 입장에서 서술하겠습니다)

 

- 첫째 토막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대구에서 제일 번화한 동네로 전학을 갑니다. 점심 도시락에서부터 자라온 시골과 너무 다른 모양새에 위축되어 자신이 없어진 저는 3주 간을 말도 없이 적응하지 못하고 지냅니다. 담임선생님은 제가 걱정이 되어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합니다. 담임선생님은 저의 자존감을 높여주려고 아버지에게 학교 육성회 이사를 맡아 달라고 합니다. 저는 너무 좋아서 집에 와서 우쭐해 하고 있는데 주인집 아주머니의 비아냥이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저의 유년기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수많은 도전 속에 실패하고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내밀어 주는 손" 때문입니다. 그 때 저를 생각해서 아버지를 불렀던 선생님의 '손'이 아니었다면 저는 거기서 심하게 좌절 했을 것입니다.

 

승화 [sublimation]

트라우마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잘해보겠다고 하며 딛고 일어서는 사회화의 과정

 

신창원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수업료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친구들 앞에서 뺨을 맞고 사회에 대한 증오를 키웠습니다. 이는 승화가 아니라 '좌절, 절망, 체념'이 되어 가슴 속에 얼음기둥을 세우게 했습니다.

 

가정이 아니라면 학교에서, 또 그것도 아니라면 사회에서라도 쓰러진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다면 10년 20년 후에 우리는 더 많은 건강한 사회 구성원을 가질 수 있고, 그 반대라면 증오로 가득한 그 누군가를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follow me 의 사회가 아니라 With Me 의 사회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 둘째 토막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이 이야기는 '지식'과 '지혜'의 이야기 입니다.

 

하드디스크(지식)만 대단하다고 해서 그 컴퓨터의 성능이 무조건 우수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 운영되는 운영체제나 소프트웨어(지혜)가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훌륭한 하드디스크는 쓸모가 없습니다. 결국, 하드디스크라는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지혜의 문제입니다. 지식은 얼마든지 외부에서 가르칠 수 있지만, 지혜는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가 없습니다. 똑같은 일만 반복하고 아무런 자극이 없는 삶은 아무런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A친구 - '눈빛만 봐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B친구 - '아무리 설명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친구'

 

A와 있을 때 마음은 편하지만 남는 것이 없지만, B와 있을 때는 그 친구를 이해시키고 이야기 하기 위해 끝없이 긴장하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지혜가 쌓이게 됩니다. 그말은 곧, 평범한 일상에서는 아무런 발전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좋은 방법은 바로 '독서' 입니다.

 

'지혜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선의이다' (니체)

 

내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접근을 할 때 지혜는 생기는 것입니다.

 

- 셋째 토막

 

대학원서를 쓰기 전에 아버지에게 내가 가고 싶은 과를 말씀 드렸더니 30분 동안 이야기를 들으시던 아버지가 '네 뜻이 그렇다면 가라'라고 말씀하시고 대신 내 얘기를 잠깐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일을 하다보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옳다는 기준이 세워진 것과는 다르다. 학생운동 하다 잡혀 온 애들 보면 그냥 훈계 하고 보내고 싶은 경우가 많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나는 그래서 개인적인 기준에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하급 공무원이라 더 그렇겠지만 위로 올라가도 비슷할거다."

 

결국 다음날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 하는 일을 스스로 결정해서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간섭을 많이 받지 않는 의대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너 의대나 가라라고 해서 제가 의대를 갔다면 저는 지금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인데 아버지 때문에 갔다고 푸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저에게 말로 훈육하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배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님의 마지막 떠나실 때의 이야기와, 혼자 애 둘을 키우다가 암으로 세상을 뜨게 된 요구르트 배달 아주머니의 두 자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남은 사람들의 슬픔은 크지만 세상을 떠나는 아버님의 시선으로, 엄마의 시선으로 '공감'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슬픔을 긍정적으로 '승화' 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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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진영에 비록 싸움을 잘하는 관우와 장비는 있었지만 지략가가 없어서 이렇다할 성과를 올리지 못할 때 큰 활약을 해서 조조를 괴롭힌 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서서()'라는 인물이다. 나는 특히 이 인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그의 삶이 너무나 드라마틱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데 그의 어머니 이야기가 그렇다. 

 

조조는 서서를 유비 진영에서 끌어내기 위해 모사 정욱의 계략을 이용하기로 한다. 처음에는 서서 어머니 위부인에게 아들이 조조의 진영으로 왔으면 한다고 서신을 보내게 하려 했다. 그러나 학식이 높은 위부인이 거부하자 정욱은 한 가지 계책을 낸다. 바로 위부인의 필체를 흉내내어 서서에게 편지를 써서 조조의 진영으로 오게 하는 것이다. 특히나, 효성이 깊었던 서서는 어머니의 편지 때문에 조조의 진영으로 가지만, 이는 조조의 계략이었음을 뒤늦게 알고 크게 후회한다. (서서는 조조의 진영에서는 단 한번의 계략도 내지 않았다)

 

이 일을 두고 서서의 어머니는 

 “여자가 글씨를 안다는 것부터가 걱정을 낳게 한 근본 원인이다().” 

하고 하며 크게 한탄하며 자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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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결국 그녀가 글을 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성이 글을 몰라야 하는 것은 아니고, 이는 어떤 이에게도 적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였다고 하더라도 자결하는 순간에는 차라리 내가 글을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며 후회를 했을 것이다. 


지식을 아는 것이 때로는 짐이 될 때가 있고,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지식들이 많다. 지식의 딜레마는 배운 후에는 배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지식은 우리 삶에 끼어들어 어떤 것에도 순순히 응하지 말고 비판적으로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을 강요한다. 심지어 과거에 편하게 받아 들였던 일상까지도 물음표를 들이대며 다시 반성하도록 우리를 압박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른는 삶으로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든 그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습득하는 지식과 정보는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 삶을 옥죄기 마련이지만, 우리 삶은 그러는 중에 더 바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만이 지식이 삶의 자양분으로 가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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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의 오랑캐 정벌에 나섰던 제갈량은 맹획이라는 오랑캐 장수와 대결하게 된다. 오랑캐는 그 지방의 토착 세력이라 설사 장수를 잡는다 하더라도 그 지역 사람들을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그들을 다스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던 제갈량은 맹획을 사로 잡고 놓아주는 배짱을 보여준다. 그때마다 사로잡힌 맹획은 자신이 단지 운이 없었다며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한다.


이에 제갈량은 맹획을 놓아주었고, 맹획은 10만 대군을 이끌고도 다시 공격하지만 매번 잡히고 만다. 이렇게 잡히고 놓아주기를 7번 했다해서 칠종칠금 [七縱七擒] 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마침내 7번째 잡혔을 때 맹획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제갈량의 밑으로 들어간다. 물론 처음 잡았을 때 그를 죽였다면 남만지방은 단숨에 정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와의 대립 구도로 정신없을 때 또 다시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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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첫 번째는 패배할 때마다 그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는 맹획의 태도이다. 이는 무능한 사람들의 전형이기도 한데 그 원인이 자기일 리는 없다는 식이다. 이들은 매번 외부로 이유를 돌리는데 심지어 위의 경우처럼 꼼짝없이 인정해야할 경우가 되어서 맹획처럼 인정하는 경우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압도하는 힘이 아닌 이상 아무도 굴복시킬 수 없는 강한(?) 존재들이다. 


두 번째 포인트는 힘으로 제압하는 것만을 추구하지 않고 상대를 마음으로 굴복시킨 제갈량이다. 특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매번 '그때 그것만 아니었다면..'이라며 핑계거리를 찾는다. 제갈량을 참을성 있게 이를 기다리면서 기회를 주었다. 이 이야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제갈량과 맹획의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어야 하고 그것을 맹획이 모를 때 가능하다. 사마중달을 그렇게 놓아 주었다간 결국 복수를 당했을테니 말이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실제 역사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우리가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왜 물리적인 힘보다 심리적인 포섭이 중요한 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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