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동서대전 - 이덕무에서 쇼펜하우어까지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전략과 글쓰기 인문학
한정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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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인 글을 쓴다는 것은 종종 '전통적인' 글과 반대 좌표에 자리한다. 물론 전통적이면서도 독창적인 글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전의 형식과 주제를 답습한 글의 영향력은 아무래도 잔파도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뒤샹의 변기가 현대 미술을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첫 장에 나오는 이유와 비슷하다. 기존의 예술 개념을 전복시키고 개념미술을 탄생시켰던 뒤샹의 '샘'은 그 작품의 뛰어남이 아닌, 무엇에 어떤 가치를 부여했느냐로 의미를 새로 한다. 명작은 그 작품에 담긴 철학이 그것을 오래 빛나게 했다는 말이다.   


이 책은 각 장마다 각각의 주제를 중심으로 비슷한 족적을 남긴 동서양의 문장가들의 글을 함께 정리한 책이다. 이 리뷰의 흐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과거의 전통을 훌륭히 계승한 사람들이 아니다. 저자는 이들의 글에 담겨 있는 정신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그것은 '개성', '자유' 그리고 '자연'이다. 이 책에 실린 저자들은 모두 '자기만의' 글을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써서 이름을 남긴 이들이다. 이 요건들의 공통점은 좋은 작품인가 아닌가는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한 현실의 재현이 예술의 목적이 아니듯이, 주제가 중요하지 않은 예술이라는 것이 도대체 존재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이 책에서는 각각의 장에서 특별한 주제를 중심으로 동서양 글쓰기의 비슷한 흐름을 캐치했다. '풍자의 글쓰기'는 조선의 박지원, 청나라의 오경재,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영국의 조너선 스위프트를 비교했고, 나는 누구인가를 다룬 '자의식의 글쓰기'에서는 심노숭, 곽말약, 후쿠자와 유키치,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비교하는 식이다.


이 책의 첫 장이면서 책의 전체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1장 '동심의 글쓰기'를 예로 들면, 1장에서 등장하는 이들은 인간의 본성을 '동심'에서 찾은 작가들이었다. 물론 이들이 시기적으로 아주 일치하는 것은 아닌데, 이덕무가 18세기이고, 이탁오는 16세기, 루소는 다시 18세기, 니체는 19세기였다. 이들이 시기를 달리하고 있지만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그 시기가 바로 전통적인 권위가 해체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체제와 규칙에 익숙하기 전의 모습이다. 이는 바로 이들이 하나같이 되돌아가고자 했던 주제가 '동심'인 이유였다. 저자는 네 명의 학자들이 남긴 어린아이들에 대한 주제를 다루면서 왜 그들이 그토록 '아이'의 상태로 되돌려야 했는지 들려주고 있다. 마크로스코는 '아이의 진솔함과 단순함이 없다면, 아무리 유명한 화가라도 예술가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는데, 결국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본성을 회복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이 주제는 이 책 전체의 주제와도 맥을 같이하고, 글쓰기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필수 요건이다. 


전에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유희열이 참가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가 대학에서 작곡 방법, 창법 등 다 배웠는데 교수님이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걸 다 배운 이유가 뭔지 아냐며, '니 음악 하라고. 이제 나가서 배운 거 하지 말고 다른 거 하라고 지금까지 가르친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이 책의 의미를 찾자면 그런 것이 아닐까. 이들이 영원히 역사에 남는 문장가들로 남은 것은 바로 자기만의 글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예술의 영역만큼 새로운 것을 가치 있게 인정해주는 곳도 없을 것이다. 계속 연습해오던 방식, 배웠던 형식이 아니라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의 것으로 써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분야. 이 책은 그런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간 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의미 있고 재미 있게 읽힌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글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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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거울, 영웅전 -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 로마 군주의 거울
김상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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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죽을 위기를 넘기고 '사기'를 써내려갈 때 걱정했던 것은 그의 기록이 황제의 분노를 사서 모두 폐기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호견법(互見法)'을 이용했다. 상호 비교해 가면서 본다는 의미의 이 방법은, 정작 비난하고자 하는 인물의 단점을 다른 인물의 서술에 슬쩍 넣어서 기술하는 식이다. 이 방법의 특징은 직접적인 비난을 피하면서도 인물을 비판하고, 한 인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군주의 거울'에서 왜 '사기' 이야기를 꺼내는가를 알려면 이 책의 바탕이된 '비교영웅전'의 저자부터 시작해야 한다.

 

'비교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대는 로마시대였다. 그것도 로마가 가장 강성했던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였으니, 그가 그리스인의 이야기를 그리스인의 입장에서 적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사마천이 호견법을 이용한 이유처럼 그리스 영웅과 로마 영웅을 비교하며 인물의 장단점을 묘하게 배치하고, 선후관계를 조절해가며 글을 완성시킨다. 그가 그렇게 하면서까지 작성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제국의 시대'에 재조명하는 '그리스적인 것의 가치'였다.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벌어지는 검투사의 이야기 속에서, 그리스의 비극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이 '군주의 거울'로 읽혔으리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비교영웅전'은 '영웅전'으로 번역되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책이 되었지만 저자는 '비교'라는 말이 빠진 것은 큰 실수라고 한다. '영웅전'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영웅들의 이야기를 적어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이 책의 구성은, 그리스와 로마의 인물 두 명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그리스를 건국한 '테세우스'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에서 시작해서,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와 로마의 입법자 '누마', 그리스를 배신한 '알키비아데스' 로마를 배신한 '코리올라누스', '페리클레스'와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렉산드로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비슷한 상황과 업적을 남긴 두 인물 50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역사속의 인물을 다루면서 작가가 원하는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아무리 기록에 충실한 작가라 할지라도 그 속에 자신의 생각을 담지 않는 작가는 없다. 플루타르코스가 50명의 영웅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단순히 그 속에서 영웅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들려주는 성공과 실패의 교훈을 타산지석 혹은 반면교사로 삼는 것이 전부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본성 자체는 잘 드러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지만 삶의 위기 상황 속에서 경험하는 충격을 통해 원래의 본성이 마침내 분출된다고. 선한 사람은 이성의 통제로 자신의 본성을 숨기고, 악한 사람은 주변의 경계심과 본인의 이익을 위한 자제력으로 자신의 본성을 숨길 뿐이다. (p.355)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이 페르시아의 군주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책의 마지막 장에,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아닌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실린 것은 매우 특이하다. 그는 왕이된 후 반란을 일으킨 동생 소 키루스를 상대로 내전을 벌여 이를 진압하고 결국 그를 죽인다. 그가 불행하게도 '반면교사'의 표본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왕이 된 후의 극악무도함과 폐륜적 행동 때문이었다. 그것은 얼핏 평화로운 환경과 통제되지 않는 권력이 만들어낸 괴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원래부터 그의 속에서 잠재하던 '악'의 씨앗이었다.  


수많은 역사속의 인물을 만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들의 '본성'은 결국에는 드러난다는 것이다. 링컨 대통령은 '많은 사람을 잠깐 속이거나 적은 사람을 오래 속일 순 있지만, 많은 사람을 오래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한 적 있다. 역사속 인물들이 자신의 본성을 감추고 훌륭한 군주 혹은 영웅으로 남고 싶어했던 욕망은 많았지만, 실제 그렇게 해서 훌륭한 기록으로 남은 영웅은 그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플루타르코스가 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남 위에서 군림하기 전에, 자신의 본성을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고삐가 풀렸을 때 얼마나 떳떳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 보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는 로마의 최전성기에 이 책을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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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히노 에이타로 지음, 이소담 옮김, 양경수 그림 / 오우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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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룹이 나오는 가요프로그램을 보다 생각한다. 뒤에서 춤추는 백댄서들은 저 일이 좋아서 하는 거겠지? 만약 그게 돈을 위해서라면? 갑자기 그 손동작, 스텝 하나 하나가 안쓰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 일에서 보람을 찾으려고 한 것은. 우리 중에 좀 뛰어난 인간이 갑자기 창피하게 느꼈을 것이다. 아니 내가 지금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야근 수당을 받기 위해서라는게 말이돼? 어제 밤새 준비한 프리젠테이션이 쥐꼬리 반만한 월급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 어쩌면 이것은 나의 원대한 야망 실현의 과정이거나, 일에서 보람을 느끼기 위한 순차적 과정이지 않겠어? 이걸 보고 있던 사장님은 매우 흐뭇해 하며 꿈을 이뤄가는 김대리의 어깨를 토닥이고, 급여따위는 생각하지 말라며... 자비따윈 없는 '열정페이'를 지급한다. 하지만 괜찮다. 보람이 있으니까. 


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 말도 안된다고 말하지 못하는 세상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저자는 이 책을 썼다. 제목이 참 맘에 든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회장님들이 좋아하는 책 중에 항상 최고로 꼽히는 책은 '논어'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워낙 유명한 책이니까. 하지만 논어는 잘 읽어보면 윗사람이 덕으로 대하면 아랫사람은 알아서 따라온다는 유교적 가치의 출발점이다. 아랫사람이 따르지 않는걸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냐만, 대부분의 회장님들은 본인은 덕으로 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랫것들은 그 맘을 몰라주고 저 모냥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다시 바꿔보면.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껴야지 너네는 돈밖에 모르니. 이 속물들아. 내 회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란 말야.' 

거기에 참 어울리는 말이 책 속에 있다. 


'경영자의 마인드로 열심히 일할테니 경영자의 월급을 주세요.'


이런 개념 없는 놈


군대에 처음 가면 각 부대마다 이상한 규칙이 있다. 내가 있던 곳은 이를테면 밥먹을 때 테이블에 팔을 올리지 말아야 한다거나, 밥을 먹은 후에 일병 이하는 뛰어서 내무반으로 가야 한다는 식이었다. 이것은 나름의 교육을 통해 알려지는데 미처 교육을 받지 못하는 신병이 팔을 올리고 밥을 먹는 모습이 보이면 부대는 발칵 뒤집힌다. 한 발만 떨어져서 봐도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때는 그랬다. '상식없는 회사원'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내부의 규칙에 둔감한 사원이다. 그렇지 않고 잘 적응된 사원에게는 '사회인'이라는 영광스런 호칭이 따라 붙는다. 그는 자신의 운명과 회사의 운명이 같으리라는 철썩같은 믿음으로 완전한 사축이 된다. 물론 그의 운명은 회사와 대체로 같지만 항상 먼저 차이는 것도, 뒤늦게 후회하는 것도 그쪽이다.   


저자는 사축을 이렇게 정의 한다. 

'회사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회사원' 


저자는 '보람'을 강조하게 된 상황을 회사 여건의 변화로 설명한다. 과거의 거품경제 때에는 회사의 상황이 그런대로 좋아서 종신고용이니, 연공임금 등을 약속했었다. 그때는 그런대로 '보람'을 느끼며 불합리를 감수할만 했다. 그러나 거품이 사라지고 이러한 고용 시스템이 불가능해져 버렸음에도, '보람' '헌신' 같은 가치는 좀비처럼 살아남았다. 회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사라졌는데 상대적으로 사원들이 해야할 의무는 더 강화된 셈이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초등학교 때 '꿈=미래의 직업'이라는 도식부터가 이상하다고 말하고, 어릴 때부터 강조되는 '보람'이 결국 사축을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나도 모르게 사축이 되지 않는 방법을 실었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보람'을 강조하는 태도는 경영자의 마인드에서 매우 바람직하므로 뭘 선택하느냐는 독자의 책임이다. 직장 내 인간관계는 안 풀리는 것이 당연하고, 회사는 그저 '거래처' 이상으로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마지막으로 싣고 싶은 말은.


'이제 힘들기도 힘들어, 지치는 것도 지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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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에서 우주까지 - 이외수의 깨어있는 삶에 관한 이야기
이외수.하창수 지음 / 김영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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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선승 조주선사는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을 받자 '뜰 앞의 잣나무'라고 답한다. 잣나무는 물론 이 물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이야기의 '화두'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정신, 심지어 답을 구하는 상대의 물음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다. 후에 누군가가 이 물음에 대해 다시 한번 '뜰 앞의 잣나무'라고 답했다면, 그 사람은 내치리는 죽비를 피할 수 없다. 그는 이미 정해진 답에 얽매인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외수는 말한다. '달마에겐 동서남북이 없습니다. 그가 우주의 중심이니까요.' 이 책은 우주의 중심인 달마, 혹은 이외수,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대담집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힘은 4가지로,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 있다. 일부 과학자 중에는 이 중에서 '중력'을 근거로 새로운 차원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다른 세 힘에 비해 중력은 그 힘이 유난히 약하다. 그 힘이 유난히 약한 것은 그 이유가 바로 다른 차원까지 힘이 고르게 분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차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없어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것이 왜 어려운지 이외수 선생님이 주로 이야기하는 누에의 상태를 예를 들어보자. 알일 때는 단순 점이고 1차원이다. 알이 깨어 누에가 되면 일직선상을 오갈 수 있는 2차원이 될 것이고, 나비가 된 후에는 앞뒤 뿐 아니라 위까지 갈 수 있는 3차원 공간에 있게 된다. 이 때 1차원의 알에게 2차원의 애벌레의 궤적은 알 수 없는 세상이고, 애벌레에게 3차원의 높이라는 개념은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이다. 다만 나비가 눈앞에 있을 때 보였다가 날아가면 보이지 않고 다시 내려앉으면 보일 뿐이다. 애벌레에게 나비는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지만 나비는 그냥 한차원 더 높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차원의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하는 것은, 이 책이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고차원의 세계를 상상해야만 가능한 세계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외수의 책에는 자주 '선계'가 등장한다. '벽오금학도'에도 보면 어린 소년이 우연히 신계를 접한 후에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장수하늘소'에서도 유난히 햇볕을 좋아했던 주인공의 동생이 후에 신선이 되어 다른 세계로 떠났다는 줄거리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그 소설을 읽을 때는 다소 터무니없는 결말에 조금 허탈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작가 자신이 정말로 그러한 세계의 존재를 강하게 믿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책 '먼지에서 우주까지'는 그런 생각을 가졌던 독자라면 작가가 '선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가 했던 이야기가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의 이야기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위의 차원이야기에서 보자면 우리는 나비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만 볼 수 있는 애벌레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것과 그 말을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말이다. 여전히 '임사체험'이나 '유체이탈' 같은 현상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환각처럼 느껴지고, 다른 차원, UFO는 있으면 재미있겠지만 현실과는 무관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동안 얻는 것이 있다면,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먼지'의 세계가 뭉치고 뭉쳐 물질을 구성하고 태산을 이루고 우주를 만들어 내는 것을 생각하고, 그 반대로 거시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 세계로까지 환원되는 동안의 과정이 나에게 생각거리를 준다는 점이다. 그 과정 속에는 그 모든 것이 단지 '형상'에 불과 하다는 것과, 보다 근원적인 '본성'은 어떠한 형태로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숨어들어 있다. 우리가 우주의 법칙을 알았으니 그것을 숭배하고 칭송하는 것이 아닌, 내가 곧 우주이고 나 자신이 중심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것에조차 얽매이지 않는 것이 깨달음의 근원이라는 메시지가 미세한 파동을 만든다.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본성을 터득한다는 겁니다. 현상에 머문 상태에서의 능력은 그 현상 하나만을 여는 열쇠를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성을 깨치는 것은 모든 현상을 여는 하나의 열쇠를 발견하는 일이죠. 이 열쇠를 갖게 되면 더 이상 현상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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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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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진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에 다다른 개체라 할지라도 그 중 17% 가량은 변이의 성향을 가진다고 한다. 이는 유전자가 특정한 환경에 맞춰 진화하다가 급작스레 환경이 변했을 때 생존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하고 자신의 목표와 쾌락만을 중시하는 2~3%의 인간은 어떨까. 이들 또한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사회악적인 존재이지만 환경이 변해서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온다면 급격히 개체수가 증가할 것이다. 제목이 '종의 기원'이기 때문에 이러한 진화의 입장으로 시작해 보는 것은, 작가가 데이비드 버스의 책 '이웃집 살인마'를 작가가 언급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인류의 잔인함과 폭력, 살인의 근본에는 바로 생존, 번식이라는 유전자의 지상최대 과제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은 타인도, 생면부지의 행인도 아닌 바로 이웃집에서 웃음을 주고 받던 평범한 인물이다. 


평범한 인물이자, 지독한 살인마임을 암시하는 '유진'이라는 인물은 이 사건의 화자이다. 살인마를 화자로 등장시킨 점은 이전의 작품에서 작가가 '악인'을 제3자의 입장으로만 다뤘던 것에서 진일보해 그 내면으로 파고 들기 위함이었다. 유진은 피비린내를 맡으며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간질발작을 예감하며 눈을 뜬다. 지나치게 조용한 집안 분위기에 불안감을 느끼며 내려간 계단에는 어머니가 예리한 도구로 숨져있고, 사방에는 핏자국이 낭자하다. 자신의 기억속에서 사라진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어 가지만 쉽게 기억은 떠오르지 않고 오직 간간히 떠오르는 몇 장면만 또렷하다.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할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지만, 살인자가 오직 유진, 그 자신일 때에만 모든 아귀가 들어 맞음을 직감한다. 어머니의 방으로 가서 일기장을 읽으며 지난 자기 인생의 빈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간다. 


비로소 나는 해독의 실마리를 찾았다. 더하여 내가 무엇에 끌리는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겁먹은 것에 끌렸다. (p.188)

같이 살고 있는 친구 해진이 좋아했던 선배와 자고 온 날, 유진은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묻는다. 유진이 알게된 사실은 분명히 자신은 여자와 잤다고 해서 자신에게 그런 기쁨이 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랬던 그가 분노에 가득차서 모르는 여자를 쫓아가고 있을 때, 그리고 그 여자가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면서 전에 없던 쾌감을 느낀것이다. 상대의 감정을 전혀 읽지 못하는 유진이 자신의 쾌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스스로 발견하는 것은 놀라우면서 위험한 발견이었다. 그는 자연스레 그것이 사회가 정한 법칙과 기준, 즉 도덕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이란, 말이 되는 그림을 그려보이는 것이다. (p.144)

그가 수영을 그만두게 되고 로스쿨에 끌렸던 것은 우연히 읽은 책 때문이었다. 그 책은 우연찮게도 얼마전에 나도 본 책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였다. 그 책의 서문에는 재판의 두 가지 차원을 적어 놓았는데, 첫 번째는 유죄여부의 판단이고, 두번째는 형량을 결정하는 도덕적 차원이다. 도덕적 단계는 그 사람의 인생의 행로와 경험, 문제 등이 참작된다. 유진은 어쩌면 그 쓸쓸함이 맘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간 인생, 자신의 선택권 없이 주어진 성향과 결과물들. 그는 전국민의 공분을 산 사건들에서 변호인의 역할을 가상하며 그들의 입장을 변호했다. 이런 몇가지 점들이 이 소설의 성격과 유진의 입장을 말해준다. 


유진의 입장에서 변호해보자면 그가 간질발작을 일으키는 것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특별히 공감을 못한 사이코패스, 그 중에서도 악랄한 프레데터인 것 또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더구나 어머니와 이모의 숨막히는 감시과 억압 속에서 유일한 낙이었던 수영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유일한 탈출구였던 밤늦은 외출이 오직 살 길이었다. 하지만, 이런 점을 참작하더라도 자신의 혈육을 살해한 점, 죄없는 여성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점, 친한 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그저 햇살이 너무 좋아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 두려웠던 것은, 그가 우리가 기껏 만들어 놓은 원칙과 암묵적인 약속을 깨고 '공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혔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1차적인 단계에서도 의심없이 유죄이고, 2차적인 도덕적인 단계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참작의 여지가 없을 수밖에 없다. 그가 꿈꾸었던 '살인자를 변호'하는 일은, 로스쿨 합격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영원히 허락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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