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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오직 진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에 다다른 개체라 할지라도 그 중 17% 가량은 변이의 성향을 가진다고 한다. 이는 유전자가 특정한 환경에 맞춰 진화하다가 급작스레 환경이 변했을 때 생존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하고 자신의 목표와 쾌락만을 중시하는 2~3%의 인간은 어떨까. 이들 또한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사회악적인 존재이지만 환경이 변해서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온다면 급격히 개체수가 증가할 것이다. 제목이 '종의 기원'이기 때문에 이러한 진화의 입장으로 시작해 보는 것은, 작가가 데이비드 버스의 책 '이웃집 살인마'를 작가가 언급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인류의 잔인함과 폭력, 살인의 근본에는 바로 생존, 번식이라는 유전자의 지상최대 과제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은 타인도, 생면부지의 행인도 아닌 바로 이웃집에서 웃음을 주고 받던 평범한 인물이다.
평범한 인물이자, 지독한 살인마임을 암시하는 '유진'이라는 인물은 이 사건의 화자이다. 살인마를 화자로 등장시킨 점은 이전의 작품에서 작가가 '악인'을 제3자의 입장으로만 다뤘던 것에서 진일보해 그 내면으로 파고 들기 위함이었다. 유진은 피비린내를 맡으며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간질발작을 예감하며 눈을 뜬다. 지나치게 조용한 집안 분위기에 불안감을 느끼며 내려간 계단에는 어머니가 예리한 도구로 숨져있고, 사방에는 핏자국이 낭자하다. 자신의 기억속에서 사라진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어 가지만 쉽게 기억은 떠오르지 않고 오직 간간히 떠오르는 몇 장면만 또렷하다.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할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지만, 살인자가 오직 유진, 그 자신일 때에만 모든 아귀가 들어 맞음을 직감한다. 어머니의 방으로 가서 일기장을 읽으며 지난 자기 인생의 빈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간다.
비로소 나는 해독의 실마리를 찾았다. 더하여 내가 무엇에 끌리는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겁먹은 것에 끌렸다. (p.188)
같이 살고 있는 친구 해진이 좋아했던 선배와 자고 온 날, 유진은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묻는다. 유진이 알게된 사실은 분명히 자신은 여자와 잤다고 해서 자신에게 그런 기쁨이 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랬던 그가 분노에 가득차서 모르는 여자를 쫓아가고 있을 때, 그리고 그 여자가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면서 전에 없던 쾌감을 느낀것이다. 상대의 감정을 전혀 읽지 못하는 유진이 자신의 쾌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스스로 발견하는 것은 놀라우면서 위험한 발견이었다. 그는 자연스레 그것이 사회가 정한 법칙과 기준, 즉 도덕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이란, 말이 되는 그림을 그려보이는 것이다. (p.144)
그가 수영을 그만두게 되고 로스쿨에 끌렸던 것은 우연히 읽은 책 때문이었다. 그 책은 우연찮게도 얼마전에 나도 본 책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였다. 그 책의 서문에는 재판의 두 가지 차원을 적어 놓았는데, 첫 번째는 유죄여부의 판단이고, 두번째는 형량을 결정하는 도덕적 차원이다. 도덕적 단계는 그 사람의 인생의 행로와 경험, 문제 등이 참작된다. 유진은 어쩌면 그 쓸쓸함이 맘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간 인생, 자신의 선택권 없이 주어진 성향과 결과물들. 그는 전국민의 공분을 산 사건들에서 변호인의 역할을 가상하며 그들의 입장을 변호했다. 이런 몇가지 점들이 이 소설의 성격과 유진의 입장을 말해준다.
유진의 입장에서 변호해보자면 그가 간질발작을 일으키는 것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특별히 공감을 못한 사이코패스, 그 중에서도 악랄한 프레데터인 것 또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더구나 어머니와 이모의 숨막히는 감시과 억압 속에서 유일한 낙이었던 수영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유일한 탈출구였던 밤늦은 외출이 오직 살 길이었다. 하지만, 이런 점을 참작하더라도 자신의 혈육을 살해한 점, 죄없는 여성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점, 친한 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그저 햇살이 너무 좋아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 두려웠던 것은, 그가 우리가 기껏 만들어 놓은 원칙과 암묵적인 약속을 깨고 '공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혔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1차적인 단계에서도 의심없이 유죄이고, 2차적인 도덕적인 단계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참작의 여지가 없을 수밖에 없다. 그가 꿈꾸었던 '살인자를 변호'하는 일은, 로스쿨 합격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영원히 허락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