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 - 종교의 광기에 맞서 싸운 인문주의자, 아롬옛글밭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 / 아롬미디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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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대할 때, 어렵게만 생각하던 인물, 그 인물에 대한 평전에 대한 두려움보다 알고 싶다는 지식에 대한 욕망이 컸다. 재미없어서 못 읽어낼까 걱정도 했지만, 처음 츠바이크의 문체를 대하자마자 그 두려움과 걱정은 어느 틈에 사라지고 마치 한편의 아름다운 작품을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설, 시 아니 에세이까지 어우르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즐거움과 끊임없이 두뇌를 자극하는 지식의 폭넓음이 평이하고 아름다운 문체 속에서 생기 있게 되살아났다. 


에라스무스를 일컫는 말들은 많다. 고대 언어학자, 문법학자, 종교사상가, 성서 번역가 그리고 작가가 그 정의들이다. 국가와 제후들 사이에, 왕과 교황 사이에, 다민족들 간에 전쟁이 끊이질 않고 유럽의 종교가 자리를 너무 잘 잡다 앉은 자리가 썩고 짓무르던 16세기를 자그마한 체구와 약한 신체조건을 갖고 살아낸 인문주의자였다. 여기서 인문주의자를 뜻하는 단어가 humaniste, 인문주의는 humanism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면 에라스무스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되겠다. (적어도 불어판에는 그렇게 표기되어있다. 참조: <Erasme, grandeur et decadence d'une idee>, Stephan Zweig, Grasset)


"에라스무스는 서양의 모든 저술가와 창조자 중에서 최초로 의식 있는 유럽인이었으며 최초의 투철한 평화애호가였고 인문주의의 이상과 세계 우호 및 우호정신이라는 이상을 위한 달변의 변호사였다. 그리고 이를 넘어 우리의 정신세계를 더욱 정의롭고 더욱 화합된 모습으로 만들려던 싸움에서 패배자로 남은 그의 비극적 운명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더욱 친근하게 느끼게 한다"는 것이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를 간단히 요약한 말이다. 그렇다. 에라스무스는 인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면서도 광기와 광신만은 증오했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그는 어떤 논쟁이나 싸움에서도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의 판단만을 믿었다. 모든 종교적인 갈등을 풀려고 교황 쪽에 루터를 두둔하고 루터에게는 교황 쪽의 변화를 기다리라고 하다가 결국 양쪽 모두에게 배척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로부터 그의 철학의 비극이 삶속에서 싹튼 것이다. 누구에게나 만족스런 철학이나 사상은 이상일 뿐이다.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그렇게 혼란스런 사회에서는 외면만 당한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모든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누구의 하인도 되지 않고 부자가 되기도 원하지 않는다. 원래 가진 것 없던 그였던지라, 순수한 예술가로, 지식인으로 살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아첨하는 편지, 상류사회에서 인정받는 웅변술로도 산다.


하지만 진정한 그의 모습은 책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책과 말, 정신과 교육이 그의 고향이었다. 그는 평생 책을 “본능적으로” 사랑했으며 격정의 논쟁의 장에서도 그는 연설대에 나서는 대신 펜을 들었다. “그의 귀는 실제로 라틴어에만 열려 있다. 단지 활자를 통해서만 세상사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섬세한 문필가의 전형인 그에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만이 그가 진실로 친교를 맺었던 유일한 뮤즈였다. 그는 책이라는 매체를 통하지 않고는 현실과 관련을 맺을 수 없었다.” 그런 책읽기와 글쓰기는 그가 유명해지고 청탁을 받아 글을 써서 성공하기도 하지만, 결국 후에 루터와의 투쟁에서 지는 것도 직접 나서지 않고 글이라는 대화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쉽게 쓰면서 라틴어의 인용문을 정리하면 “격언집”이 되었고 무수한 “대화집”이나 “바보예찬” 같은 글이 나오게 된다. 이 또한 후에 민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대중을 선동한 루터에 비해 “위에” 군림하려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에라스무스가 내게 정말 흥미로웠던 것은 성경의 해석과 그 응용방법에서였다. 성경이나 기독교를 종교나 영감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서양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문화로서 받아들이는 내게 성경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종교 논의가 르네상스처럼 꽃피었던 그 시대의 한 위대한 학자의 분석과 관점이 궁금했었다. 엄하고 벌주는 신으로서의 구교에 비해 용서하고 사랑하는 신교의 신에 대한 태도는 비판은 하면서도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던 에라스무스와 독선적이고 광기어린 태도로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루터의 차이점을 통해 신기할 정도로 아이러니컬하고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세계화합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을 한번 들어보자. “교육과 문화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문주의자가 될 수 있다. 모든 직위의 사람들, 남자든 여자든, 기사든 신부든, 왕이든 상인이든, 세속인이든 수도사든 누구나 이 자유로운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인종인지, 어떤 계급인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국적이 어딘지 묻지 않는다. 이로써 유럽의 사상에 새로운 개념, 즉 초국가적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누구에게나 정당하고 보편적이고 공평한 진리를 베푸는 에라스무스의 이 초국가적인 사상은 가진 것 많은 자, 권력 있는 자, 잘난 자,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자, 성공한자 등등에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자, 자신이 더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과연 이 초국가의 개념을 받아들일 자, 얼마나 될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 하더라도 나를 특권 대우해주지 않으면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게 인지상정이고 나보다 못한 자를 끼워주면 내 위신이 깎인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까.


이렇듯 평화와 협상을 주장하며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한 가지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대신 폭으로 대답했던 에라스무스는 원래 태어나기도 투쟁가로 태어나 폭력과 광신으로 무장한 루터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보헤미안처럼 처먹고, 독일인처럼 퍼마신다”는 루터의 천재성은 불을 토해내며 대중 편에 서서 격정의 힘으로 대중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 있다. 츠바이크는 루터를 “일생 동안 투쟁가의 천성을 그대로 지녔고 신과 인간 그리고 악마와도 붙는 타고난 깡패였다”고 유머스럽게 표현하지만 그 결과를 보면 더 이상 웃음이 나지 않는다. 에라스무스도 루터도 면죄부 강매 같은 문제를 똑같이 비난했다. 하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종교전쟁 속에서 과연 중립이 가능한가. 일생을 평온을 원하고 어느 편에도 서지 않던 에라스무스는 그 격전지를 피하고 글을 쓰는 자기만의 공간으로 파고든다. 신앙고백을 강요당하자 결국 자신의 의견을 조목조목 적어 보내고, 루터와의 논쟁은 끊이질 않지만, “신의 이름”으로 에라스무스를 처단하는 루터의 칼 앞에서 에라스무스의 펜은 부러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두 사람 사이의 문제나 불화는 개인적인 문제로 돌리는 명철함을 일깨우며 “일반화된 난국과 불치의 혼란”의 장이 된 세상을 걱정한다.


에라스무스는 패하고 종교전쟁은 피할 수 없고, 칼과 피가 범벅이 된 역사가 뒤를 잇는다. 이에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의 유산에 대해 말한다. “에라스무스, 실망한 이 늙은 남자, 그렇다고 우리가 실망해서는 안 될 이 늙은 남자가 전쟁과 유럽의 분열이라는 혼란 한 가운데서 유산으로 남겨놓은 것은 다름 아닌 앞으로 도래할, 그리고 결코 막을 수 없는 인류의 인간화에 대해 모든 종교와 신화가 갖고 있는 희망의 원초적 꿈이었으며, 이기적이고 일시적인 격정에 분명하고 공정한 이성이 승리하리라 희망하는 꿈이었다.” 후대에 많은 학자, 작가들에게 에라스무스가 남긴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 이성, 정신, 통찰과 관용, 평화, 타협 그리고 양보할 수 없는 도덕적 권리 등등이 몽테뉴, 스피노자, 볼테르, 칸트, 톨스토이나 간디, 로맹 롤랑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요점은 스테판 츠바이크의 평전이 무엇보다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냥 한 인물의 인생과 업적을 따라가는데 멈추지 않는다. 에라스무스를 향한 애정과 열정이 츠바이크의 펜 아래에서는 그의 감성과 함께 시적으로 되살아난다. 물론 명석하고 냉철하게 에라스무스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에라스무스 평전은 사실이나 철학만 나열한 전기가 아니고 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 문학작품이 된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도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이 츠바이크의 감성과 문학성으로 소설처럼, 시처럼 되살아났지 않은가. 역사적 에세이지만 전혀 어렵거나 까다롭지 않아 재밌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의 글이다. 두뇌와 감성을 한꺼번에 자극하는 글을 만나는 기쁨이 크다.


“에라스무스에게는 신학의 영역에도, 철학의 영역에도 절대적 진리나 유일하게 유효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진리는 언제나 다양한 의미와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권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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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30 1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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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 여자아이 -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까지
레너드 삭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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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레너드 삭스는 가정의학과 전문의이자 임상심리학자로 교육방법에 대한 이론뿐 아니라 실제 아이들을 만나고 치료하는 사례를 바탕으로 이론과 경험을 두루 갖춘 아동 심리학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에서 벌어지는 실례와 사례라서 우리와는 조금 동떨어진 시각도 있지만 그 근간은 21세기 어느 나라와도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예전에 잠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고, 더 나중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나름대로 아이들을 대했고, 또 가까이에서는 조카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사이의 다름과 그 차이에서 놀라운 일을 수없이 겪고도 아직 이해 못하는 것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사실을 새로 이해하고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교육자나 부모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일 것이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도 남자와 여자를 근본부터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라 하겠다. 과학적인 근거뿐만 아니라 생리적인 몸 구조, 그에 따른 심리 변화나 세상을 보는 시각, 사회를 마주 대하는 태도도 다름을 많은 실례와 분석을 통해 다뤘기 때문에 읽기에도 무리가 없고 쉽게,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레너드 삭스의 교육방침과 교육철학은 시작부터 생리적, 물리적, 유전적, 심리적으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교육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뇌 구조부터 다르며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기 때문에 무작정 남자아이는 언어기능이 떨어지고 여자아이는 수학을 못한다고 단정 지으면 안 된다고 한다. 즉 성별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른 교육 방법을 제시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총 10장으로 이루어져있다. 각 장을 간단히 살펴보자. 물론 책에는 이해하기 쉬운 실례와 이론 그리고 대안까지 다뤄져있다.


- 1장에서 신생아 때부터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청력이 떨어진다는 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러한 성차를 무시한 교육이 어떤 문제점을 제기하는지 보여준다.

- 2장에서는 표현을 할  때, 여자아이는 사물을 그리고, 남자아이는 동작을 그린다는 등의 예를 들어 성별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놀이습성도 다른데,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유치원교사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한 아이를 칭찬하고 다른 아이에게 주의를 주거나 따라하라는 식의 교육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감정이건 부정적인 감정이건 모든 감정은 소년과 소녀의 뇌에서 다른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사실부터 인지하고 아이들을 대해야할 것이다.

- 3장에서는 소년소녀가 모험을 대하는 태도가 판이하게 다른데 그 이유를 보면, 소년은 보통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소녀는 자신을 과소평가한다는 데서 온다고 한다. 그런 차이를 이해함은 소년소녀에게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서부터 교육이 시작되고 위험에도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 4장에서는 공격성에 대해 다루는데, 고통을 느끼는 강도가 다르고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남자아이들이 그에 맞서는 한편 여자아이들은 피하려고 하는 모습을 통해 극복하는 방법이 달라야 하는 것이다.

- 5장에서는 학교생활에 대해 설명하는데, 남학생들이 교사와의 친밀감을 형성하면 친구들한테 놀림을 당하거나 약자로 분류되는 반면, 여학생들은 그 친밀감이 잘못 형성되면 교육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심리를 보여준다. 우정을 맺는 방식도 남학생과 여학생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문제나 해결방식이 달라야 하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피보나치  수열에 대한 예도 무척 흥미롭다. 남학생들은 길을 찾을 때도 나침반을 사용하는 것이 쉽고 여학생들은 표지물 중심으로 찾는 게 쉬운 것을 보는데, 그것은 사용하는 뇌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실생활과 연결해 여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치면 남학생들만큼 수학을 잘 할 수 있고, 읽기에 있어서도 남학생이 다소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이유는 문학적 소설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데, 모험소설이나 논픽션을 사용하면 효과가 있다는 예를 제시한다. 관심대상이 다르고 뇌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 6장의 성문제에서는 여자는 주로 정신적 유대감을 원하고 남자는 신체적 접촉을 원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현재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많은 문제점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 현실과는 많은 부분 다르기 때문에 미래를 대비한다는 점에서 훑어본다면 유익할 것 같다.

- 7장의 중독에서는 가족사이나 학교에서 벌어질 수 있는 많은 아이들의 중독의 원인과 결과도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한테서 그 발병이 다른 원인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미국에서의 심각한 병 유발이나 약 처방을 볼 수 있다. 조금씩 심각해지는 우리 현실을 볼 때, 미리 훑어보면 도움이 되겠다.

- 8장에서는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하는 주제로 가족관계 정립에 대한 충고를 담고 있다. 21세기의 핵가족이 만들어낸 비만과 늘어난 성활동 그리고 높아진 범죄율에 어떻게 우리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고 부모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그리고 잘못을 했을 때나 조언을 할 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어떻게 다르게 대해야 하는지 또 나이를 고려해서 해결하라는 점을 강조한다. 때로는 부모가 권위를 세워야 하고 습관과 훈련을 들일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 9장에서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를 다루는데, 미국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성 풍토에 대한 이해와 혹시나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경우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10장에서는 분홍과 파랑의 이분법 극복하기란 주제로 애매모호해진 성, 같은 교과과정으로 가르치는 모순 등을 예로 들며 그런 천편일률적인 틀보다는 교과과정이 같더라도 다른 방식을 통해서 접근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을 따로 구분해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성별은 인간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정체성의 문제”이며 소년소녀 모두를 위해 여러 세대가 함께하는 남자들 또는 여자들만의 활동에 참여하라고 제안한다.  


사회성을 길러주고 평등한 교육을 실시한다는 핑계 하에 이제는 모범형식이 되어버린 남녀공학 학교 방식, 즉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함께 같은 교실에서 같은 교육방식을 이용해 가르치는 전형적인 교육방식에 대한 반박이 이 책의 중요한 요점이다. 또한 그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실례를 통해 대안을 제시하는 면에서 훌륭한 교육지침서가 된다. 마약이나 성문제 등은 우리의 현실을 다소 앞서가는 면이 없지 않으나 금지의 당위성이나 권위를 상실한 부모가 무조건 ‘친구’처럼 아이들을 키우다가 닥치게 될 많은 문제점과 위험성의 잠재요인을 미리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나올 아이가 요즘 어디 한, 둘 뿐이겠는가. 어느 누구도 완벽한 어른이 아니고 완벽한 부모나 선생도 될 수 없다. 문제가 있으면 일단 인정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때, 이 책은 또한 실제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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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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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환상의 책> 한 권으로 나를 사로잡은 작가다.
그의 이야기는 따라가다 보면 꽉 짜인 구성에 딱딱 맞게 들어앉은 퍼즐 같다.
문체는 화려하고 내용도 기가 막히다. 정신 없이 재밌다.
두껍고 분량의 복잡한 이야기도 술술 따라가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빵굽는 타자기>를 첫 작품으로 골랐다면 아마 다른 생각이 들었으리라.
폴 오스터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이 글을 추천하고 싶지 않다.
누가 붙였는지, 정말 기가 막힌 한글 제목을 붙였다.
글을 쓰는 타자기에서 막 구운 빵 냄새가 고소하니 풍겨나오는 것 같았다.
<Hand to mouth>,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산다는 뜻이고, 부제로 붙어있는 것이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이다.
하나는 프리랜서의 삶이고 또 하나는 작가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었으니까.
작가의 젊은 시절에 대한 경험담이다.

어릴 적 돈에 관한 생각을 정리한 작가는 돈에 무관심하게 살기로 한다.
환경상 돈을 버는 삶보다는 시간을 잘 사용하는 삶이 더 나아보인 것이다.
젊은 시절에 그가 시간을 남겨서 한 일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인생의 갖가지 경험을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돈을 벌면 일을 쉬고, 여행을 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돈이 떨어지면 갖가지 육체노동을 한다. 그걸 그가 좋아하기도 하지만,
젊을 때 돈을 벌고자 할 때, 할 줄 아는 것이 노가다 빼놓고 뭐가 그리 많겠는가.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면서는 이제 글을 기고하고,번역을 하고, 글을 써서 돈을 번다.
하지만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는 사람보다,
그에게 그 일이 가져다 주는 수입이란 보잘 것 없다. 일이 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젠 돈을 벌기 위해서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돈을 주면서 출판해 준다는 곳이 있어야지...
궁지에 몰린 작가는 야구를 소재로 한 게임을 발명한다.
그것도 시대에 뒤떨어진 게임이라고 거절만 당한다.
후원자가 생겨 희곡을 무대에 올려보지만, 운이 따르질 않는다.
결국 그가 이런저런 경험을 겪고 팔리는 글을 쓴다.
첫 작품을 팔고 나니 900달러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그는 씁쓸하게 한 마디를 남긴다. 물론 유명작가가 되기 전이니까.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내겐 정신적으로, 실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프리랜서도 했었고, 글에도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나도 별로 알려지고, 적극적인 프리랜서가 아니었기에,
수입도 별로 없이 고생 많이 했다. 일 자체는 수입이 꽤 되지만, 늘 단발이니까.
오늘 하루 배불리 먹었다고 해서 내일 안 먹어도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프리랜서면 일을 하고 싶을 때, 하고 놀고 싶을 때 놀고, 여행가고 싶을 때 가니,
얼마나 좋으냐고 모르는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프리랜서, 더구나 초기에는, 몸이 아파도, 무슨 일이 떨어져도,
한번 거절하지 못하고, (한번 거절하면 그 다음엔 일이 안 들어오니까)
촉박한 시간 안에 끝내야 할 일이 많으니, 어떤 일은 매일 밤을 새야 하는 경우도 있다.
병아리 프리랜서는 그래서 늘 허기가 졌었다. 몸도 많이 나빠졌다.
규칙적인 직장 생활을 하고 월급을 꼬박꼬박 받는 게 얼마나 좋은지,
그냥 직장만 다니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하긴 프리랜서의 장점은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돈도 없이 시간만 많으면 뭐 하나...
사람들 별로 없을 때 돌아다니고, 쿠폰이나 챙기는 매일매일...
돈과 시간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지.
물론 유명인이 되고, 단가가 비싼 사람이 되면 가능하지만,
그런 사람보다는 병아리 프리랜서가 더 많기 마련이다.

난 나중에 <밥 짓는 컴퓨터>란 제목으로 나의 젊은 시절 얘기를 쓸 수 있을까...
<밥 짓는 연필>이 더 좋아 보인다. 연필심 냄새가 좋으니까... ^^
뭐, 꿈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꿈을 꾸는 동안 행복하니,
어쩌면 그것만으로 좋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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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보다 따스했던 가을...

이제 겨울에 자리를 내주고 가려나 보다...

짜~아식... 예쁜 단풍을 주고선.

늦가을 비로 인사를 하네.  안녕,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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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6-11-12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년 단풍은 별로 라고 하던데 그곳 단풍은 예쁘기만 하군요.

진달래 2006-11-13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근처 공원이 한적하고 아름답네요... *^^*
 

지난 번에 친구랑 던킨에 가서 커피를 마셨는데,

아, 글쎄 모르고 급하게 나오느라 컵을 그냥 두고 나왔네.

긁었어야 하는 건데...

노트북을 받을지 누가 아냐고...

행사 끝나기 전에 다시 가야지. 카페인도 충전하고, 이벤트 참여도 하고~!

던킨은 빵먹는 맛도 있지만, 커피 값이 싸서 좋다~! (2500원 정도 ^^)

말야, 말야, 요즘은 커피값이 너무 비싸단 말야... 왜 그렇게 비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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