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하생활자의 수기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2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동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아주 어릴 적에 <죄와 벌>을 읽었고 좀 커서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었다. 두 작품 모두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쯤이면 다시 한 번씩 읽곤 해서 몇 번은 읽었던 것 같다. 그만큼 그의 작품이 좋았다. 비 오는 여름 밤, 번개도 치고 천둥도 치는데 <죄와 벌>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느꼈던 소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 탓에 이번 작품도 편한 마음으로 잡았다. 하지만 그 얼마나 큰 착각인지... 짧은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읽어 가면 갈수록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평생을 두고 그를 따라다녔던 간질병,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이력, 시베리아의 감옥 생활, 늘 빚에 시달렸던 가난... 그런 면을 다 알고 시작한 독서였건만 이 작품은 그 어떤 고찰과도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마치 마구잡이로 뭐 널뛰듯 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도무지 그 생각이나 고찰에 대한 논리를 찾을 수 없고 주제를 잡아낼 수 없었다. 크게 1부 “지하의 세계”, 2부 “진눈깨비의 연상에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2부는 그나마 스토리가 있어서 그 정신세계를 상상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1부는 정말 오리무중이었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어떤 이의 정신세계가 자유분방하게 끝간 데를 모르고 펼쳐지는 그 느낌이었다. 연결고리도 없고 논리도 찾을 수 없는 정신세계가 다방면으로 뻗어나가니 그 사상을 어찌 하나로 묶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이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얼마나 깊이 파묻혀있는지 일개 평범한 독자가 어찌 알아내겠는가 말이다.
그의 지론을 한번 들어보자.
“나는 지금 나이 40이지만, 40년이라면 이것은 이미 인간의 전생애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굉장한 노령인 것이다. 40년 이상이나 산다는 건 염치를 모르는 비열한 짓이며 추악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40년 이상을 사는 건 대체 누구냐? 정직하고 성실하게 대답해 보라. 내가 대답하마. 바보와 무뢰한만이 40년 이상이나 사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노인에게 맞대놓고 말하겠다!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백발이 성성한 복 많은 노인들에게 말해 주겠다! 세상 놈들한테 맞대놓고 말하겠다! 나는 그럴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나도 60까지 살 테니까. 70까지 살 테니까! 80까지 살 테니까!... 그러나 잠깐만! 여기서 한숨 돌려야겠다...”
자신의 처지에 있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마치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을 용서를 해달라는 것처럼 그는 말한다: “여러분, 내가 신이 나서 엉터리 철학을 두드리는 걸 용서하기 바란다. 어쨌든 40년 동안이나 지하생활을 해온 인간이니 약간 공상에 치우치더라도 봐줘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그의 공상들은 하나같이 모두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라 얼추 상상해보기도 힘들다.
그 자신도 이런 수기를 마음속으로 상기하면 됐지, 왜, 무슨 목적으로 쓰는지 묻는다. 그리고 대답한다: “종이에 적으면 어쩐지 훨씬 엄숙해지는 것 같다. 종이에 적으면 뭔가 아주 그럴듯해 보이고, 자기 비판도 더욱 철저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럴싸한 말도 절로 떠오를 게 아닌가. 뿐만 아니라 수기를 쓰고 있노라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라고...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걸 싫어하고 남과 어울리기도 싫어하면서 그는 그가 오는 걸 원하지도 않는 친구들을 찾아가 억지로 웃음거리가 되고 경멸을 자초하고 그 경멸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창녀에게는 인생이 불쌍하다면서 불행의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음을 알리기 위해 일장 연설을 해 공감을 얻기도 한다. 결혼한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건 아니지 않느냐는 창녀의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그야 물론 모두가 행복한 건 아니지. 그래도 여기서 이런 생활을 하는 것보다야 나을 것 아닌가. 비교가 안 되지. 애정만 있으면 불행 속에서도 세상을 살아나갈 수가 있으니까. 슬픔 속에서도 인생은 좋은 거야. 아무리 어려운 살림살이라도 인생은 역시 아름다운 것이거든. 그런데 여긴 뭐가 있어? 더러운 시궁창, 악취가 코를 찌르는 시궁창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잖나!”
창녀를 감동까지 시키는 그의 이 말들을 듣고 있으면 마치 그가 우리네와 같은 이성으로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이후에 그가 벌이는 행동이나 말을 보면, 그건 또 아니다. 자기가 한 말을 반박하고 더 추하고 비열한 이유를 대서 창녀도 멸시하고 자신도 스스로 환멸에 빠진다. 즉 남에게 모욕을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도 모욕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끝에 가서 그는 ‘수기’를 ‘소설’이라는 말과 기꺼이 혼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은 문학의 장르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왜 이 수기가 소설이 되어야 했는지... 설명하는 것처럼.
“이제 그만 이 ‘수기’를 끝맺는 게 좋지 않을까? 어쩌면 이 따위를 쓰기 시작한 것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이 ‘소설’을 쓰고 있는 동안 줄곧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이미 문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징벌 수단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구석진 곳에 틀어박혀 돈도 없이 모든 현실과 인연을 끊은 채 지하의 세계에서 증오와 원한을 쌓아올리는 것으로 자기의 생활을 소모했다는 등의 얘기를 길게 늘어놔봐야 하나도 재미가 없을 건 뻔한 일이다. 소설엔 주인공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엔 일부러 계획한 것처럼 주인공다운 것과는 정반대되는 성질만을 하나하나 거둬 모아놓지 않았는가. 그리고 첫째로 이런 일은 독자에게 동떨어져 있어서 생활이란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들 정신적으로 절름발이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멀리 동떨어져버려서 때로는 ‘산생활’에 대해 일종의 혐오를 느낄 지경이다. 그 때문에 ‘산 생활’을 상기시키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제 병이 고질화되어, 진짜 ‘산 생활’을 마치 무슨 힘든 노동이나 되는 것처럼 느끼며, 차라리 ‘소설식인’ 생활 쪽이 좋다고 모두들 속으로 생각하게끔 되어버린 것이다.”
이건 마치 그가 내놓는 문학의 한 이론 같다. 충분히 이성적이고 문학적인 이론! 하지만 이 이론을 위해서 그가 여지껏 독자를 이리저리 이해하기 힘든 문학의 세계 속으로 끌고 다녔단 말인가. 그러기엔 그 과정의 길이 너무나도 험난하고 그 연결고리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는 문학 이론이며 그 증명 과정이다.
아... 문학 전공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나름 정말 어려운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