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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올리비에 여행 - 수채화판 실크로드 여행수첩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프랑수아 데르모 그림, 고정아 옮김 / 효형출판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60이 넘은 나이에 도보로 실크로드를 따라 여행한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를 먼저 읽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 책이 먼저 손에 들어왔다. 좋아하는 수채화 스타일의 그림까지 곁들여진 책이라 주저 없이 잡았다. 계속 <카오산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이나 <사람풍경> 등을 통해 여행책을 읽으면서 지난여름에 했던 프랑스 여행과 정군님의 도보 여행 느낌을 살리고 싶었던 것 같다. 하고자 했고 보고자 했던 것을 다 못한 아쉬움과 도보 여행의 여운을 연장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겠다.
이 책엔 곱고 세밀한 수채화가 가득하다. 정말 아름다운 그림들이다. 풍경과 시장, 현지 모습들 그리고 사람들 등 실크로드를 여행하면서 만날 수 있는 보물들이 가득 들어있다. 소박한 현지인들의 삶을 솔직하고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글도 프랑수와 데르모의 그림만큼 따듯하고 읽는 내내 마음이 순수해지는 느낌이었다. 지명이나 역사에 대한 무지로 맨 앞에 그려져 있는 지도를 들춰보며 여기가 어딘가 찾아보기도 하고, 아는 왕이나 전설에 대한 얘기에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읽었다. 이 책의 특징은 실크로드를 걸어서 다녔던 곳을 화가와 함께 다시 가는 것이었으므로, 그가 예전에 만났던 좋은 사람들, 친구들을 만나는 데도 있었다. 순수하고 열정이 넘치는 현지인들, 차 한 잔 대접받으면 풍성한 식사로 갚는 사람들, 환대란 것이 뭔지 보여주는 사람들, 전쟁과 종교 등으로 찢어지고 헤어지고 갈라졌어도 자신들의 철학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따듯한 시선과 함께 실려 있다. 실크로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 있다. 바로 바자르라는 시장이다. 지금도 중동에서는 상인의 힘이 대단하고 또 상업으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발전해나간다.
“이제는 그 위세를 잃었지만, 바자르는 처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마법의 장소로 남아있다. 바자르는 일을 하거나 물건을 사러 오는 곳이지만, 그 무엇보다 삶의 공간이다. 동양에서 장사는 삶 그 자체다. (...) 장사꾼이 단지 물건을 팔려는 목적으로만 당신과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님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장사꾼이 그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은 바로 당신과 말을 나누는 것이다. 손에서 손으로 옮겨가는 물건은 구체적인 거래의 교환일 뿐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유혹을 하려는 사람이 유혹을 당하려는 사람과 함께하는 애정이 깃든 대화다. 거래가 이루어지면, 친근하게 어깨를 토닥거릴 수 있다.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워낙 실크로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데다 지명들 또한 익숙하지 않아 그런 부분은 읽어도 곧바로 잊어버리곤 했다. 거의 다 무너져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대상들의 숙소 같은 것은 안타까웠고 사막에서 느낄 수 있는 고독이나 내면으로의 사색 같은 것은 여행자가 둘이라 그랬는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런 것은 모두 <나는 걷는다>에 있으리라. 베르나르 올리비에도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이번 여행에서는 실망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싶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말이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처럼 여행하는 것’은 내 취향에 전혀 맞지 않았다. 모터가 달린 차가 싫고, 주유소가 싫고, 기계, 속도, 소음, 무관심과 익명성이 떠도는 커다란 도로가 싫다. 제발 내말을 믿어주길 바란다. 내가 애정을 갖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여행은 내 삶의 리듬도 내 세상도 아니다. 숨을 쉬고 살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느림이고,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고, 풀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몽상에 젖는 것이다. 찌르레기의 비행, 어릴 때 먹었던 솜사탕처럼 뭉게뭉게 짙게 깔린 산등성이, 자기 일을 하느라 바쁘게 내 앞을 지나가는 전갈-하물며 전갈마저-나처럼 풀밭 위를 돌아다니는 방랑자. 이런 모습들이야말로 내 마음에 드는 것들이다. 내 삶의 리듬은 과거의 리듬이라고 할 수있다. (...)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늘 얘기했던 것처럼, ‘가는 것’ 그 자체다.”
또 한 가지 더 안타깝고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은, 여행이란 것이 읽는 독자들에게도 꿈을 꾸게 하는 데 있다고 본다면-즉, 나도 언젠가 배낭 메고 이 길을 걸을 수 있겠지... 하는-,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나 같이 소심한 동양여자에겐 불가능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터키로부터 시작해서 중국의 시안까지 실크로드를 드나들었던 대상들은 모두가 남성이었고, 지금도 여자들에게는 문이 닫혀있는 남성들만의 세계가 너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잔잔(Zanzan)으로 가는 도로에서, 우리는 작은 트럭 하나를 추월해 갔는데, 그 트럭에는 전자 제품 포장 같아 보이는 무거운 상자가 실려있었고 상자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여자는 차도르가 날아갈까 봐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있었다. 여자는 계속 내리는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도 꼿꼿하고 의연했다. 따뜻한 차 안에는 남자 셋이 낄낄거리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둑을 때까지 한 번도 못 가볼지 모르는 곳이지만 그래도 여행책을 읽는 큰 기쁨은 언젠가는 가보겠다고 꿈을 꾸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정말 나이 들어서 겉모습에서 여성성이 중성화된다면 가능할까. 어떻게 보면 직접 가보지 못하는 실크로드의 현재 모습을 이런 책으로 만나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는 것을 숨길 수 없다.
당장 직접 가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매운 떡볶이를 먹고 달랬고, 걸어서 여행하는 기쁨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밤길을 40분 걷다 들어왔다. 자, 이제 떠날 준비해보자...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