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 4백 년 전에 부친 편지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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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 년 전에 부친 편지'라는 부제가 알려주듯이 이 책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한 운명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다. 무덤 속에서 발견된 편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그리고 제목이기도 하고 겉표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능소화에 얽힌 사랑 이야기이다.

어느 양반 집안에 둘째 아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가 명민하고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멀리한다. 그 이유는 교류가 있던 스님이 그 아들을 보고 밝지 않은 미래를 점쳤기 때문이다. 어느 날 소화를 가슴에 안고 들어올 것이고 아름답고 심성 고운 아내 때문에 명을 다할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아버지는 먼저 피할 수 없는 사주팔자 대신 이름과 머무는 집으로 운명을 피해보려고 한다. 즉 선천운이 나쁘면 후천운으로 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못 생기고 포악한 성질을 가진 여자를 찾는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 아니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런 여자를 찾아 간신히 혼처를 정한 어느 날 아들은 가슴에 소화를 품고 돌아온다. 그리고 운명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아들, 응태를 따라다닌다. 

돌중의 세상사 편하기만 하다. “도를 이루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미욱한 인간으로 태어나 도에 이르지 못하고 윤회에 윤회를 거듭하면 어떠하오이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고과 겨울이 오고가는 게 세상인데, 세상이 어디 윤회로 인해 괴롭더이까? 삼라만상이 윤회올시다.” 돌중 아니, 땡중만 되도 세상사 편할 것인데...
 
원래는 소화라고 불리던 꽃은 하늘의 꽃이었단다. 요즘 한여름에 자주 볼 수 있는 그 꽃들이 능소화라고 하던데... 밝고 선명한 주황색에 자태가 단정하고 고운 모습에 담장 밖으로 흘러내리듯이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이다. 그런 꽃에 독이 들어있다니... 인생이란 모든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 하늘의 꽃을 훔쳐 달아난 여자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찾아 하늘에서 내려온 무시무시한 팔목수라... 소화를 이기라고 나중엔 이름이 능소화가 되었다던가. “소화는 코에 대고 냄새를 맡으면 머리가 상해 미친병에 걸립니다. 그 꽃가루에는 독이 있어 눈에 들어가면 실명합니다. 소화는 멀리서 바라볼 꽃입니다. 만지거나 향을 맡아서는 아니 될 꽃이옵니다.” 스님이 알려주는 소화의 근원과 비밀은 모두 하늘 정원에서 꽃을 인간세상으로 훔쳐온 탓이라고 한다.

고전 같은 이야기를 복원한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하다. 게다가 옛 이야기를 듣는 가락이 흥겹고 즐겁기만 하다. 조선후기 서민가사 “노처녀가”의 줄거리를 각색한 “시집 못 간 노처녀” 얘기를 읊어주는 중매쟁이의 노랫말은 정말 새겨둘만하다. 마당패의 풍물놀이 같은 느낌으로 많은 노처녀들에게 사랑의 희망을 줄 수도 있겠다. 얼굴이 얼마나 병신이고 못났으면 개조차 꼬리를 내리고 그 어미조차 토할 지경이었던 노처녀지만 그녀는 용기백배하다. 당사자는 전혀 기죽지 않았으며 그녀의 마음을 노래로 읊어댄다. 남들이 단점이라고 흉보는 것들을 모두 긍정적인 장점으로 바꾸어놓고 노래한다. “그러니 나 좋다는 남정네 없을 리 없고, 내가 시집 못 갈 리 없다. 내가 여태 시집 못 간 것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 박색 탓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조선에서 가장 잘난 남자를 기다리느라 늦었을 뿐이다. 원래 잘난 남자는 발걸음이 늦고 소문에 어두워 이 산골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이 박색인 여자는 당시 양구 을에서 가장 인물이 좋은 것으로 소문난 김 도령과 결혼했고 아들을 셋이나 낳았다.” 김 도령 어디 있소? 나, 여기 있소! ^.~

속속들이 드러나는 운명과 사랑, 가족이야기가 마치 깊은 산골 눈 내리는 밤, 할머니가 옛날이야기를 하듯이 귓가에 소곤소곤하다. 하늘하늘 내리는 송이송이 눈을 타고 소화를 가슴에 안은 계집아이 하나가 눈길을 자박자박 밟으며 찾아오는 느낌이었다.

팔목수라가 아무리 “세상에 이기지 못할 슬픔”은 없고 “잊히지 않을 기억이란 없다. 사그라  들지 않을 추억이나 고통은 없다. 인간이 가진 것들 중에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지만, 아픈 남편을 위한 여늬의 정성은 끝을 몰랐다. 지고지순한 그들의 사랑은 둑음도 갈라놓지 못한다. “저는 당신이 떠나지 않았음을 압니다. 죽음이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음도 압니다. 차가운 냉기 속에서도 당신의 체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당신의 미소를 볼 수 있습니다. 소쩍새마저 잠든 밤에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읽는 내내 가슴이 아릿아릿...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그림으로 앞에 펼쳐지는 듯, 읽는 내내 행복하면서도 슬프기가 그지없었다.

“담 안팎에 어제 심은 소화의 이름을 능소화라 하였습니다. 하늘을 능히 이기는 꽃이라 제가 이름지었습니다. 저는 팔목수라가 가둔 우리의 운명을 거역할 것입니다. (...) 이제 능소화를 심어 하늘이 정한 사람의 운명을 거역하고, 우리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소화는 치명적인 독과 향기를 품은 너무나 아름다운 하늘의 꽃이지만 능소화는 하늘을 거역하고 정해진 운명을 거부한 인간의 꽃이다. 다른 꽃들이 다 지고 난 한 여름의 햇볕 아래 능소화는 너무나 선명하고 아름다운 빛깔로 그들의 사랑을 축복한다. 인간의 사랑이, 그 고통이 잊혀지길 거부하는 용감한 꽃인 것이다. 능소화... 올 여름, 어느 담장에 핀 능소화를 보면 응태와 여늬의 사랑을 기억하리라... 그들의 사랑을 축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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