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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 - 되풀이되는 연구 부정과 '자기검증'이라는 환상
니콜라스 웨이드.윌리엄 브로드 지음, 김동광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2월
평점 :
얼마 전에 황우석 사태를 겪을 때, 그때 난 사실,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친 황우석의 변명도 진실을 밝힌 PD수첩의 방송도 거짓을 폭로한 연구원의 설명도 뒤이은 사건조사 진상도 말이다. 개인적인 연유도 있었고 그 사건 자체가 모두 거짓말로 점철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진실이라고 밝히는 사람도 모두 못 믿게 되는 거짓말 덩어리 같았다. 사건이 그쯤 되면 개개인, 단체, 사회, 국가 할 것 없이 모두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얽혀있기 때문에 도대체 뭘 믿어야 할지, 뭘 버려야 할지 알 수 없게 되는 거짓말의 구조 때문에도 그렇다. 황우석이라는 수퍼스타가 나타나면서 그에 관한 영웅적인 책들이 봇물을 이를 때도 그 내막을 믿지 않았던 건 내 자신, 그런 미디어적인 수퍼스타들에 대해 원래 시니컬한 성격 탓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내게 과학 세계를 좀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그런 사기가 가능할까, 더구나 객관성과 검증성의 보고로 알려져 있는 과학에서, 그 사기의 결과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등등 의문점을 갖고 있던 차에 이 책은 마치 가뭄에 단비처럼 시원하게 과학이라는 전체 구조 안에서 이런 진실 배반 사태를 원인과 과정, 그리고 그 깊은 내막까지 좀 더 명확하게 보게 해주었다. 과학 전문 잡지의 기자들답게 글은 대체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많은 예문과 설명, 분석은 마치 긴박한 추리 형사물 한 편을 읽는 듯 흥미진진했다.
모두 12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조작이나 기만이 벌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반복이 보이기도 하지만, ‘썩은 사과’로 치부하며 한 명의 과학자의 정신 상태나 처한 환경문제로 축소하려는 현 과학계의 의도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과학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과학의 세계와는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 과학의 본질부터 우리의 지각을 깨우며 실례와 함께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분석하며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은 그 논리적 검증의 진실성으로 성스러운 것이며,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인 것으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서문에서도 밝히듯이 저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은 대부분 ‘교과서의 과학’이며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과학은 ‘언론의 과학’이라는 것이다. 모든 과학이 검증되고 중요한 진리의 발견이라고 믿고 있는 일반인에게 상당 부분의 과학이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쉽게 잊혀진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다.
보통 생각하는 전통적인 과학은 논리, 재연, 동료평가 그리고 객관성으로 무장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저자들이 제시하는 수많은 예들은 과학구조가 추론과 상상, 직관, 창의성 등 얼마나 비합리적이며 수많은 날조와 기만, 변조와 표절 등 사기가 가능하고 또 조장하는 제도로 되어있는지 보여준다. 원데이터를 조작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이나 이론에 유리한 것들만 고의든 무의식적이든 추출하거나, 필요성이나 유익성으로 대변되지 않는 재연, 엘리트 집단에게는 무사통과되는 면제 등등은 과학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즉 첫 발견만이 중요하고 대우 받는 과학 사회, 비민주적인 연구실내의 계층구조,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한 논문의 공저, 경력을 늘이기 위한 양적으로만 방만한 연구 목록, 야망을 위해서 진리를 포기하는 연구원 등등이 그 예들이다.
위대한 과학자들조차 관찰을 소홀히 하고서 자신의 생각대로 수치를 기입하거나, 남의 연구를 차용하거나, 더 빠른 결론을 얻기 위해 데이터를 조작하는 등의 기만행위를 저질렀으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남의 논문을 표절해 중요하지 않고 발각될 염려가 없는 잡지에 수없이 게재해 화려한 경력을 쌓고, 연구 재연이 불필요하거나 어려운 이유를 이용해 연구를 조작하고, 원칙을 무시한 엘리트주의나 관료주의의 폐단, 자신의 진실성을 믿으면서 보고 싶은 대로 보고,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리를 몰고 가고, 사기꾼들에게 더 잘 속는 과학자들의 속성까지 전체 과학 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연구실내의 착취 구조가 조작을 부추기고 잘못의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성과만 챙기는 공동저자들, 선취권 경쟁에서 무명의 연구원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싸움을 하려면 얼마나 외롭고 끈질긴 싸움을 해야 하는지, 때로는 정치에 이용되는 과학의 약점, 객관성으로 위장하는 도그마 등등, 과정과 결과를 보고 나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과학 세계는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이며 조작에 얼마나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는지 알게 된다.
변호사는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의로운 자이고 의사는 병든 사람을 치료해주는 기술을 가진 자라고 믿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이 모든 성스러운 일이 하나의 단순한 직업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과학자는 이 세상의 진리를 발견하는 자라고 믿고 있던 우리에게 이 책은 과학자도 결국 ‘직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기만행위와 과학 구조간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면서 저자들은 그 해결방법으로 일단 이런 기만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관행이나 일반적인 문제로 보지 않는 과학세계가 갖고 있는 전통적인 이념을 제가하는 것이 기만행위의 제거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다. ‘오랜 과거부터 과학은 인간이 두 가지 목표를 위해 분투해온 무대였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다른 한편 그 이해를 위해 기울이는 개인적 노력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의 이중성은 과학이라는 사업의 토대에 깔려있다. 이러한 이중적 목적을 인정할 때 비로소 과학자들의 동기와 과학자 사회의 움직임, 그리고 과학 그 자체의 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열거한, 기만에 빠지게 만드는 모든 요소(명예, 야망, 출세주의, 선취권 경쟁, 공유제도, 엘리트에 대한 면제)들을 열거하면서, 기만행위를 방지하는 길로는 적발보다 예방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무엇보다 유혹을 줄이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엘리트 연구기관의 젊은 수퍼스타들에 대해 경계하고, 과학이 공적으로 배분되어야하는 시도로 주요한 공헌을 했을 때만 공저자로 표기하고 공저자로 표기되었으면 그 결과도 함께 책임지는 것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경쟁에서 이기고 과도한 압박으로부터 특히 속임수를 쓰는 의학연구 부문은 가장 시급하게 개혁이 필요한 부분으로 꼽았고, 그 가치를 인정도 받지 못하는 대다수의 과학 논문의 과잉생산을 막아야 할 필요성을 든다. 게재료를 받고 엄격한 심사 절차도 거치지 않고 게재해주는 잡지사의 관행을 줄이고 양보다 질을 강조해서 무조건 긴 논문목록이 아니고 과학자의 영향력을 평가하는 인용빈도분석으로 진가를 평가하는 방법도 있고, 과학 공동체의 규모가 지금보다 더 작고 자격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해결법을 제시한다.
저자들이 결론적으로 말하는 부분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점으로 보인다. 과학자를 보다 회의적으로 볼 것이다. 좀더 현실적인 태도가 대중과 과학자 모두에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과학자 자신부터 시작해야 하며 지적 창조에서 과학과 기타 활동이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 과학은 지식의 추상체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이다. 과학은 진리를 헌신적으로 따르는 충복이 자연에 대해 이상화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의 미덕으로 찬미되는 온갖 성질뿐만 아니라 야심, 긍지, 욕심 같은 평범한 인간의 열정에 좌우되는 인간적 과정이다. (...) 기만행위가 과학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이 과학과 과학자의 진정한 본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9장의 표절을 알리고자 노력했던 무명의 젊은 여성연구원의 일화는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과를 거쳐 전모가 밝혀졌는지,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 마치 반전을 기대하는 형사물 같이 긴박한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주었고, 11장의 IQ에 대한 시작과 어떻게 인종차별의 편견으로까지 대대적으로 이용되었는지 알려준 사연은 유난히 흥미로웠다.
이젠 황우석도 좋게 나쁘게를 떠나서 이해가 된다. 하지만 한편, 서울대학병원에서 시험관 아기를 여러 차례 시술받으면서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혹시나 도둑맞았을지도 모르는 언니의 난자를 생각하면서, 만약 황우석이 정말 성공했더라면... 이렇듯 씁쓸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