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의 정원 - 버몬트 숲속에서 만난 비밀의 화원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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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를 통해 먼저 리뷰를 올렸기에 이번엔 이 책을 보고(! - 많은 아름다운 정원 사진) 읽고 느낀 개인적인 감상만을 적기로 하겠다. 즉, 이 리뷰는 책에 대한 리뷰라기보다는 내 개인적인 삶과 연관된 하나의 스토리이기 때문에 책에 대한 객관적인 리뷰를 바라는 분께는 읽지 마시라고 부탁드린다. 읽고 나서 “뭔 잡소리야?”라는 소리는 듣기 싫기 때문이다. 굳이 리뷰로 올리는 이유는 내 마음의 ‘결심’을 광고하는 셈이다. 

어차피 책은 앞의 책이나 실린 내용과 사진이 거의 비슷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따로 리뷰는 별 소용이 없다고 본다. 한 책은 타샤 튜더가 직접 쓰고, 또 다른 책은 다른 원예사 친구가 쓰긴 했지만, 내용은 정말 비슷하다. 물론 글이나 사진이나 아름답기는 매한가지지만, 두 권이 무척 닮은 건 부인할 수 없다. 1+1을 기대하는 친구들의 욕심이 좀 크긴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될법한 책이다. 두 권 중 한 권만 보고 또 읽어도 그 느낌은 그대로 다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권 다 구입하면 좋지만 정말 구입하고 싶은데 형편이 안 되는 사람에게 난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를 권하겠다. 만약 이 책을 먼저 봤다면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이 책을 권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 책을 보고 나서 시골에 가서 살고 싶은 내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다. 물론 난 타샤 튜더처럼 부지런한 사람도 아니고 정원 가꾸기에 일가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시골에서 자랐고 이제 다시 시골에 가서 살고 싶은 것뿐이다. 남편도 없고 새끼도 없는 난 거칠 것도 없고, 도시에 살만큼 머니가 많은 것도 아니다. 비싸기 이를 데 없는 도시의 아파트가 살기 편한 건 동의하는 바이지만, 난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도 굳이 아파트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물론 현재의 내 능력에 도시에 있는 아파트 구입은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몇 년씩 내 젊은 날의 삶을 저당 잡혀가며 아파트 한 채 구입할 머니를 모을 생각도 없다. 그렇게 해서 산 아파트 한 채가 과연 내게 젊은 날 일만 하며 보낸 세월을 보상해줄까. 그만큼 큰 행복을 줄까. 자신할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난 계속 언니한테 시골에 가서 살자고 했었다. 혼자 살기는 자신 없고, 함께 곁에 살면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언니도 그땐 애기가 없었고 농사를 짓고 싶다고 할 정도로 언니는 시골을 좋아했으니까. 생각 같아선 시골로 내려가 공동 주택 같은 걸 지어서 독립적이기도 하지만 함께 살면 어떤가 하는 공동체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애기가 생기자 언니는 애기 교육 때문에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난 교육도 나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뭐가 달라졌느냐고 하지만 언니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이젠 나 혼자라도 시골로 내려간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골에서도 내 할 일은 있다. 머니가 많이 벌리는 일은 아니지만 내가 도시에서 부자가 되려고 현재의 삶도 잊은 채 아등바등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끝도 없는 머니, 일에 대한 욕심을 부리느라 봄이 어떻게 오는지도 모르고, 아지랑이 피는 것도 한번 못 보고, 꽃이 어떤 빛깔을 내는지, 비바람에 나무가 어찌 흔들리는지, 낙엽이 발밑에서 어떤 이야기를 속삭이는지도 모르고 살기는 싫은 것이다.

타샤 튜더 할머니는 자신의 일상의 기쁨을 만들며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람이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데 그렇게 많은 머니가 필요할까.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삶을 탕진할 필요가 있을까. 타샤 튜더 할머니의 삶과 정원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난 할머니처럼 19세기 풍의 드레스를 입고 화덕을 피우며 요리를 하고 염소를 키워 치즈를 얻고 베틀에 앉아 천을 짜고 싶은 생각은 없다. 화덕도 염소도 베틀도 30만평도 내겐 정말 오바다. 그저 시골에 작은 집 한 채, 앞마당에 꽃 가꾸고 뒷마당에 채소 심고 울타리에 내가 좋아하는 과실수 몇 그루 심는 게 내가 원하는 바다. 타샤 튜더 할머니처럼 30만평도 아니고 화덕도 아니고 베틀도 아닌데 그까짓 거 못 할 거 뭐 있어? 햇살 좋은 날, 마당에 평상 하나 놓고 늘어져 책보다 하늘보다 구름보다 지나가는 바람이 전해주는 소식도 들으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런 게 내겐 일상의 기쁨이고 행복일 게다. 타샤 튜더 할머니가 할머니의 삶과 정원을 통해 가르쳐 준 것은 그게 단지 꿈이 아닐 뿐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언니는 안 읽은 책이 없고 안 본 영화가 없고 모르는 식물, 꽃이 없다. 그런 언니가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꽃마다 코멘트를 하고 지나간다. 그러다 말한다. “야, 여기 번역 이상하다. 이거 앵초 아냐... 복수초야.” 난 앵초건 복수초건 중요하지 않다. 예쁜 꽃이란 게 중요한 거지... 근데 아무래도 시골 갈 때 언니를 데리고 가야 꽃을 제대로 가꾸며 살 텐데...

사실 우리 큰 조카가 꿈 깨는 소리를 하긴 했다. 절대로 자기 엄마한테 세자매가 시골 가서 함께 살면 안 된다고 했다나. 만약 셋이서 한 집에 그렇게 살게 되면 자기 엄마인 큰 언니는 만날 부엌에서 밥하고 음식하고 설거지하고 큰 이모는 만날 정원에서 꽃 가꾸며 채소 가꿀 거고 막내 이모는 만날 책만 볼 거라고 했다나 뭐라나... 막내 이모? 그거,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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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08-11-03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고르다가 반가운 닉네임이 보여서 땡스투~ 꾸욱 누르고 가요. :)

진달래 2008-11-04 09:39   좋아요 0 | URL
어머... 소녀님. 고맙습니다. *^^*
담에 저도 신세를 갚을 날 오겠죠? 헤헤...
 
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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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건방지게(!) 얘기하는 이 작가, 웃기다고 생각했다. 소설이란 상상력의 부산물이고 허구에 기초하고 있다는 기본 원리를 완전 무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가, 책을 다 읽고 나면 전혀 밉지 않다. 왜냐... 직접 겪은 일을 쓴다고 하지만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이, 겪었을 당시의 감정이나 심리를 세세히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적인 표현력 없이 그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독자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대부분 자신이 본 것, 느낀 것, 겪은 것 등을 바탕으로 자전적 소설을 많이 쓴다. 하지만 그 작품들 모두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다. 진솔한 경험이 너무 개인적인 감정에만 치우치다 보면 흔히 이해가 되지 않고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끌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이나 개인적인 경험이 문학적으로 또는 예술적으로 승화되기는 정말 어려운 법이다. 어쩌면 순수한 상상력인 결과물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작가로선 그런 글을 쓰기 시작하기는 쉽지만 실패의 위험부담이 크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작가가 6년간의 관계를 끝낸 W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기자 생기기 시작한 그녀의 ‘집착’에 대한 감정을 그렸다. 어떻게 보면 헤어짐의 관계는 쿨할 수 있었다. 그녀가 끝내자고 한 것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헤어짐으로 고통 받고 그의 새로운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사로잡히게’ 된다. 그녀의 이름을 끊임없이 알고 싶은 이유는 ‘그것은 내 존재가 텅 비어버린 지금 그녀에게 속한 아주 작은 어떤 것을 빼앗아오는’ 행위인 것이다. 그녀가 집착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새 여자에 관해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책은 어떻게 보면, 소설이라고 보기보다는 소설의 기능을 설명해주는 글 같다. 그녀의 이러한 글쓰기는 어떻게 보면 자연치유의 한 수단이다. 작가도 다시는 그를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적은 순간에는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글쓰기로 인해 고통이 가벼워진 것을 상실감과 질투가 끝난 것으로 혼동한 것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더군다나 자신의 강박증과 고통을 글쓰기로 토해내고 나면 자신은 아무 느낌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건 이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할 익명의 독자들이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형체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것들을 제 것으로 삼을 것이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더 이상 나의 욕망, 나의 질투가 아니라 그저 욕망, 질투에 속하는 것이고,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치열한 사랑의 군더더기 감정인 질투로 인해 받았던 고통이 사라지고 그의 새 여자에 의해 사로잡혀 있던 감정이 사라지면서 그녀는 정화되고 그 시간은 종결된다.

자신이 열정적으로 겪은 사랑과 섹스를 ‘이용’하는 작가들이 있다. 읽다보면 눈살을 찌푸릴 때가 많다. 꼭 연애만이 아니고 친구간의 얘기나 가족간의 얘기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그런 사적인 경험을 공적인 글쓰기라는 수단이나 성공의 발판으로 삼아서가 아니다. 작가가 아닌 상대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상태에서 작가라는 유리한 고지를 ‘이용’하는 치사한 방법 때문도 아니다. 그저, 그 글이 그만큼 문학성을 띠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아니 에르노는 성공한 작가다. 군더더기 없는 그녀의 감정 표현이나 세세한 심리 묘사가 그런 개인적인 경험을 뛰어넘게 만든다. 사실성이나 선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뛰어난 작가임에 틀림없다.

이제 그녀의 다른 책들도 찾아보고 싶고, 그녀의 연인이었던 필립 빌랭이 쓴 <포옹>도 읽어보고 싶다.

<글쓰기는 더 이상 내  현실이 아닌 것, 즉 길거리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엄습하던 감각을 간직하는 방식, 그러나 이제는 ‘사로잡힘’이자, 제한되고 종결된 시간으로 변해버린 그것을 간직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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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보석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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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를 알게 된 건 아마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이었던 것 같다. 어느 늦은 가을 날 저녁 어스름에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는 골목으로 한 남자가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쓸쓸히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뒷모습이 마치 이 소설의 느낌이었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찾아가는 그 여정은 마치 안개 속을 헤매듯이 그렇게 쓸쓸하게 다가왔었다. 시작도 끝도 어딘지 모르고 중간에 뚝 끊어진 다리처럼 이야기도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 <작은 보석>은 어느 날, 길거리에 뚝 떨어진 보석 같았다. 너무 작아서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고 스스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빛나지 않는 작디 작은 보석... ‘사람들은 나를 ‘작은 보석’이라고 불렀어요.’ 어른들은 무슨 권리로 제대로 키울 줄도 모르면서, 보살펴주지도 않고 사랑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아이를 낳는 걸까. 낳았으면 사랑할 의무, 아버지가 누군지, 누구랑 사랑해서 아이를 낳았는지 아이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렇게 무책임을 꾸짖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잃어버린 물건은 절대로 되찾지 못함’은 소녀의 목에 걸린 주소를 적어둔 종이쪽지나 마찬가지였다. 소녀의 엄마에게 소녀는 이유야 어쨌건 ‘고의’로 잃어버리는 물건인 것이다.

어느 날 생긴 단절로 아이는 커가지만 크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가장 오래된 유년기의 기억에서부터 모든 것은 내게 너무 혼란스러웠다...’ 기억과 추억이 모두 조각 조각나 어디서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는 자신의 근원을 찾는다. 어머니라는 여자를 말이다. 그 비슷하게 생긴 빛바랜 노란 바바리를 입고 가는 여자를 보고 엄마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그녀를 따라가고 그녀가 진 빚을 그녀 몰래 탕감해주고... 하지만 소녀는 오랫동안 모든 것을 잊고 지냈던 때는 평온하게 지낸 반면, 엄마가 둑지 않았다고 믿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무시무시한 공포에 질려 새벽에 깨곤 한다. 역설적이게도 말이다.
 
엄마 없이 외롭게 큰 소녀는, 부모가 있지만 소녀 못지않게 외로운 아이를 돌보면서 그 외로움을 가늠해본다. 미래, 그 아이가 겪게 될 외로움을... 소녀는 우연히 라디오를 들으며 번역을 하는 번역가 청년을 만나고 쓰러질 듯 했던 자신을 돌봐준 여자 약사를 만나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는다. ‘그를 거의 모르는 상태였지만,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되었다.’ 그 외로움이나 고독감은 사라지지 않아 결국은 병원에서 깨어나지만, 어쩌면 작은 보석은 어느 날 스스로 빛나게 될지도 모른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그날부터 내게도 삶이 시작된다는 신호가 그러고도 오랫동안 귓가에 쟁쟁했다’로 소설이 끝을 맺기 때문이다. 스스로 빛날 준비가 된 희망찬 작은 보석...

모디아노의 소설은 특이하다. 과거와 현재의 조각이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을 소설을 읽으면서 주우면서 따라가는 길 같다. 대로를 따라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하철 안, 골목 안, 숲으로 들어가 버려 미래에는 어느 길에 서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길... 하지만 길을 가는 사이, 가끔은 햇살도 비추고 살랑살랑 바람도 불어오고 가랑비도 내리고... 어쩌면 명확하지 않은 그 길, 바로 그 길이 이 세상이고 우리의 삶인지도 모른다. 모디아노가 그리는 소설 속 세상은 어쩌면 그런 세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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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따러 가자 - 윤석중 동시집
윤석중 지음, 민정영 그림 / 비룡소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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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엔 꽤 시를 좋아했고 꽤 많은 시를 외우고 다녔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내 머리와 가슴에선 시가 조금씩 그 자리를 잃어갔고 더구나 동시는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있었다.

그런데도 윤석중님의 시는 곱고 맑은 시냇물처럼 언제든지 내가 자랐던 시골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다시 첨벙대고 놀 수 있는 추억의 시냇물이었다. 얼마 전에 본 동화책 <넉 점 반>이란 시는 내게 다시 윤석중님의 시를 그리워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번에 접하게 된 <달 따러 가자>는 시 하나를 그림책으로 엮었던 <넉 점 반>이 남겨준 아쉬움을 채워주는 것이었다. 모두 56편의 시로 엮인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동요가 된 동시가 많이 들어있다. 시를 읽으며 함께 흥얼거렸다. 언니가 애기한테 불러주던 동요도 꽤 있었다. 이젠 내가 우리 조카한테 빨랑 빨랑 읽어줘야겠다.

그림도 무척 좋다. 연필 선이 그대로 살아있고, 일부러 서투른 듯 색칠한 그림들이 순수하고 맑아 윤석중님의 시와 잘 어울린다. 표지에 동생 업고 있는 단발머리 소녀는 엄마에게는 아릿한 추억을 일으킬 것이고, 동생이나 언니가 없는 아이들에겐 그 모습이 신기할 것이다. 단순화시킨 아이들 모습도, 표정도 좋지만, 나비, 잠자리, 물방울, 밤톨, 이슬 등에 그려진 표정도 압권이다. 이파리에 맺힌 이슬방울의 잠자는 표정들은 최고다. 동시와 그림이 잘 어우러져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은 동시집이 되었다.

달 따러 가자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
갈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뒷동산에 올라가 무등을 타고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자

저 건너 순이네는 불을 못 켜서
밤이면은 바느질도 못 한다더라
얘들아 나오너라 달을 따다가
순이 엄마 방에 다가 달아 드리자

얼마나 고운 마음인가. 기가 막힌 마음이다. 장대로 달을 다서 망태에 담아 순이네 가서 달아드리자니...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고운 마음을 새겼으면 좋겠다. 고마운 동시...

사과 두 개
 
두 개 두 개 사과 두 개
언니 한 개 나 한 개

받아 들면 작아 보여
자꾸자꾸 바꿉니다

두 개 두 개 사과 두 개
언니 한 개 나 한 개

어찌 이렇게 내 맘을 잘 표현하셨는지... 아이의 욕심이 맑고 곱다. 그러면서 조금씩 커가는 것이겠지...

삽살개

삽살개야 삽살개야 너는 너는
털외투를 입어서
겨울에도 춥지 않겠구나
그 대신 도련님
여름이면 더워서 못 견디겠어요

우리 눈은 남의 좋은 것만 볼 줄 알고 불편한 걸 볼 줄은 모른다.
그래서 마냥 남을 부러워하기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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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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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중국의 문화대혁명... 그게 그런 뜻인 줄 몰랐다. 그저 지식인들이 비난받고, 책들을 불사르고... 그 정도의 억압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 자식들에게까지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는 대신, 시골이나 산골에서 재교육을 받으라고 했다니... 어떤 문화 혜택도 없이 그저 육체노동을 강요했다니... 더구나 언제 끝난다는 보장도 없이.

다이 시지에는 그렇게 자신이 겪어온 세월을 장편소설로 엮어냈다. 사실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며 아무 희망도 없이 세월을 보냈다니,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하지만 그도 말하듯이, 그건 그만이 겪은 일도 아니고 그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터였다. 그래서 그런가. 받아들이는 태도가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짜증이나 억울함도 볼 수 없고, 그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긍하는 게 당연한 것 같다. 모두들 그러므로 불우한 시기이긴 하지만 그래야 하는 것인 줄 알고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뤄와 나는 그렇게 ‘하늘 긴꼬리닭’이라는 산골로 재교육을 받으러 가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천상 이야기꾼인 ‘뤄’는 그 시골에서 눈부시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바느질하는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나’는 틈만 나면 바이올린을 켠다. 몹쓸 병도 앓고, 별별 육체노동이나 억압과 감시를 당하는 와중에 옆 마을 친구 ‘안경잡이’의 비밀박스 안에 그들의 희망이 있었다. 바로 감춰둔 발자크와 여러 명의 서양 작가들의 작품들이었다. 문화의 혜택을 원래부터 누리지 못하는 산골에서도 영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덕분에 육체노동을 면제받고 소도시에 내려가 영화를 보고 와서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지만, 서양 문학의 향기로 그나마 힘든 일을 버티는 것이다. 그래도 젊음의 사랑 앞에선 금지도 소용없지만. 

“‘하늘긴꼬리닭’의 산골의 공주는 야들야들하면서 질긴 천으로 만든 장밋빛 신발을 신었는데, 그녀가 재봉틀 페달을 밟을 때마다 움직이는 발가락이 그 신을 통해 보였다. 비록 손으로 만든 흔해빠진 싸구려 신발이긴 했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맨발로 다니는 그 고장에서는 눈에 띄게 세련되고 고상해 보였다. 하얀 나일론 양말 때문에 예쁜 발목과 발은 더욱 돋보였다.”

겉표지에서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느껴진 신발 사진 때문이었는지 이 대목이 유독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바느질 소녀에 대한 ‘나’의 느낌이다. “그녀의 눈은 천연보석과 자연 금속의 광채를 띄었는데, 긴 속눈썹과 약간 위로 치켜올라간 눈초리 때문에 그 효과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글 전체에서 ‘위대한 인간실험’의 과정과 모순을 보고 ‘실험재료’들의 목마름이 느껴지고 실험시키는 자들의 부패, 타락, 타협이 여기저기서 느껴지지만 결국 문화의 힘이 순종을 거부한다. 책이라는 문화 매체로 개화시키겠다는 뤄의 말이 아니라도 중국소녀는 발자크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 글과 정신을 흡수한다. “발자크는 그애의 머리에 보이지 않는 손을 올려놓은 진짜 마법사야. (...) 그애는 자신의 살갗에 닿는 발자크의 말들이 행복과 지성을 갖다줄 거라고 말했어.” 결국 발자크로 인해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 걸 깨달은 중국소녀는 대도시로 길을 떠난다.       

정말 내 입장에서 할 소리는 아닐 수도 있지만 궁금하다. (^^;) 원래 중국어로 씌어진 것이 불어로 번역돼 다시 우리가 한국어로 읽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모국어도 아닌 불어로 쓴 것인지... 읽다 보면 약간의 어긋남이랄까, 깊이의 부재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좋은 글에 그게 한 점, 아쉬웠다. 아니면 현대작가에게 <대지>를 기대한 탓일지도 모른다.

공산당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늘 갖고 있는 생각 하나는 이것이다. 사람의 재능과 성격, 특성이 다른데 어떻게 평등이 가능하냐고... 더구나 아래로의 평등... 그나마도 아니면 그 많은 중국 국민들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고 하지만, 그래도 그런 억압, 억지를 견딜 수 있을까. 중국에서 살다 온 친구 하나는 며칠 전 그런다. “여긴 중국 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거긴 난로도 맘대로 못 때. 공산주의잖아...” 원래부터 그런 체제하에서 살았다면 견딜 수 있을까... 그런 사회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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