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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보석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파트릭 모디아노를 알게 된 건 아마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이었던 것 같다. 어느 늦은 가을 날 저녁 어스름에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는 골목으로 한 남자가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쓸쓸히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뒷모습이 마치 이 소설의 느낌이었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찾아가는 그 여정은 마치 안개 속을 헤매듯이 그렇게 쓸쓸하게 다가왔었다. 시작도 끝도 어딘지 모르고 중간에 뚝 끊어진 다리처럼 이야기도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 <작은 보석>은 어느 날, 길거리에 뚝 떨어진 보석 같았다. 너무 작아서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고 스스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빛나지 않는 작디 작은 보석... ‘사람들은 나를 ‘작은 보석’이라고 불렀어요.’ 어른들은 무슨 권리로 제대로 키울 줄도 모르면서, 보살펴주지도 않고 사랑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아이를 낳는 걸까. 낳았으면 사랑할 의무, 아버지가 누군지, 누구랑 사랑해서 아이를 낳았는지 아이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렇게 무책임을 꾸짖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잃어버린 물건은 절대로 되찾지 못함’은 소녀의 목에 걸린 주소를 적어둔 종이쪽지나 마찬가지였다. 소녀의 엄마에게 소녀는 이유야 어쨌건 ‘고의’로 잃어버리는 물건인 것이다.
어느 날 생긴 단절로 아이는 커가지만 크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가장 오래된 유년기의 기억에서부터 모든 것은 내게 너무 혼란스러웠다...’ 기억과 추억이 모두 조각 조각나 어디서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는 자신의 근원을 찾는다. 어머니라는 여자를 말이다. 그 비슷하게 생긴 빛바랜 노란 바바리를 입고 가는 여자를 보고 엄마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그녀를 따라가고 그녀가 진 빚을 그녀 몰래 탕감해주고... 하지만 소녀는 오랫동안 모든 것을 잊고 지냈던 때는 평온하게 지낸 반면, 엄마가 둑지 않았다고 믿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무시무시한 공포에 질려 새벽에 깨곤 한다. 역설적이게도 말이다.
엄마 없이 외롭게 큰 소녀는, 부모가 있지만 소녀 못지않게 외로운 아이를 돌보면서 그 외로움을 가늠해본다. 미래, 그 아이가 겪게 될 외로움을... 소녀는 우연히 라디오를 들으며 번역을 하는 번역가 청년을 만나고 쓰러질 듯 했던 자신을 돌봐준 여자 약사를 만나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는다. ‘그를 거의 모르는 상태였지만,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되었다.’ 그 외로움이나 고독감은 사라지지 않아 결국은 병원에서 깨어나지만, 어쩌면 작은 보석은 어느 날 스스로 빛나게 될지도 모른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그날부터 내게도 삶이 시작된다는 신호가 그러고도 오랫동안 귓가에 쟁쟁했다’로 소설이 끝을 맺기 때문이다. 스스로 빛날 준비가 된 희망찬 작은 보석...
모디아노의 소설은 특이하다. 과거와 현재의 조각이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을 소설을 읽으면서 주우면서 따라가는 길 같다. 대로를 따라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하철 안, 골목 안, 숲으로 들어가 버려 미래에는 어느 길에 서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길... 하지만 길을 가는 사이, 가끔은 햇살도 비추고 살랑살랑 바람도 불어오고 가랑비도 내리고... 어쩌면 명확하지 않은 그 길, 바로 그 길이 이 세상이고 우리의 삶인지도 모른다. 모디아노가 그리는 소설 속 세상은 어쩌면 그런 세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