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쿨하게 한걸음 -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드디어 창비에서도 장편소설상이 제정되었다. 물론 창비의 이름을 달고 있지는 않지만 창비에서 주관하는 문학상은 이것저것 많은 걸 알고 있다. 한국문학을 위해 선두자리를 꼿꼿이 지키는 창비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좋아하는 출판사 창비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문학상이 그지없이 반갑기만 하다.
그 첫 수상작인 이 작품은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나 자신을 들여다보듯 공감하며 읽었다. 물론 물리적인 나이는 서른셋을 지났지만 지금의 난 그 나이의 싱글 여자와 하나도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가정도 마찬가지, 친구들도 마찬가지, 직장이나 연애의 문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위치이다. 이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가? 남들이 나를 보는 자리는 또한 어떤 자리인가? 앞으로 내가 차지할, 차지하고 싶은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그렇게 공감가는 대목이 많은 대신 놀랄 것 하나 없는 이 작품은 요즘 나오는 대다수의 세대 이야기 같은 게 또 흠 아닌 흠이다. 너무나 현실적이고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제목만큼 이야기는 쿨하게 흘러가고 결말도 긍정적으로 한 걸음 덥석 내딛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만큼 각자의 이야기도 각자의 심리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있다.
퇴직한 아버지, 갱년기 엄마, 입사부터 엄청 깨지고 간신히 회사생활을 하는 동생, 열심히 선보는 로맨티스트 친구 희주, 디자이너로서 성공하고 싶어하는 민경, 자유주의자에서 현실적이 된 선영, 결혼 경력이 오래된 은미, 교원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명희 등등 이 세상의 피터팬들과 웬디들 그리고 늘 속물 자랑질인 고모와 고모딸 등등. 또 있다. 백수가 되면서 도서관에 가서 살다시피 하던 연수가 우연히 다시 만난 대학 동창 동남은 세상 짐 혼자 다 짊어지고 살고 있다.
서른셋 싱글 여자에게 중요한 건 뭘까? 집에서의 딸 노릇, 연애와 결혼, 직장 그리고 미래 등등이 아니겠는가. 간신히 적금을 털어 부모님 환갑 여행은 보내드릴 정도이지만, 잘 나가는 고모 딸에 비하면 연수는 제대로 딸 노릇을 못하는 거 아닌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상한 패배감 같은 게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정신적으로는 미성숙하지만 미모도 출중하고 부유한 남편을 만나서 번듯하게 가정까지 꾸리고 사는 삼십대 여자와 가진 것도 없고 인구감소의 주범 역할을 하지만 머릿속에는 늘 생각이 들끓고 있으며 무언가를 향해 질주하고 싶어하는 삼십대 여자가 있다면, 세상은 누구의 편을 들어줄까. 누굴 선택하고 지지할까. 질문 자체가 너무 초라한가? 사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뻔하다. 그래도 가끔은 진지하게 묻고 싶다. 누군가, 내 편은 정말 없나요?”
그렇다. 그 나이엔 부모님 말고 친구들 말고 내 편이 필요한 나이다. 그래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연수의 연애는 깨졌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서른살이 넘으면서부터는 생일이나 밸런타인데이 같은 기념일에 흥미나 기대를 갖기 않게 되었다. 계속되는 실망감이 기대를 없앤 건지, 나이가 들면서 어차피 그날이 다 그날임을 깨닫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바라는 건 특별한 날 싸우지나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몇 년 사귀면서 서로 알 것 모를 것 다 알아버리고 더 이상의 노력도 하지 않는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연애에 연수는 종지부를 찍어버린다. 웃긴 건, 서로의 집도 왔다 갔다 하는 사이면서 언제 결혼날짜를 잡을까 하던 사이에 그렇게 쉽게 헤어진다는 거다. 그렇게 쉽게 끝날 수 있는 게 요즘 연애고 요즘 결혼일 것이다.
“내가 지금 문을 열고 확 나가버린다면 헤어질 확률이 팔십 퍼센트 이상, 꾹 참고 다가가서 러닝셔츠 입은 저 등짝을 뒤에서 껴안는다면 화해할 확률이 팔십 퍼센트 이상이다. 사귀기 시작했을 때도, 다투고 난 뒤에도 액션을 취하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그리고 직장 문제가 있다. 물리적인 생활안정에 제일 필요한 월급을 대주는 회사다. 들어가긴 너무나 어려운 회사, 너무나 쉽게 나가라 한다. 새로 들어가 보려고 하니 어디나 이젠 아예 국가고시나 마찬가지다.
“회사가 다 똑같지, 뭐 별거 있어? 또라이 아니면 치사한 인간들 우글거리고. 그런 인간들이야 어디 가나 있는 거니까 신경 안 써. 취직 못했을 때는 얼마나 대단한 인간들이 회사에 다니길래 이렇게 들어가기가 힘든가 싶었는데 다녀보니까 또라이 같은 인간들도 잘만 다녀. 아니 그런 사람들이 더 잘 다녀. 일이라는 게 특별히 보람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월급 주니까 다니는 거지.”
그러니까 서른 넘어서 연수는 ‘누군들 애인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고 무언가 뿌리째 흔들리는 삼십대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말 상상과는 너무 다르다. 십대 후반, 혹은 이십대 초반쯤에는 서른살 정도면 인생의 모든 것이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평범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가족들은 모두 ‘다들 쿨럭쿨럭 요동치는 자신만의 지각변동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침묵을 지켰다.’ 그 와중에 동남의 소식은 미래를 준비하던 연수를 슬프게 한다. ‘아. 캐러멜라떼. 그걸 보는 순간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커피는 참으로 삶의 한가운데 있는 존재 같았다. 입 안으로 넘긴 커피가 하도 달콤하고 따뜻해서 왈칵 눈물이 났다.’ 그래도 서른셋 연수는 일보 전진하기 위해 힘을 낸다.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꿈을 안고.
‘서른세살이 되고 보니 서른세살이라는 나이는 많지도 적지도 않고, 애인이 있거나 없거나, 결혼을 했거나 안했거나, 아이가 있거나 없거나, 직업이 있거나 없거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거나 없거나, 있었는데 모호해졌거나 없었는데 생겼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그럭저럭 살 만하거나, 혹은 그것들의 혼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재의 양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나의 서른셋 이후는 과연 어떤 풍경이 될까. 그것이 궁금해졌다. 나는 한번 멋지게 꾸려가보기로 했다. 숨을 가다듬고 일보 전진하면서! 절대로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막을 내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