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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손홍규가 그리는 삶은, 그가 말하듯이 신이 선사한 건지 모르지만 누추하다. 하지만 그 영광을 또한 작가가 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돌리듯이, 여기 스스로 아름다워지려는 사람들이 있다.
상식적인 세상을 꿈꾸는 걸레도, 성냥갑만한 방에서 소설을 쓰는 그와 나도, 거웃에 사면발이가 사는 용태와 뒤통수를 때리는 알리도, 손지 사람인지 모를 아비 응삼이와 소를 모는 봉섭이도, 몸에 뱀을 키우는 그도, 남과 북에 사는 준영도, 괄호 열고 괄호 닫는 못 생긴 늙은 여자도, 최초, 최후 그리고 나머지 테러리스트들도 모두모두 누추한 세상을 선사받았지만 불평 없이, 소리 없이, 움직임도 없이 그들에게 주어진 삶을 산다.
하지만 사기극에서 진실(!)을 깨닫는 아영의 모습에서 아이러니가 꿈틀대고 작가의 조롱 섞인 유머가 통쾌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상식이 통하는 세상으로 가는 길을 품고 있는 곳. 그게 바로 아영이 찾는 광야였다. 아영은 그렇게 찾아헤매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광야를, 사실은 오래전부터 거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상식적인 시절>
또한 깨달음은 ‘내’가 소설에 대한 믿음을 잃은 순간에 온다. 매혹적인 결말을 찾아 일상의 누추함도 견디며 소설을 쓰던 내가 결국 귀향을 결심하고 그에게 묻자, 그가 간단하게 대답한다.
“어쩌면 소설은 처음부터 진리를 담는 그릇 같은 게 아니었는지도 몰라.” -<매혹적인 결말>
몸에 뱀을 키우고 사는 그는 진정 예쁜 얼굴을 은주의 온전치 못한 반쪽 얼굴과 온전한 쪽을 반쪽 탈로 가린 얼굴에서 본다.
‘은주는 제 흉측한 얼굴을 가리는 대신 온전한 반쪽을 반쪽짜리 탈로 가리고 있었다. 온전한 귀신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갓맑은 은주의 눈동자에 온몸이 빨려들 것만 같았다. 예, 예뻐? 예뻤다.’ -<뱀이 눈을 뜬다>
결국 삶의 진실은 현수와 그 친구들이 나누는 삶에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삶은 우리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암살자와 같은 거야. 하지만 보통의 암살자와는 다르지. 결코,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니까. 단지, 시늉을 할 뿐이지. ……우리는 끊임없이 살해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암살자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어. 암살자의 뜻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암살자는 방아쇠를 당기고 말 테니까. 하지만, 아무도 몰라. 정말 그 총에 총알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 공포를 견딜 수 없거나, 혹은 꼭두각시처럼 살기 싫어졌을 때, 우리는 방아쇠에 들어가 있는 암살자의 집게손가락에 자신의 집게손가락을 올려놓게 되지. 지금이 그 순간일지도 몰라.”
소리 없이 누추한 삶을 견디며 사는 것도 힘든 만큼 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릴 없이 영광을 돌리기도 힘든 일인지 모른다. 작가의 말처럼 사람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노예로 태어난 것 같이 일을 하는 부모님의 삶이 안쓰럽고 화가 나기까지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분들의 삶에서 일을 빼앗아버리면 그 삶은 어디에서 의미를 찾을까.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노예의 삶이 주어졌어도 그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그분들의 받아들임, 그것이 어쩌면 그 누추한 삶을 선사한 신의 뒤통수를 때리는 게 아닐까. 둑는 척하며 뒤통수를 때린 알리처럼. 그리하여 영광(!)을 얻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