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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 - 한국 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문태준 해설, 잠산 그림 / 민음사 / 2008년 6월
평점 :
가을에는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나무가, 눈 부시게 파란 하늘이,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가 모두 시어가 되는 계절이다. 가을에는 시집 한 권을 반복해서 읽게 된다. 박완서 작가의 수필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에서 추천하여 읽게된 이 시집은 한국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이라는 부제로 낯익은 시들이 많이 나온다. 또한 문태준 시인의 해설로 시 하나하나의 시대적 배경과 작가에 대한 설명, 내면에 담고 있는 뜻까지 친절히 설명해 준다.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이 시를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때 참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 헤어지고 나면 사소함으로 변해가는 그 가벼움이 서글프다. 그러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면 아련한 추억으로 남겠지.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헤어짐은 늘 가슴 아프다.
수묵(水墨)정원 9 - 번짐 /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조정권의 <산정묘지>, 박목월의 <나그네>에서 김현승의 <눈물>과 정끝별의 <가지가 담을 넘을 때>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를 망라한다. 깊어가는 가을, 따뜻한 시 한편 읽으며 가을을 만끽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