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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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이 가까워오는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그녀의 글에는 서울 깍쟁이 같은 새침함과 약간 이기적인 얄미움, 군더더기 없는 맛깔스러움이 묻어난다. 또한 일상인듯한 편안함으로 단숨에 읽어 내려가는 흡인력도 그녀의 글을 읽는 즐거움이다. 산만한 느낌이 들어 단편 모음집은 좋아하지 않지만 이 작품은 단편임에도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3-40대 주인공이 아닌, 모두 삶을 관조하는 노년이 주인공이면서 마치 에세이를 읽는 듯한 편안함이 있기에 읽는 내내 행복했다.     

첫 글인 <그리움을 위하여>는 사촌이면서 집안일을 도와주던 동생이 늦사랑을 하고 영감을 따라 삼천포로 갔을때, 당장 밀린 집안일과 차례상 준비를 하면서 동생에 대한 끝없는 원망과 허전함으로 "인복을 놓친 나는 지금 얼마나 불쌍한가, 엉엉 소리를 내서 울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는 화자의 솔직한 표현에 그만 웃음이 났다. 결국 동생의 진실한 사랑을 알게 되고 동생과 영감의 모습을 그린 "칠십에도 섹시한 어부가 방금 청정해역에서 낚아 올린 분홍빛 도미를 자랑스럽게 들고 요리 잘하는 어여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이 있는 섬, 그런 섬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그리움이 샘물처럼 고인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라는 마지막 글은 작가의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글의 현란한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기도 했다. 

마치 그녀의 첫사랑 이야기 인듯한 <그 남자네 집>은 장편으로 읽었을때와는 또 다른 담백함이 있다. 결혼전에 읽었다면 남자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 참 이기적인 "연애 따로 결혼 따로"인 얄미움이 묻어난다.

내 나이 마흔 아홉이 되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지금처럼 도서관 열심히 다니고, 아이들 대학 보내고 한 숨 돌리고 있겠지. 주인공과 비슷한 시기이다. 시어머니의 별거선언으로 아버지는 주인공 집으로 어머니는 시누이 집에서 각각 사는 상황인 <마흔아홉 살>은 잠시 음식을 사러 나간 사이 주인공의 사생활을 주제로 험담을 나누는 우리네 풍경을 그렸다. 요즘 말 한마디의 조심스러움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 와닿는 글이었다.

<후남아, 밥 먹어라> 위로 언니가 둘이고, 아래로 남동생이 둘인 후남이 '앤'은 부모의 등꼴이 빠진 등록금으로 대학을 다니는 언니들을 보며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미국으로 시집가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가득 시름을 안고서 엄마를 찾아온 후남이는 이모네 집에 있는 치매에 걸린 엄마를 통해 비로소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위로 오빠, 언니와 남동생 둘인 우리집에서의 내 위치. 한 때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야속한 마음에 밤새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면서 가슴이 짠해 온다. 물론 나의 부모님은 넉넉치 않은 시골 형편임에도 교육에 열성이셨고, 늘 예쁜 막내딸이라고 나를 소개하시는 나름 편애를 받는 쪽이었다. 나만의 착각 이었을까?

책의 제목이기도 한 <친절한 복희씨>는 중풍으로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남편과 사는 복희할머니의 이야기이다. 짧은 내용이지만 고단한 삶의 편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래도 해피 엔드> 서울토박이인 화자가 그림같은 전원생활을 하게 되고, 서울동창 모임에 가면서 예전의 베스트드레서를 상기하며 한껏 멋을 부리지만 버스 기사에게, 승객들에게 모멸감을 당하고 쫓기듯 택시를 탔는데 "사모님 어쩐지 멋쟁이다 싶었는데 외국에서 오래 사시다 오셨나 봐요. 그렇죠?" 하는 말에 그 동안의 속상한 마음이 풀어지는 내용으로 한편의 콩트를 읽은 느낌이다. 마치 내 속마음을 들킨 듯 하다. 
    
어쩜 이리도 한편 한편이 보석 같을까? 가끔 나이 드는 조급함이 느껴질때 야곰 야곰 꺼내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물론 주인공보다는 이 글을 쓴 작가에 대해 떠오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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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2-23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책, 울언니 생일에 선물로 보내고 저도 한권 샀는데, 아직 못 읽었어요.
님의 서평으로 잔잔한 감동을 받고 갑니다!

세실 2007-12-24 00:24   좋아요 0 | URL
글 날라갈까봐 자동저장기능이 있음에도 저장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하는 와중에 오셨군요. 헤헤 미완성이었는데..... 님도 분명 즐겁게 읽으실 책이랍니다~

바람돌이 2007-12-23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박완서님의 책이었군요. 참 대단한 분이세요.
근데 전 제가 마흔아홉이 되어도 겨우 중학생일 아이들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오는군요. ㅎㅎ

세실 2007-12-24 00:27   좋아요 0 | URL
멋진 분, 대단한 분이시죠. 소설임에도 끝없는 깊이가 느껴집니다.
ㅎㅎㅎ 예린이, 해아의 사춘기를 함께 치르셔야 겠군요.
그때 약 올리면 돌 날라 오겠죠?

책읽는나무 2007-12-24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의 글도 참 좋아요.
아~ 읽고 싶어지네요...읽을책들이 자꾸만 쌓여갑니다..ㅡ.ㅡ;;

세실 2007-12-25 01:2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읽을 책은 많고 정작 읽을 시간은 적고....
맘은 2박3일 떠나고 싶을뿐입니다. ㅎ (물론 저 혼자만의 여행)

소나무집 2007-12-24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저도 감동 푹 받았답니다.
박완서 선생을 늘 좋아했지만 이 책 읽으면서는 노년의 작가가 아름답게가지 느껴졌지요.
어찌나 솔직한지, 그 솔직함들에 깜짝 놀라기까지 했어요.
유명한 이름값에 감추고 싶은 것도 있었으련만...그쵸?

세실 2007-12-25 01:26   좋아요 0 | URL
그쵸? 노년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책입니다. 어쩜 이리도 완숙미가 느껴질까요.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필체. 대단한 분입니다. 맞아요. 참 솔직하시죠. 헤헤~~

Kitty 2008-07-22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이 책 읽고 완전 감동먹었어요 ㄷㄷ
독자의 나이와 관계없이 이렇게 공감가는 책을 쓸 수 있다니 박완서 선생님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