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실제로 무엇인가를 하는 녀석에겐 그 녀석밖에 알지 못하는 것일 있을지도 모르지.-144쪽
<부초>를 처음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한수산에 대한 전작주의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찻잔>은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매니아들은 쌍수 들어 환영할 책. 그런데 한수산의 책은 어쩐지 죄다 표지에 얼굴이 떠억 하니 박혀 있다. 나는 한수산이 트렌치코트 입은 모습이 매우 좋다. 기왕이면 얼굴만 박지 말고 전신 사진으로 부탁합니다. 트렌치코트 입은 모습으로다가.
이상하게 김연수도 그렇고 한수산도 그렇고, 이제는 큰 기대감이 없는데도 책은 꾸준하게 사게 된다. 책보다는 사람이 좋아 그런가 보다.
다 큰 남자가 다 큰 남자답지 않을 때 그는 여자에게 지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49쪽
고무신을 꿰어 놓은 듯한 보트들-57쪽
"선생님이 모르시는 거예요. 여자는 그래요. 여자야말로 나이에 의해서 어른이 되지 않아요. 여자는 어쩌면 처음부터 어른인지도 몰라요.""남자는 그럼 끝까지 어린앤가?""하여튼 제 말은요... 어떤 나이어린 여자도 나이든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얘기예요."-133쪽
루마니아의 '루미트루 트제펜에그'의 말이 생각났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가.'부부란, 방안에 들어온 모기가 아무도 물지 않고 나가 버리기 보다는 서로 자기의 상대방을 물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방안에 들어온 것이 맹수일 때는 한사코 서로를 보호해 주려 한다.'-167쪽
"괜찮아 아프지 않았어.""아파야 하는데."-187쪽
"선생님, 등 따스해요?""등?""네. 등이 따스하냐고요?"윤세는 고개를 저었다."그렇구나. 누굴 안는다 해도 가슴은 따뜻할 수 있어도 등은 추운거구나. 제가 등을 따스하게 해 드릴게요."-205쪽
등. 등이렸다. 그랬지. 현지가 그랬어, 선생님 등을 따뜻하게 해 드리려고 털조끼를 짰다고 했겠다, 점입가경이지. 그렇지 않구. 털옷을 짜주는 여자애와 그걸 돌려보낸 사내놈이라니... 임마, 현지 너 이걸 알아애 햐. 모든 사람은 다 등이 시려운 거야. 등이 시려운 걸 얼마나 잘 참아내느냐 그게 바로 인생을 사는 길이야. 누굴 바라보아도, 누굴 껴안아도 각자는 언제나 비어 있는 차가운 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거야.-212쪽
어디에서 읽었었나, 누군가에 들었었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단편 중의 최고는 단연코 보르헤스의 픽션들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헌책을 산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들고 있었다. 그만큼 진도가 쉬이 안 나갔다는 얘긴데...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혹은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 만큼 나의 취향은 아니다. 보르헤스, 혀가 입 안에서 토르르 굴러갈 만큼 사랑스러운 이름이지만 나는 두 번 다시 보르헤스의 책을 들지 않을지도 몰라. 첫인상이 중요하듯 첫책도 중요한 법.
"어떤 단어를 강조하기 위한 가장 뛰어난 방법은 그것을 <영원히> 생략해 버리거나, 췌사적인 은유, 또는 뻔히 드러나는 우회적인 언어에 호소하는 방법일 겁니다."<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164쪽
물질적 세계가 정지해 버렸다.<비밀의 기적>-2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