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시스터즈 키퍼 - 쌍둥이별
조디 피콜트 지음, 곽영미 옮김 / 이레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남동생이 출장 때문에 올라와서 같이 저녁 먹으러 가는데 어무이한테 전화가 왔다.
택배로 <쌍둥이별>이라는 책이 한 권 왔는데 누구 거냐고.
나는 순간 옆에서 "내 꺼!"라고 외쳤고, 그 순간부터 그 책은 내 꺼.
언니나 남동생이 무슨 이벤트로 받은 책 같은데 알 게 뭐야, 내가 내 꺼라고 외쳤으니 내 꺼.
안 그래도 <마이 시스터스 키퍼> 영화로 보면서 줄줄 울다가, 나중에 원작소설 꼭 읽어봐야지 했는데. 
역시 가난뱅이라도 살아갈 구멍은 생기는 법. 럭키럭키!  

내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하니 Ryu가 한참동안 말이 없다.
아기다리고기다리다 물어보니,
"댄스파티에 다녀온 다음에 남자친구 전화가 없었는데 알고 보니 죽은 거였잖아. 그 생각 하고 있었어" 라는 감상적인 대답.
맞아. 우리 아마 그때부터 줄줄 울기 시작했지.

그 장면을 고대하며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두 살 때 백혈병을 선고받은 언니 케이트를 위해 태어난 맞춤아기 안나.
안나는 태어나자마자 제대혈을, 그 후에 백혈구와 줄기세포, 골수까지. 모든 것을 제공해야 했다.
더 빨리 더 많이 제공하기 위해 성장주사는 기본이고
케이트가 언제 응급상황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안나 역시 마음대로 캠프도 가지 못하는 신세.
그리고 열세살이 된 안나에게 부모님은 언니를 위해 신장을 이식하자고 말을 한다.
만약 신장을 이식한다면 그렇게도 좋아하는 하키도 마음대로 못 할텐데
부모님은 안나가 하키팀 골키퍼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된다.
어린 소녀 안나는 그래서 유능한 변호사 캠벨 알렉산더를 찾아가게 되고 그 때부터 갈등은 점점 심화.
그런데 결국 안나가 맹랑하게도 소송을 건 이유가, 언니를 위해서라는 게 밝혀지면서 또다시 눈물바람.

소설의 구조 또한 흥미롭다.
의료해방 소송을 거는 안나와 언니 케이트, 오빠 제시, 엄마 사라와 아빠 브라이언, 그리고 변호사 캠벨과 안나의 소송후견인 줄리아까지,
각자가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챕터 하나씩을 할당받아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는데, 각장의 입장이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
각자의 입장을 너무나도 잘 알겠어서 내 마음의 갈등도 사그러들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와는 판이하게 다른 결말 부분. 아아아.
영화에서는 케이트가 소원대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지만
소설에서는 안나가 의료해방 소송에서 승소한 후 켐벨 변호사와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뇌사판정. 이어지는 장기기증.
결국 안나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언니에게 소중한 신장을 기증하고 조용히 심장을 멈춘다.

이 부분, Ryu하고도 한참 설전을 벌였는데 물론 영화 쪽이 더 눈물샘을 자극하긴 하지만
나는 소설 쪽의 결말이 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태어날 때부터 언니를 위한 맞춤아기였던 안나는 결국 '임무수행'을 다 한 다음에는 조용히 죽는 건가.
언니를 건강하게 살려내고 할 일 다 했으니까 편안하게 가도 되는 건가....

미국에서는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엄청난 논란이 됐다고 하는데, 그럴만하다.
대한민국의 책 관련 프로그램에 만약 이 책이 여기 토론거리로 던져진다면 패널들은 무슨 말을 할까.
특히나 무심한 듯 시크한 탁석산 선생님의 의견이 듣고 싶다.
시골의사 박경철 씨도 패널로 나온다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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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시스터즈 키퍼 - 쌍둥이별
조디 피콜트 지음, 곽영미 옮김 / 이레 / 2008년 11월
구판절판


"부모는 어떤데?"
안나는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다.
"서커스에서 줄타기 곡예사는 관중들이 자신의 공연을 예술이라 믿어주길 원하지만,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저기까지 무사히 건너가기만을 바란다는 걸 아세요? 그거랑 비슷해요."-171쪽

"괜찮다면, 나도 마시고 싶은데."
그녀는 어깨를 으쓱한다. "스밀라에 있어."
물론, 냉장고겠지.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니까.-175쪽

태초에는 달과 해밖에 없었다. 달은 낮 동안에 나오고 싶었지만, 낮시간을 독차지할 것 같은 훨씬 더 밝은 놈이 있었다. 달은 허기지고 점점 홀쭉해져 끝내는 얇은 조각만 남았고, 양끝은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러다 우연찮게, 대부분의 일의 과정이 그렇듯, 달이 밤에 구멍을 뚫자 무수한 별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왔다. 겁이 난 달은 별들을 삼키려고 애썼다. 때때로 이것은 효과가 있었다. 달이 점점 뚱뚱해지고 둥글둥글해졌으니까. 그러나 대개는 효과가 없었다. 별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별들은 계속 나타나, 끝내는 태양이 질투를 할 정도로 하늘을 밝게 만들었다. 태양은 별들을 자신의 세계에 초대했고, 그곳은 늘 밝게 되었다. 그러나 태양이 별들에게 하지 않은 말은, 낮 동안엔 별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리석은 별들은 하늘에서 땅으로 뛰어내려 그 어리석음의 무게로 얼어붙었다. 달은 최선을 다했다. 달은 이 슬픔의 돌덩이들을 남자와 여자로 조각했다. 달은 여생을 다른별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감시하며 보냈다. 달은 여생을 자신이 남긴 조각들을 붙들고 있는 데 보냈다. -342쪽

엄마는 오랫동안, 안나가 엄마에게 돌아오곤 한다고 믿었다. 엄마는 그런 징후를 찾기 시작했다. 서둘러 꽃을 피운 식물에서, 노른자가 두 개 든 달걀에서, 글자 모양으로 뿌려진 소금에서.-5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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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지음 / 민음사 / 1997년 3월
평점 :
절판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워낙 훌륭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
나는 이 책 <선택> 또한 추후의 의심 없이 집어들었는데,
이건 아무리 이문열이 "반페미니즘 작품이 아닙니다" 라고 억울해해도 (실제로 억울해 할까 싶기는 하지만) 소용없겠다.
이문열은 이 작품을 반페미니즘적인 것으로 몰아간 것은 시비 붙이기를 좋아하는 대중 매체의 선동과
뭔가 요란스러운 일에 편승하기 좋아하는 '얼치기' 논객들의 합작이라고 작가 후기에서 말하고 있지만
정작 여성인 내가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하는 생각이 든다면
이문열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

엄청 똑똑하고 예쁘고 착하기까지 한 '엄친딸'이 있다고 치자.
이 엄친딸이 하던 공부 다 내팽개치고 아내와 사별한 한 홀애비에게 시집을 가는데
그 남자가 혹시라도 자기가 똑똑한 걸 눈치채면 불편해 할까봐, 그리고 그게 시댁에 누가 될까 봐 똑똑한 걸 애써 숨긴다.
뭐, 낭중지추라고 잘난 송곳은 주머니를 뚫고 나오게 마련이니 나중에야 자식들에게 그 똑똑함을 들키게 되지만
그 좋아하는 취미인 글쓰기와 그림 등은 몇십년간 손도 못 대고 살아가던 중,
남편은 돈벌이엔 관심없고 (이것도 워낙 부자이면 상관없으려나?)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 뭐한다 해서 산속으로 숨어버려서
수많은 식솔들을 엄친딸이 다 먹여 살리고 그것도 모자라 마을에서 굶는 사람들이 있으면 솥에 도토리라도 삶아서 다 나눠주고
그러면서 전처의 아이들도 엄청 잘 키우고 시부모 봉양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날 첫째 시아주버님과 둘째 시아주버님이 덜컥 세상을 떠버리네.
그리고 이 시부모란 사람들은 모르고 그랬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가문의 명예라고 생각해서 안 말렸는지
얼마 후 이들의 아내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네.
그러니 셋째 며느리였던 이 엄친딸이 졸지에 맏며느리가 되고 죽은 이들의 자식까지 떠맡고... 휴.
그러던 중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친정아버지는 이 엄친딸보다 어린 여자랑 결혼해서 또 애까지 낳는다. (누가 키우라고!)
그리고 엄친딸 정부인은 후대의 여성들에게 자신의 삶을 본보기 삼으라고 죽은 영혼이 되어 이야기해주는 것이 이 소설의 형식.
그런 박복한 삶을 어따 대고 본받으래요.

물론, 이문열 말대로 양반문화에 대한 적의에 대해 그 근거 없고 비뚤어짐을 따지자면 따로이 책 한 권이 필요할 것이며
그것은 이나라 대부분에게 자신의 뿌리를 부인하는 일이 되고 나아가서는 자기 정체성의 부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문열이 '얼치기'라고 비하하는 그 일반인들이
문학작품이나 영화, 드라마 등에 종종 등장하는 양반문화의 비합리성을 두고도 반페미니즘적 작품이니 뭐니 드잡이를 하진 않는다.
이문열 말대로 그건 우리의 과거고 뿌리니까.

그러나 이 책 <선택>은 시종일관 그런 비합리성을 본받으라는 여성이 나온다.
요즘 여자들은 남편을 너무 무시한다며 그러지 말라 한다. 좀 떠받들어 주란다.
이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꾸짖는 말투라니.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게 옳은 선택(이것도 자의적인 선택인지 관습에 의한 선택인지 알 수는 없지만)이었을지 몰라도
그때의 기준으로 지금을 사는 여성들을 '훈계'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발상 아닌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정씨부인의 입을 빌려 현대여성을 꾸짖고 싶어하는 이문열 자신의 모습 같기도 하고.  
영화 <왓 위민 원트> 같은 상황이 이문열에게도 일어난다면, 그때는 좀 생각이 바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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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지음 / 민음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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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제도를 만들고 거기 참여하는 본래의 뜻은 이내몸에 이로움을 얻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제도란 한번 만들어지면 자신의 생명과 운동 원리를 가지는 까닭에 언제까지고 그 이익이 개인의 이익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특히 제도가 자기 보존의 열정에 빠져 방어 본능을 한 권리로 휘두르기 시작하면 개인엑는 치명적인 억압 장치로 변질되기도 한다.-70쪽

"집안에 만권의 책이 있으면 문창성(文昌星)이 비치어 귀한 자손이 나고 대대로 글이 끊어지지 않는다 한다."-97쪽

하루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해가 지는 것이 세상의 끝이다. 그러나 긴 세월을 자기 것으로 품은 사람에게는 내일의 시작이다.-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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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네즈 - 제2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전혜성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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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엄마의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잔소리은행처럼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나에 대한 걱정거리들을 듣고 싶지 않아서인데,
전화를 안 받는 일이 반나절만 계속되면, 엄마 표현을 빌려 나는 정말 "쌀쌀맞은 년"이 되고 만다. 
참 이상하게도, 언니나 남동생에게는 물론 그 어떤 타인에게도 욕을 전혀 하지 않는 분인데
나한테는 "~ 하는 년" 이란 욕을 욕같지도 않게 종종 하는 엄마.
그러나 사실은 나처럼 고집 세고 못된 딸한테만 하는 애정표현이란 걸 나도 알고 있다.
언니는 부모님 입장에서는 정말 착한 딸이니까 욕먹을 일도 없고.

<마요네즈>는 그런 책이다.
애증의 모녀관계.
제일 좋은 친구였다가도 기분 안 좋을 땐 있는 성질을 다 부리고,
그랬다가도 밥상머리에 앉으면 기분이 풀려 버리는.

그런데 갑자기 드는 궁금증.
우리나라 출판가에서 종종 상종가를 치는 <아버지>나 <마요네즈>나 <엄마를 부탁해> 같은 책
미국에서도 통할까? 이건 대한민국의 정서에만 맞는 장르(?)일까?
아는 미국인한테 물어보고 싶은데 아는 미국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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