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1997년 3월
평점 :
절판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워낙 훌륭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
나는 이 책 <선택> 또한 추후의 의심 없이 집어들었는데,
이건 아무리 이문열이 "반페미니즘 작품이 아닙니다" 라고 억울해해도 (실제로 억울해 할까 싶기는 하지만) 소용없겠다.
이문열은 이 작품을 반페미니즘적인 것으로 몰아간 것은 시비 붙이기를 좋아하는 대중 매체의 선동과
뭔가 요란스러운 일에 편승하기 좋아하는 '얼치기' 논객들의 합작이라고 작가 후기에서 말하고 있지만
정작 여성인 내가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하는 생각이 든다면
이문열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

엄청 똑똑하고 예쁘고 착하기까지 한 '엄친딸'이 있다고 치자.
이 엄친딸이 하던 공부 다 내팽개치고 아내와 사별한 한 홀애비에게 시집을 가는데
그 남자가 혹시라도 자기가 똑똑한 걸 눈치채면 불편해 할까봐, 그리고 그게 시댁에 누가 될까 봐 똑똑한 걸 애써 숨긴다.
뭐, 낭중지추라고 잘난 송곳은 주머니를 뚫고 나오게 마련이니 나중에야 자식들에게 그 똑똑함을 들키게 되지만
그 좋아하는 취미인 글쓰기와 그림 등은 몇십년간 손도 못 대고 살아가던 중,
남편은 돈벌이엔 관심없고 (이것도 워낙 부자이면 상관없으려나?)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 뭐한다 해서 산속으로 숨어버려서
수많은 식솔들을 엄친딸이 다 먹여 살리고 그것도 모자라 마을에서 굶는 사람들이 있으면 솥에 도토리라도 삶아서 다 나눠주고
그러면서 전처의 아이들도 엄청 잘 키우고 시부모 봉양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날 첫째 시아주버님과 둘째 시아주버님이 덜컥 세상을 떠버리네.
그리고 이 시부모란 사람들은 모르고 그랬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가문의 명예라고 생각해서 안 말렸는지
얼마 후 이들의 아내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네.
그러니 셋째 며느리였던 이 엄친딸이 졸지에 맏며느리가 되고 죽은 이들의 자식까지 떠맡고... 휴.
그러던 중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친정아버지는 이 엄친딸보다 어린 여자랑 결혼해서 또 애까지 낳는다. (누가 키우라고!)
그리고 엄친딸 정부인은 후대의 여성들에게 자신의 삶을 본보기 삼으라고 죽은 영혼이 되어 이야기해주는 것이 이 소설의 형식.
그런 박복한 삶을 어따 대고 본받으래요.

물론, 이문열 말대로 양반문화에 대한 적의에 대해 그 근거 없고 비뚤어짐을 따지자면 따로이 책 한 권이 필요할 것이며
그것은 이나라 대부분에게 자신의 뿌리를 부인하는 일이 되고 나아가서는 자기 정체성의 부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문열이 '얼치기'라고 비하하는 그 일반인들이
문학작품이나 영화, 드라마 등에 종종 등장하는 양반문화의 비합리성을 두고도 반페미니즘적 작품이니 뭐니 드잡이를 하진 않는다.
이문열 말대로 그건 우리의 과거고 뿌리니까.

그러나 이 책 <선택>은 시종일관 그런 비합리성을 본받으라는 여성이 나온다.
요즘 여자들은 남편을 너무 무시한다며 그러지 말라 한다. 좀 떠받들어 주란다.
이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꾸짖는 말투라니.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게 옳은 선택(이것도 자의적인 선택인지 관습에 의한 선택인지 알 수는 없지만)이었을지 몰라도
그때의 기준으로 지금을 사는 여성들을 '훈계'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발상 아닌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정씨부인의 입을 빌려 현대여성을 꾸짖고 싶어하는 이문열 자신의 모습 같기도 하고.  
영화 <왓 위민 원트> 같은 상황이 이문열에게도 일어난다면, 그때는 좀 생각이 바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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