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지식여행자 8
요네하라 마리 지음, 조영렬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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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죽고 없는 작가의 작품을 전부 읽겠다는 전작주의 다짐은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다.
조급한 마음에 몰아서 다 읽어버리면, 그 후 남게 될 텅 빈 시간을 메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06년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요네하라 마리의 책도, 그래서 읽기가 더 망설여졌는데...
<미식견문록>도 그렇고, 이번에 나온 <문화편력기>도 그렇고, 신간은 계속 쏟아져나오는구나-
물론 그간에 다른 매체에 기고했을 글들을 묶어서 편집해 내놓은 것이겠지만,
일단 마리 여사의 책이라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다.

역시나 내용은, 유쾌한 지식여행자인 마리 여사답게 신랄하면서도 따뜻하고 유머가 숨어 있다.
일본과 러시아의 언어에 능통한 만큼, 그 둘을 비교하고 분석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몰랐던 문화에 대해 '이게 이런 거란다' 하고 풀어서 말해주는 솜씨도 여전하다(?).
아는 걸 쥐어짜내서 말해준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몸으로 습득한 것들을 조근조근 말해주는 타입이어서
듣는 이도 '잘난 척 하시네'라는 콧방귀 뀔 일 없이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이런 지식인의 글쓰기 기법, 우리나라 문인 중에도 있던 것 같은데
제일 처음 생각난 건 전혜린.
하지만 그녀가 낸 책은 달랑 에세이 두 권이니 요네하라 마리의 다작과는 조금 다른 것 같고 
그렇다면 이윤기?
그리스신화 쪽으로는 이만한 이야기꾼이 없고, 서구 문화에도 정통하니 얼추 비슷한 느낌이다.
게다가 요네하라 마리와 이윤기 둘 다, 아는 게 너무 흘러넘쳐 어쩌지 못해 책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혜린과 이윤기 모두 번역자라는 점도 공통분모인데...
하지만 뭔가 미진한 구석이 있어 계속 곰곰 생각하다가 번뜩 머리에 들어온 인물은 바로 홍승면!




1927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해 언론 쪽에서 일하면서 미국 스탠퍼드 대학으로 유학도 갔다온 그 시대의 엘리트.
일단 엘리트라는 점에서 교집합 하나 생기고.
명칼럼니스트라는 면에서 그야말로 찰떡같이 착착!

홍승면이 지은 책으로는 <프라하의 가을>, <백미백상>, <잃어버린 혁명> 등이 있는데
내가 가진 건 백미백상 시리즈인 <대밭에서 초여름을 씹다>와 <꿈을 끼운 샌드위치>.
감히 말하건대, 외국물 조금 먹은 어린 아가씨들이 요즘 너도 나도 내놓는 음식 관련 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마리 여사와 마찬가지로, 잘난 체 하는 기색 없이 이런 저런 먹을거리들에 대해 얘기해 주는데
정약전의 자산어보부터 그 시절에 아직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았을 미지의 음식까지-
인터넷도 없었을 텐데 이런 방대한 정보는 도대체 어디에서 얻었을까 하는 경이로움마저 드는 책이다.
우리언니가 우체국쇼핑의 특산물을 소개하는 라디오방송에 매주 게스트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 책에서 꽤 많은 정보를 인용해서 원고를 쓰곤 했었다. 인터넷보다 가히 한 수 위라는 얘기.
마리 여사와 홍승면 씨가 만나서 입심 대결, 아니, 필력 대결이라도 한 판 했으면 좋았을 텐데...
둘 다 이 세상에 없으니 나 혼자 상상으로만 할 수 있는 한판승부.

다시 마리 여사 책 얘기로 돌아와서, 이번 신간이 5% 정도 아쉬운 점 하나.
읽으면서 계속 "이런 얘기는 미식견문록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냐?"
혹은, "이런 얘기는 미녀냐 추녀냐에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10번쯤 들었다.
심지어 맨 뒤에는 <프라하 소비에트 소녀들, 그 인생의 궤적>이라는 대담까지 들어가 있으니
<미식견문록>과 <미녀냐 추녀냐>와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읽은 독자에게 상으로 주는 별책부록의 스멜까지....!
다른 책을 다 엮고 난 뒤 자투리로 남는 글들을 모아서 편집했으니 출판하는 쪽에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음식 얘기도 들어있고 통역 얘기도 들어 있고 프라하 얘기도 들어있어서
제목을 <문화편력기>라고 애매하고도 모호하게 지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뭐, 마리 여사에게 원고를 다시 부탁할 수도 없으니 출판사나 독자나 아쉬운 건 마찬가지. 

이렇게 말해놓고도 나는 마리 여사의 신간이 나오면 또 승냥이처럼 돌변해서 읽을 날만 고대하겠지요.
아껴 읽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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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지식여행자 8
요네하라 마리 지음, 조영렬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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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나 허구를 꽃에 견주는 습관은 일본에도 있다. 대표적인 것은 "꽃보다 경단" (하나요리 단고. 우리 속담 '금강산도 식후경'에 해당한다. '꽃보다 남자'의 일본 원작 제목은 '하나요리 단시'다. '하나요리 단고'를 염두에 둔 일종의 말놀이로 짐작된다) 이라는 속담이리라. 풍류보다는 실리를, 겉보기보다는 내실을 추구하라는 관용구다.-29쪽

"정말이에요. 이야기 덕분에 살아남았답니다, 우리는."
강제수용소 생활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하루 열두 시간에 이르는 가혹한 중노동도, 견디기 어려운 겨울 추위도, 벼룩과 이가 우글거리던 비위생적인 불결함도, 날이면 날마다 말라비틀어진 검은 빵 한 조각과 묽은 수프만 달랑 나오는 빈약한 식사 때문에 늘 배고팠던 일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들은 무섭게 고통스러웠디만, 그런 와중에도 인간에게는 어찌되었든 살려는, 살아남으려는 힘이 솟아오르는 법이랍니다."
기력의 뿌리가 잘려 고통스러운 와중에 그나마 남아 있던 기운을 무참히 앗아갔던 것은, 라디오와 신문은 물론 가족과 주고받는 편지에 이르기까지 외부 정보를 완전히 차단당한 일, 그리고 무엇보다 책과 필기도구 소지를 금지당한 일이었다.-70쪽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라고 갈리나는 말한다. 마치 "가축 같았다"고. 체포될 당시 그녀는 철도대학의 학생으로 기사가 될 사람이었다. 인문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던 여성들이 어느 날 밤 기발한 해결책을 발견한다. 온종일 노동으로 지친 몸을 딱딱한 침대에 누인 깜깜한 막사 안에서, 배우였던 여죄수가 <오셀로>의 무대를 혼자서 모든 역을 맡아 재현한 것이다. 단 한 사람도 잠자리에 든 이가 없었다.
그 뒤로는 매일 밤 각자의 기억 속에 있던 책의 구절을 끄집어내 이러쿵저러쿵 서로 보완하면서 즐기게 된다. 예전에 읽은 소설이나 에세이, 시를 차례로 '독파'해간다. 그렇게 해서 통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멜빌의 <백경> 같은 장편 대작까지도 거의 문장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던 우리가 안나 카레니나를 동정해서 눈물을 플리고, 일프와 페트로프의 <열두 개의 의자>를 듣고 포복절도했다고는 믿기 어렵겠지요."-71쪽

'알랭 들롱의 식탁 매너가 너무나 완벽하다는 사실이 도리어 그의 태생이 비천함을 증명한다. 매너를 제 주머니 속의 물건을 다루듯 완전히 몸에 익힌 사람은 좀 더 편안한 법이다.'-132쪽

석간에 실리는 칼럼에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겠지만, 신문은 아침에 읽기에 딱 좋은 인쇄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활자 없이는 한시도 견딜 수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아침에 된장국을 먹으면서 혹은 커피를 홀짝이면서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을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아침이, 이제부터 세상이라는 '현실 세계'로 들어설 것을 일깨우는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신문은 그 현실 세계의 윤곽을 전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아침의 바이오리듬은 신문 이외의 인쇄물을 읽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시간을 적절하게 쓰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을까.-139쪽

"좋은 남편을 만나면 남편을 잃었을 때 엄청나게 불행하고, 나쁜 남편을 만나면 남편이 없어졌을 때 해방감이 엄청나다"-247쪽

요네하라 : 체코인을 생각하면 대하소설적인 것, 거대한 로망은 싹트지 않은 것 같습니다. 블랙 유머 같은 것은 매우 뛰어납니다만, 주관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서정에 몸을 맡기는 것이 불가능한 민족입니다.
이케우치 : 확실히 체코의 대하소설 같은 것은 읽은 적이 없네요. 끊임없이 줄줄 말하는 일은 하지 않지요. 반면에 풍자극 같은 것은 정말 재미있고, 솜씨가 좋아요.-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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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웨슬리
스테이시 오브라이언 지음, 김정희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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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면 올빼미지 가면올빼미는 또 뭐야.
오리너구리 같은 건가, 하고 구글 이미지를 검색해보니, 옴마야! 책 표지 그림과는 많이 다르다.
역시나 상상과 현실간의 간극은 너무나도 큰 법.

 

하지만 이 가면올빼미에게서 메이플 시럽 향 같기도 하고 버터스카치 향 같기도 한 황홀한 냄새가 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여자는 후각에 약하니까.
그래서 아이리스에서 김소연은 이병헌이 타준 버터커피에 껌뻑 넘어갔는지도 모를 일.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스테이시 또한 이 활홀한 체취에 매료되어 쥐가 주식인 동물을 키울 수 있었으리라.
하루에도 몇 마리씩 냉동된 쥐를 꺼내서 전자렌지에 해동해서 휙- 던져주면
통째로 삼키고선 나중에 고양이가 헤어볼을 뱉듯 쥐의 잔해만 동그랗게 뱉어내던 웨슬리.
먹는 게 그 사람을 만든다는데 어떻게 쥐를 먹는 올빼미의 냄새가 황홀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돼지한테도 누린내 나지 말라고 녹차 먹여 키우는 거 아니었나? (웬 삼천포.)
생물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전혀 그 원인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웨슬리는 스테이시가 주는 쥐를 받아먹고 평생을 함께 살아간다.

이 책을 북크로싱해주신 카이님은 마지막 부분에 웨슬리가 스테이시의 품 안에서 고개를 떨구며 죽어가는 장면이 너무나 감동적이라며
손수 책  페이지까지 접어서 주셨는데, 나는 그 전에 나온 둘의 포옹 장면에서 그만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말았다.
외로운 스테이시를 위로해 주듯, 침대에 함께 누워 날개로 감싸 안아주던 웨슬리.
과학적으로 보자면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웨슬리는 자기 몸도 아프면서 어떻게든 위로를 해주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뇌종양 때문에 아픈 스테이시를 살아있는 마지막 힘까지 짜내 위로해 준 뒤에야 그녀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둔다.
웨슬리가 얼마나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단지 살아있음으로 위로해 주려고 했었는지는
수의사가 사망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간단한 테스트를 한 후에야 밝혀지게 된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 수 있었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가요. 살아 있는 세포조직이 하나도 없어요. 전신에 암이에요. 모조리요.
당신은 인간으로서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암에 대해서는 당신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리고 웨슬리의 죽음 후.
스테이시는 마치 잭 케루악에게 빙의라도 된 듯 3주 만에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하게 된다.
잭 케루악이 36미터짜리 종이 위에 <On the Road>를 3주 만에 쉴 새 없이 타이핑한 것처럼 그렇게 뭔가에 홀린 듯.

역시 폭풍처럼 쓴 글은 폭풍처럼 읽히는구나.
웨슬리 냄새가 맡고 싶어 스카치 캔디라도 사먹으며 외로움을 달래보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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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웨슬리
스테이시 오브라이언 지음, 김정희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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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면올빼미들이 그렇듯이, 이 새끼 올빼미에게서도 메이플 시럽 향 같은 체취가 풍겼다. 하지만 지나치게 달콤하지도 않고, 오히려 편안한 베개에서 나는 버터스카치 향과 비슷했다. 캘리포니아 공대의 많은 생물학자들이 그 부드럽고 달콤한 체취에 매료되었다. 그 냄새는 진정 황홀했다.-10쪽

"스테이시, 나는 너희 할아버지가 내 땋은 머리를 자기 잉크병에 적셨을 때 그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알았단다. 4학년 때 내 뒷자리에 앉았었거든. 우리는 다른 사람하고 한 번도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어."-240쪽

어느 날 밤, 웨슬리를 옆에 두고 누워서 그의 날개 아래 부분을 마사지해 주고 있엇다. 어느 순간 웨슬리가 발을 밀더니 머리를 내 턱 아래 두고 내 가슴팍에 누워 졸리는 듯 부리로 내 목을 조금씩 물어뜯었다. 잠시 후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조금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우아한 황금빛 날개를 활짝 펼쳐 내 양 어깨를 감쌌다. 웨슬리는 그 자세로 오랫동안 잠을 잤고, 나는 그 순간 느꼈던 경이로움에 취해 한참을 깨어 있었다.
그것은 올빼미의 포옹이었다.-293쪽

나는 3주 만에 이 책의 초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깼다를 반복하며 몇 개월 동안 잠을 잤다.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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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파상 단편선 범우 사르비아 총서 637
기 드 D. 모파상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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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큐의 정우성 기자 덕분에 더 좋아져버린 범우사 문고본.
마침 용산뿌리서점에 갔다가 발견한 김에 몇 권 들고 왔다.

편의점에서 생수 사 마시듯 부담없이 사서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게 범우사 문고본의 최대 장점.
양장본은 지하철에서 들고 읽을 때 손목이 너무 아프단 말이지요.

이쯤 되면 테니스 선수에겐 테니스엘보가 오고, 주부에겐 팬엘보가 오듯, 독서가들에겐 북엘보가 올지도 모를 일.
범우사 문고본으로 미리미리 대비하세요.

들뜬 마음으로 책을 뒤적이다 머릿말부터 읽기 시작하는데, 처음부터 큰놈이 온다.
모파상 曰,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표현하는 데는 단 하나의 낱말밖에 없고,
그 움직임을 보이는 데는 단 하나의 동사밖에 없으며, 그것을 수식하는 데는 단 하나의 형용사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마침내 단 하나의 그 낱말, 그 동사, 그 형용사를 발견할 때까지 찾아내야 한다..."

쿵...! 마음에 울림과 함께 죄책감이 피어오른다.
나는 이제껏 "바로 그 낱말"이 생각나지 않아 얼마나 다른 '쉬운 단어'로 대체하며 살아왔으며
심지어 맞춤법이 순간적으로 애매모호할 경우에조차 별다른 고민 없이 다른 '아는 단어'를 갖다 썼는가.
외국어일 경우엔 더 심했다. 더 좋은 바로 그 낱말을 찾지 못해 중학생용 단어로 연명해 온 나의 십수년.
시간절약을 핑계로 아무 낱말, 아무 동사, 아무 형용사나 홀랑홀랑 가져다 쓰다니...
나는 좀 더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한다.

아쉬운 건, 모파상이 선택한 '바로 그 낱말'들이 원래는 프랑스어라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번역자 뿐이라는 사실.
못 배운 게 한이다.

모파상의 단편선에는 누벨(nouvelle)과 꽁트(conte)가 있는데
"이런 게 진짜 꽁트였지" 라며 무릎을 탁 칠만한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얼마 전에 읽었던 <소설 이외수>라는 되도않는 꽁트집은 모파상이 겨울에 글 쓸 때 난로 땔감용으나 주면 큰 영광일 듯.

단편선 중 특히 대단했던 건 데뷔작인 <비계 덩어리>다.
1880년에 선배인 에밀 졸라가 주관하는 소설집 <메당의 저녁>에 발표하면서
모파상을 일약 문단의 스타로 만들어 줬던 작품인데, 그의 스승인 플로베르도 감탄했을 정도.

이야기는 전쟁이 한창이던 겨울, 한 합승마차에서 시작된다.
모두 열 사람이 탄 마차에서 단연 시선을 끄는 건 '매춘부'라는 수군거림을 듣는 여자 '불 드 쉬프'.
직역하자면 '비계 덩어리'란 뜻인데 이 별명이 너무나도 걸맞게 몸집은 작고 모든 것이 동글동글하며
살찐 손가락은 마치 짤막한 소시지를 염주에 꿰어놓은 듯한 여자다.
그러나 44 사이즈라야 환영받는 2009년 대한민국은 아니었던지라
이 여자의 터질 듯한 싱싱함은 남자들에게 그런대로 인기가 있었던 모양.
윤기 흐르는 피부에 빨간 사과 같은 얼굴, 큰 가슴, 멋진 속눈썹을 가진 불 드 쉬프를 질투하던 여자들은
눈빛만으로 내통해서 불 드 쉬프를 은따시기기에 이른다.
그러는 와중에도 마차는 너무나도 느려터져서 목적지까지 갈 길은 멀었고 전쟁 때문에 겁먹은 장삿꾼들은 식당 문도 열지 않아서
마차에 탄 모두가 배고픔 때문에 체면까지 잃을락말락하던 바로 그 때! 비계덩어리 불 드 쉬프가 혼자서 식사 바구니를 꺼낸다.
흰 수건으로 덮인 바구니 안에 들어 있는 건 젤리에 절인 두 마리의 영계와 빵, 종달새 파이, 퐁레베크 산 치즈, 포도주 등등등..
혼자 먹기 미안한 불 드 쉬프는 마차 안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권하고 모두들 마지못한 듯 음식을 받아먹으며 말을 섞게 된다.
그러다가 불 드 쉬프의 여장부같은 기질을 칭찬하기까지 하며 그야말로 화기가 애애하더라...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가까스로 당도한 여인숙에서 사건은 터지고야 만다.
먼저 묵고 있던 프러시아 장교가 '불 드 쉬프'가 자기랑 잠을 자주지 않으면 출발 허가증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린 것.
당연히 우리의 귀여운 비계덩어리 불 드 쉬프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노발대발하고 사람들도 이에 동조해 주지만
며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창녀 주제에 잠 한 번 자 주는 게 뭐가 어때서" 라며 은근히 그녀를 종용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결국 '그' 밤이 지난 후 다음 날 아침. 마차에 다시 오르는 불 드 쉬프는 모두에게 투명인간이 되어버린다.
며칠 전만 해도 그녀의 식사바구니 덕분에 은혜를 입었던 이들이 이제는 마치 그녀에게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은 양 못 본 체 해 버리는 거다.
심지어는 밥도 자기들기리만 먹고. 아, 먹는 것 가지고 치사하게.
온몸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울음을 참던 우리의 비계덩어리 불 드 쉬프 양은 어린애처럼 울음을 삼키고 마차는 여전히 덜컹덜컹.
이런 그녀를 보고도 마차 안의 사람들은 "부끄러워서 우는 거예요" 따위의 말들이나 주고받고.
필요악이 되어버린 비계덩어리는 울고 울고 또 울고.
생각이 많아지는 짧은 이야기.

이 단편 말고도 <목걸이>는 너무나도 유명하니까 일단 차치하고라도,
한 남자를 일생 동안 사랑하는 <의자 고치는 여인>,
무섭도록 호방하게 아들의 복수를 행하는 <야성의 어머니>,
웃을 수만은 없는 <걸인>,
사랑이 크냐 보석이 크냐를 생각하게 되는 <보석>까지
주옥같다. 역시 모파상이다.

하지만 역시나 모닥불에 얼굴 묻은 심정으로 고백하자면
"역시 모파상"이라고 엄지 세워놓고, 장편은 읽어본 적조차 없다.
하나 위안이 되는 사실이라면, 모파상의 문학적 진가는 장편보다는 단편이라는 것 정도?
 

장편 <여자의 일생>도 읽어야겠다.
단어 하나, 형용사 하나, 동사 하나, 허투루 읽지 않고 꼼꼼하게. 

 

참. 내가 가진 <모파상 단편선>은 93년 초판 6쇄본인데, 안에 남아 있는 흔적이 흥미롭다.

96년도에 명동에 있는 계성여고를 다니던 송숙현 양의 여름 보충수업비는 1만 5백원. 



그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

이 책 놓아두고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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