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해항로 민음의 시 161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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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시집을 읽었던 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지지난해(혹은 지지지난해) 만나던 남자한테 된통 뒤통수를 얻어맞고서
기형도의 시집을 무한반복 리핏해서 읽었던 게 그나마 가장 최근.
특히 <빈집>을 수도 없이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눈물이 솟구치는 바람에
아예 화장실 변기에 걸터앉아 타일바닥에 맘껏 눈물 뚝뚝 흘리며 읽었었다.
하지만 그 시를 하도 읽어서 줄줄 외우고 나니 미련도 뭣도 흔적 없이 사라지더라.
그래, 시의 순기능은 이런 것!

그 이후로 또 다시 시를 돌 보듯 하다가 최근에 읽어보기로 마음먹은 게 바로 장석주의 <몽해항로>.
장석주의 필력이야 익히 들어 알고는 있지만, 그의 책을 내 손에 잡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만보객 책속을 거닐다>도 어쩐 일인지 읽지 않았고.

그런데.

그의 시를 읽고 나니, 어쩐지 집 앞 포장마차에라도 가야 할 기분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아래의 문장들이 그 원흉, 

"한낮이 증발하고 후두두 작은 혀들이 내려온다...... 땅에 뛰어내린 혀들이 울먹이며 달려간다."
"그토록 사랑했던 건 당신의 영혼이 아니었어, 오, 그 허리!"
"구름은 만삭이다, 양수가 터진다."

아. 소주 한 잔에 문장 하나 안주 삼고, 또 한 잔에 소리내어 문장 읽으면
시 한 편에 소주 일곱 잔, 한 병은 순식간.
요즘 소주 도수가 낮아지는 바람에 주량도 덩달아 늘었으니
나는 시 세 편쯤은 읽은 후에야 비틀거리며 돌아올 수 있겠다.

묵직하게 침잠하듯 취하는 것.
이것도 시의 기능이라면 기능.

   

*** 나 아무래도 바보..  지금 생각해보니 장석주의 <만보객 책속을 거닐다>는 2009년 4월에 이미 읽었었다. 기록해놓지 않았으면 정말 평생 안 읽은 줄 알았을 텐데...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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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잎새 외 - 범우사루비아문고 106
0. 헨리 지음 / 범우사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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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살면, 물건 값이야 누가 치르든, 사치가 자연히 몸에 배게 마련이다.

<잘 손질된 등불>-72쪽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맺어져야 할 것이다. 독자인 여러분만큼이나 나도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러나 진실을 찾으려면 우물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황금의 신과 사랑의 신>-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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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날의 파스타 - 이탈리아에서 훔쳐 온 진짜 파스타 이야기
박찬일 지음 / 나무수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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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처음 만날 땐 식당 정하는 게 곤욕이다.
평소에 감자탕이나 삼겹살을 즐겨 먹긴 하지만 남자 앞에서 돼지뼈를 쪽쪽 빨 수도, 입 쩍 벌리고 상추쌈을 우겨넣을 수도 없다.
고등학교 때는 햄버거집에서 소개팅을 한 적도 있는데
소스 잔뜩 묻은 양상추가 줄줄 흘러내려 깔끔하게 먹는 데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었다.
(그 남자애, 내가 흠모했던 우리학교 화학 선생님 아들이었는데 부전자전이 아니어서 참 실망이었지...)
이쯤 되면 처음 만나 만만하게 가기 좋은 식당은 대부분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가격도 적당하고, 포크에 돌돌 말아 먹으면 꽤 예쁜 척 먹을 수도 있고, 뭐 그냥 만만하달까.

사실, 욕심만 버린다면 만드는 것도 꽤 수월하다.
M양과 뉴욕에 있는 2달여 동안 우리의 아침은 거의 언제나 파스타였는데
(슈퍼마켓에서 파스타면은 늘 세일중이라....ㅠㅠ)
올리브유에 마늘과 양파 넣어 달달 볶아서 마늘향과 양파의 단맛을 뽑아내고 닭가슴살 넣어 더 볶아준 다음
여기에 생크림 넣어 졸이면서 브로콜리랑 올리브 넣고 마지막으로 면 넣어 휘휘 섞어주면 땡!
가끔은 시판 토마토소스를 사다가 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냉동 미트볼을 잔뜩 넣어 만들기도 했다. 
여기에 토마토랑 샐러리, 레몬, 그리고 올리브를 잔뜩 넣은 샐러드까지 먹으면 아침부터 배가 뻥!
여기, 주말 벼룩시장에만 가도 신선한 올리브가 잔뜩이고 동네에도 올리브 가게가 있어서 참 행복했는데.
M양은 지금까지도 같이 파스타 먹으러 갈 일만 생기면 "너도 이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라며 비행기를 태워주곤 한다.
ㅋㅋ 내 입맛에 길들여진 게지.  

 



요게 바로 우리를 미국돼지로 만들어줬던 파스타의 실체.
나는 요리사, M양은 설거지꾼이었다.

 
그런데 요놈의 파스타가 만들어 보고 먹어 보고 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게 된다.
이걸 넣으면 어떨까, 저걸 넣으면 어떨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게 되는 것.
우리나라 비빔밥처럼 파스타 또한 변주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의 나래를 직접 펼쳐보이는 사람이 바로 박찬일 셰프가 아닌가 싶다.
박찬일 셰프가 있는 논현동 누이누이에 갔는데, 동행한 ㅁㄹ양이 주문한 까르보나라 접시를 보고 그야말로 깜놀!
면 위에 살포시 놓인 건 혹시 '수란'? (사진은 엄써요)
"까르보나라=크림파스타"라는 잘못된 공식을 깨우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
여기는 소스에 계란노른자를 섞은 건 물론 수란까지 얹어준다.
온몸으로 "나 계란 들어간 까르보나라다!"라고 외치는 모습.
한 입 먹어봤는데 끈적끈적 맛있다.
내가 주문한 봉골레는 먹고나면 입술이 미끈미끈.
질좋은 올리브유를 잔뜩 썼나봐 하면서 조개 하나하나 알뜰히 빼먹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제일 빨리 먹었어... ㅠㅠ 
광화문의 줄서서먹는 파스타집 "뽐모도로"에 익숙해져서 요 정도 양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란 말이다.

 이날은 사실 알라딘에서 주최한 <저자와의 만남> 행사였기 때문에 먹고 나서 박찬일 셰프와의 대화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최근 '파스타'라는 드라마가 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극중 이선균이 박찬일 셰프 아니냐, 하는 질문을 많이 한다는데
자기를 모델로 한 건 아니지만 자신의 모습과 스승 주세페의 모습을 절반 정도 섞어 놓은 모습과 비슷하다며 대화 스타트.
그렇지만 자기는 주방에서 절대 욕하지 않는다고 껄껄껄. 그렇게 하면 다들 도망간다나.
나는 사실 '파스타' 할 시간에 '공부의 신'을 보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뭐.
(내가 공부의 신 본다면 다들 의아해하던데 나는 학원물이 정말 좋다.
반올림도 한 회도 안 빼놓고 봤을 정도. 게다가 육남매의 귀염둥이 두희가 나오잖아, 끼욜 >o< !!!)

어쨌거나 커피와 와인과 티라미수까지 짭짭대며 시종일관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된 만남.
질문시간을 갖길래 아까의 그 독특한 까르보나라에 대해 손 반짝 들어 물어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림파스타와 까르보나라가 동일어인 줄 알다가
인터넷과 <보통날의 파스타> 책을 통해 '진짜' 까르보나라는 계란 노른자로만 만든다는 걸 알았는데
셰프님은 이탈리아 현지의 까르보나라와 한국인이 좋아하는 크림소스 흥건한 까르보나라 중에서 어떻게 타협을 하셨는지,
혹시 아까 까르보나라 위에 올라가 있던 수란 역시 그 타협점의 한 방안인지...
바통을 이어받을 새도 없이 단번에 날아온 셰프님의 답변은 "수란은 창의적인 거다".
창의력을 발휘해서 그냥 한 번 올려본 거라고.
그리고 당연히 한국사람 입맛에 맞춰야 했단다. 왜, 손님들에게 돈 받고 팔아야 했으니까.
그의 지인 중 한 명은 계란노른자만 들어간 '진짜' 까르보나라를 너무 궁금해 해서 한 번 만들어주기도 했다는데
절반도 못 먹고 포기를 선언했을 정도라고.
게다가 원래는 베이컨이 아니라 돼지볼살(?)이 들어가야 한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거의 '돼지머리' 통째로 소비되기 때문에 가능한 선에서 합의를 봤다는 얘기.
옆 테이블의 다른 분께서는, 셰프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파스타는 그럼 무어냐는 질문도 하셨는데
여기에도 가차없이 '알리오올리오'라는 명쾌한 답변을 해주셨다. 
이유는 만들어 먹기 간편하기 때문.
글도 시원시원 맛깔스럽게 쓰시던데, 요리도 호쾌하게 하시나 보다.
흥신소 통해서 주방에 CCTV 라도 달아볼까나.   

어쨌거나 나는 크록스를 신는 호쾌한 찬일 셰프에게 싸인도 받았다. 촌스럽지만.





책을 읽다 보면 중간중간 간단한 파스타 레시피도 나오는데 요게 참 쏠쏠하다.
특히 자취생에게 강추하는 걸인풍 참치파스타는 너무도 만만해서 아무때나 휘리릭 만들어 먹기 좋을 듯.
(만드는 법은 밑의 '밑줄긋기'에 인용해 놨다.)
앤쵸비 만들어 저장하는 법도 나왔는데, 멸치 손질하는 게 어렵다는 얘기를 또 어디서 주워들어서 좀 망설여지는 중.
그렇지만 앤쵸비 통조림은 정말 쬐끔 든 주제에 너무 비싸기 때문에 정말 한 번 만들어볼까 엉덩이가 들썩인다.

이 모임 이후에 저녁에 여의도에서 추적 동갑내기 모임이 있었는데
독불장군 K 양 때문에 또다시 파스타를 먹었다는 건 나만의 슬픈 이야기 ㅋㅋ
여기에서도 까르보나라 시켰는데 역시, 음, 아까완 다르군.
해물샐러드는 엄청나게 맛있었지만.

그런데 셰프님, 파스타 칼로리는 괜히 말해주셨어요.
점심 저녁 두 끼를 모두 파스타 먹었더니 몸에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이 듭니다.
게다가 점심 후식으로는 티라미수, 저녁 후식으로는 까망베르 치즈케익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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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날의 파스타 - 이탈리아에서 훔쳐 온 진짜 파스타 이야기
박찬일 지음 / 나무수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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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맛있게 먹는 국수는 멸치 장국의 가는 물국수다. 간장 양념장을 얹어 한입 가득 넣으면 참기름의 고소한 향과 함께 국수가 입안에 꽉 차는 맛이 기막히다. 마치 질 좋은 풀 바디 와인처럼 말이다. 그 다음에는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조이는' 맛. 코와 혀가 감지하는 화학적 맛도 좋지만, 이런 '물리적' 맛 때문에 물국수, 그것도 한입 가득 넣어 먹기를 좋아하나 보다. -61쪽

나는 익힌 햄을 쓴 것보다 저민 프로슈토를 올린 파스타를 좋아한다. 이 파스타야말로 가장 이탈리아다운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슈토는 소금을 쳐서 시원하고 바람이 잘 부는 곳에서 천천히 맛이 든다. 돼지 뒷다리에서 은은한 향이 난다면 믿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잘 마른 프로슈토 한 점을 입에 넣어보시라. 그 맛은 신의 솜씨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 프로슈토는 인간의 솜씨가 아니다. 소금을 치고 그늘에 거는 건 인간의 몫이지만, 프로슈토의 맛을 결정하는 건 신이다.-130쪽

참치가 파스타와 만나면 다양한 변주가 이루어진다. 이른바 자취생의 파스타를 만들기도 하고, 최고급 파스타로 변신하기도 한다. 먼저 자취생의 파스타를 보자. 돈 없고 시간 없는 당신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멋진 스파게티다. 먼저 참치 통조림 작은 것 하나를 준비해서 마요네즈 두어 숟가락을 넣고 곱게 믹서에 간다. 후추나 좀 치면 그만이다. 그러면 준비 끝이다. 스파게티를 삶아 비비면 된다. 이렇게 간단한 파스타가 있다니 놀랄 일인데, 더 놀라운 건 맛이다. 입에 쩍쩍 붙는다고 할까. 참치의 고소한 향이 마요네즈의 유혹적인 부드러움과 합쳐져서 입 전체를 참치 향기로 가득 차게 한다.-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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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 폴란드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타데우쉬 보로프스키 외 지음, 정병권.최성은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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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제껏 폴란드의 문학을 접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고보니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바누아투나 마케도니아의 소설도 읽어본 적이 없구나.
직접 그 나라 땅을 밟아보진 못한다면 '책'으로 간접경험이라도 해야 하거늘.
이번에 창비에서 나온 세계문학 시리즈는 그래서 더 반갑다.
지금 나와 있는 건 영국, 미국, 독일,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프랑스, 중국, 일본, 폴란드, 러시아.
폴란드 읽고 나서 스페인도 읽어야지.
미국과 영국 편은 다 아는 작가들이니 좀 뒤로 미뤄두어도 괜찮겠다. 
(그런데, 이 시리즈 계속 나오는 건가요?)

많은 나라들 중에서도 특히 폴란드 편을 제일 처음 읽기로 결심한 건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라는 그로테스크한 제목 때문.
'가스실'이라면 죽음의 장소인 게 뻔한데 이렇게 정중한 문장으로 표현하다니.
이거 내공이 장난 아닌데, 하는 기대감이 독서욕을 자극했달까.
이 책에는 6명의 작가가 쓴 총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중 제일 울림이 컸던 것은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파문은 되돌아온다>와 마리아 코노프니츠카의 <우리들의 조랑말>.

<파문은 되돌아온다>는 외국에서 돈을 흥청망청 쓰던 망나니 아들이 직물공장 사장인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이 아들노무새끼가 외국에서 진 빚 때문에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대폭 삭감해서 원성을 산다.
임금 삭감뿐 아니라 그나마 없던 복지혜택도 싸그리 없어져 상주해 있던 의사와 간호사까지 해고를 하는데
야근에 철야까지 마다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자기 소유의 철공소를 차리는 게 소원이었던 한 선량한 남자가
피로감을 못 느껴 깜빡 정신줄 놓았다가 그만 기계에 팔이 잘려서 죽고 만다.
아이고, 때마침 의사만 있었어도! 아이고, 사장 아들놈이 외국에 빚만 지지 않았어도!!!!!
공장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마을사람들까지 이 아들노무새끼를 원망하지만,
그래도 그 공장 때문에 먹고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앞에서는 찍 소리도 못하고 살던 어느 날....
안 그래도 이 아들을 못마땅히 여기던 성품 곧은 판사와 아들 간에 사소한 말싸움이 붙어 결투를 하게 되는데,
결과는 뻔할 뻔자, 판사의 승리! 아들은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러자, 고슴도치 사랑이라도 이것 역시 진정한 부성애였던지라
공장 사장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신이 피땀흘려 세운 공장들을 싸그리 불태우고 만다.
이렇게 아들이 일으킨 파문은, 수면 가장자리의 극한까지 밀려갔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 왠지 교훈적이야.
역시나 급격한 산업화는 인간성의 상실을 불러일으키는 법.  

어린이 심리묘사의 백미로도 불린다는 <우리들의 조랑말>은 폴란드의 대표적인 여성시인이자 동화작가가 쓴 것.
그녀 자신도 여덟 명의 아이를 둔 어머니로서 어린이의 사회적 위상 정립에도 크게 기여했다는데
오오, 그렇다면 마리아 코노프니츠카는 폴란드의 방정환 쯤 되겠다.
이 단편의 주인공은 태어날 때부터 찢어지게 가난해서 그게 가난인지도 깨닫지 못하는 어린 삼형제.
어머니는 죽을동 말동 골골대며 아픈데 집에는 돈 한 푼이 없어
아버지는 집안의 물건들을 전당포 주인에게 야곰야곰 팔아서 약값을 댄다. 
의사는 집안을 따뜻하게 하고 고기 좀 먹이고 포도주도 좀 먹이라지만 에라이 더러운 세상, 약값 대기도 빠듯하다.
그래도 침대 팔고 이불 팔고 코트 팔고 해서 어찌어찌 석탄도 사고 수프거리도 사는데
이 철없는 삼형제는 이게 다 재미있기만 하다.
전당포 주인을 부르러 뛰어가는 것도 재미있고 살림살이 판 돈으로 오늘 저녁은 뭘 먹나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어 미치겠다.
그러나! 이 삼형제에게도 딱 하나, 팔기 아까운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조랑말.
거의 같이 자랐다시피 해서 눈빛만으로 통하는 조랑말인데 이 조랑말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팔 것이 없어지자 아버지는 이 눈멀고 늙은 조랑말을 헐값에 팔게 되는데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얼마 후 잠들듯 죽고 만다.
하지만 아직 죽음이란 게 뭔지 몰라 슬픔도 모르는 요 어린 것들은
팔았던 조랑말이 어머니의 시체를 싣고 가기 위해 집으로 온 게 기쁘기만 하다.
조랑말, 우리들의 조랑말, 우리 사라스러운 암조랑말~~~~!!!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구질구질한 빈민층 이야기일 뿐인데
아이들 입장에서 쓰니까 '가난' 이야기가 어쩐지 슬픈 비현실 같아서 가슴이 짠하다.

이것 외에도 어쩐지 수줍은 듯 에로틱한 상상이 펼쳐져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야로스와프 이바시키에비츠의 <빌코의 아가씨들>,
그리고 잔인한 제목에 처음 끌리고 사실적인 묘사에 진저리를 치게 되는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역시 훌륭했고
<파문은 되돌아온다>를 쓴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또 다른 단편 <모직조끼>는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의 비극 버전!!!

폴란드의 문학은 독일처럼 딱딱하고 철학적일 거라 오해했는데
가족간의 사랑, 애국심 같은 소재가 의외로 많다.
그러니까, 한국인의 정서와도 어느정도 통한단 얘기. 
게다가 끊임없이 외세의 점령을 받았고 정치적으로도 혼란했던 것 또한 동질감을 느끼기엔 충분한 조건.
책 뒷쪽의 해설을 읽어보니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래서 한국을 가리켜 '동방의 폴란드'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단다.
19세기 말에 한국을 방문하고 기행문을 썼던 폴란드 소설가 바츠와프 셰로쉐프스키도 이렇게 말했다지.
"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여! 너의 운명은 불과 얼마 전 나의 조국 폴란드의 운명과 너무나 비슷하구나."

그런데 폴란드 작가들 이름, 너무 어렵다.
100편쯤 읽어야 간신히 이름이 입에 붙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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