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 폴란드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타데우쉬 보로프스키 외 지음, 정병권.최성은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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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제껏 폴란드의 문학을 접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고보니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바누아투나 마케도니아의 소설도 읽어본 적이 없구나.
직접 그 나라 땅을 밟아보진 못한다면 '책'으로 간접경험이라도 해야 하거늘.
이번에 창비에서 나온 세계문학 시리즈는 그래서 더 반갑다.
지금 나와 있는 건 영국, 미국, 독일,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프랑스, 중국, 일본, 폴란드, 러시아.
폴란드 읽고 나서 스페인도 읽어야지.
미국과 영국 편은 다 아는 작가들이니 좀 뒤로 미뤄두어도 괜찮겠다. 
(그런데, 이 시리즈 계속 나오는 건가요?)

많은 나라들 중에서도 특히 폴란드 편을 제일 처음 읽기로 결심한 건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라는 그로테스크한 제목 때문.
'가스실'이라면 죽음의 장소인 게 뻔한데 이렇게 정중한 문장으로 표현하다니.
이거 내공이 장난 아닌데, 하는 기대감이 독서욕을 자극했달까.
이 책에는 6명의 작가가 쓴 총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중 제일 울림이 컸던 것은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파문은 되돌아온다>와 마리아 코노프니츠카의 <우리들의 조랑말>.

<파문은 되돌아온다>는 외국에서 돈을 흥청망청 쓰던 망나니 아들이 직물공장 사장인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이 아들노무새끼가 외국에서 진 빚 때문에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대폭 삭감해서 원성을 산다.
임금 삭감뿐 아니라 그나마 없던 복지혜택도 싸그리 없어져 상주해 있던 의사와 간호사까지 해고를 하는데
야근에 철야까지 마다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자기 소유의 철공소를 차리는 게 소원이었던 한 선량한 남자가
피로감을 못 느껴 깜빡 정신줄 놓았다가 그만 기계에 팔이 잘려서 죽고 만다.
아이고, 때마침 의사만 있었어도! 아이고, 사장 아들놈이 외국에 빚만 지지 않았어도!!!!!
공장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마을사람들까지 이 아들노무새끼를 원망하지만,
그래도 그 공장 때문에 먹고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앞에서는 찍 소리도 못하고 살던 어느 날....
안 그래도 이 아들을 못마땅히 여기던 성품 곧은 판사와 아들 간에 사소한 말싸움이 붙어 결투를 하게 되는데,
결과는 뻔할 뻔자, 판사의 승리! 아들은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러자, 고슴도치 사랑이라도 이것 역시 진정한 부성애였던지라
공장 사장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신이 피땀흘려 세운 공장들을 싸그리 불태우고 만다.
이렇게 아들이 일으킨 파문은, 수면 가장자리의 극한까지 밀려갔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 왠지 교훈적이야.
역시나 급격한 산업화는 인간성의 상실을 불러일으키는 법.  

어린이 심리묘사의 백미로도 불린다는 <우리들의 조랑말>은 폴란드의 대표적인 여성시인이자 동화작가가 쓴 것.
그녀 자신도 여덟 명의 아이를 둔 어머니로서 어린이의 사회적 위상 정립에도 크게 기여했다는데
오오, 그렇다면 마리아 코노프니츠카는 폴란드의 방정환 쯤 되겠다.
이 단편의 주인공은 태어날 때부터 찢어지게 가난해서 그게 가난인지도 깨닫지 못하는 어린 삼형제.
어머니는 죽을동 말동 골골대며 아픈데 집에는 돈 한 푼이 없어
아버지는 집안의 물건들을 전당포 주인에게 야곰야곰 팔아서 약값을 댄다. 
의사는 집안을 따뜻하게 하고 고기 좀 먹이고 포도주도 좀 먹이라지만 에라이 더러운 세상, 약값 대기도 빠듯하다.
그래도 침대 팔고 이불 팔고 코트 팔고 해서 어찌어찌 석탄도 사고 수프거리도 사는데
이 철없는 삼형제는 이게 다 재미있기만 하다.
전당포 주인을 부르러 뛰어가는 것도 재미있고 살림살이 판 돈으로 오늘 저녁은 뭘 먹나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어 미치겠다.
그러나! 이 삼형제에게도 딱 하나, 팔기 아까운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조랑말.
거의 같이 자랐다시피 해서 눈빛만으로 통하는 조랑말인데 이 조랑말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팔 것이 없어지자 아버지는 이 눈멀고 늙은 조랑말을 헐값에 팔게 되는데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얼마 후 잠들듯 죽고 만다.
하지만 아직 죽음이란 게 뭔지 몰라 슬픔도 모르는 요 어린 것들은
팔았던 조랑말이 어머니의 시체를 싣고 가기 위해 집으로 온 게 기쁘기만 하다.
조랑말, 우리들의 조랑말, 우리 사라스러운 암조랑말~~~~!!!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구질구질한 빈민층 이야기일 뿐인데
아이들 입장에서 쓰니까 '가난' 이야기가 어쩐지 슬픈 비현실 같아서 가슴이 짠하다.

이것 외에도 어쩐지 수줍은 듯 에로틱한 상상이 펼쳐져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야로스와프 이바시키에비츠의 <빌코의 아가씨들>,
그리고 잔인한 제목에 처음 끌리고 사실적인 묘사에 진저리를 치게 되는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역시 훌륭했고
<파문은 되돌아온다>를 쓴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또 다른 단편 <모직조끼>는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의 비극 버전!!!

폴란드의 문학은 독일처럼 딱딱하고 철학적일 거라 오해했는데
가족간의 사랑, 애국심 같은 소재가 의외로 많다.
그러니까, 한국인의 정서와도 어느정도 통한단 얘기. 
게다가 끊임없이 외세의 점령을 받았고 정치적으로도 혼란했던 것 또한 동질감을 느끼기엔 충분한 조건.
책 뒷쪽의 해설을 읽어보니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래서 한국을 가리켜 '동방의 폴란드'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단다.
19세기 말에 한국을 방문하고 기행문을 썼던 폴란드 소설가 바츠와프 셰로쉐프스키도 이렇게 말했다지.
"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여! 너의 운명은 불과 얼마 전 나의 조국 폴란드의 운명과 너무나 비슷하구나."

그런데 폴란드 작가들 이름, 너무 어렵다.
100편쯤 읽어야 간신히 이름이 입에 붙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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