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달간은 읽은 책을 쌓아만 두고

리뷰는 커녕 밑줄그은 것을 알라딘에 정리해놓지도 못했다.

이렇게 되면 뇌 속에서 쓩쓩 사라져 버릴 텐데.

하지만 과거는 과감히 놓아주기로 한 지금,

2012년 첫봄 3월에 읽은 책만 정리하기로.

 

 

제일 처음 읽은 책은, 알바니아 출신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장편소설 <부서진 사월>.

좋아하는 김진규 작가님의 추천으로 하룻밤을 꼬박 새며 읽은 책이다.

마지막까지 사랑하게 될지 안될지, 죽을지 안 죽을지 초조하게 쿵쾅거리는 바람에 혼났다.

맨 끝의 페이지를 펴보고 싶어서 손가락만 끼워놓고 책장을 열었다 놨다 맘고생도 꽤나 했던 책.

눈부신 사월에 피로 얼룩진 흰 셔츠가 바람에 날리는 상상 때문에 자꾸만 코를 킁킁거리게 된다.

어디선가 봄바람에 피냄새가 섞여들어올까봐.

 

두번째 읽은 책은 김연수의 <원더보이>.

그의 책은 나오는 족족 사보게 되는데, 나는 그의 작품보다는 어쩌면 그 자체를 은애하는지도.

100% 만족한 작품을 아직 찾지 못했기에

알라딘 신간 알리미 신청해놓고 목을 빼고 그의 신작을 기다리는 세월이 벌써 몇 년.

그가 좋아지는 바람에 그의 친구 김중혁 작가까지 좋아하게 됐으면서도

김연수 작가의 책 중 좋아하는 걸 대보라면 아직도 "글쎄...." 라며 허공만 바라본다.

<7번 국도>를 아직 읽지 않았는데 그건 완전 대박일지도 몰라, 하는 기대감 때문에 더 읽기가 두려운 마음.

정말 대박이라면 마지막까지 꽁꽁 아껴두고 싶다.

 

세번째 읽은 책은, 역시나 좋아하는 작가인 온다 리쿠의 <브라더 선 시스터 문>.

특히나 나는 그녀의 성장소설을 좋아하기에 굉장히 기대를 했지만,

나는 아직도, <밤의 피크닉>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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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더 선 시스터 문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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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하루였다. 실제로 체험하고 있을 때는 그 기이함을 모르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이상한 일이 가끔 있다.-16쪽

옛날 문호는 대단하다. 다들 전집이 나와 있고, 게다가 분량도 엄청나다. 책꽂이가 꽉 찰 정도. 용케 그렇게 많이 썼다. 죄 손으로 썼을 텐데.-26쪽

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열일곱 살도 실제로 되고 보니 대단히 시시했던 것처럼, 스무 살은 한층 더 별볼일 없었다.-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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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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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일요일에 우린 다시 만날 거야. 아빠는 조금씩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빠는 내게서 돌아선 뒤 그 하얀 빛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너에게는 너무나 많은 일요일이 찾아올 거야. 네 소원이 이뤄지는 일요일도 분명 찾아올 거야. 그러니 너는 돌아가. 너의 삶 속으로.-104쪽

국밥을 먹고 난 뒤, 아빠는 그곳의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진 짐승처럼 아름다우니 같이 구경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농가들 사이로 난 소로를 따라 걸었다. 벌판은 표백한 이불 홑청처럼 펼쳐져 있었다. 밀가루를 뒤집어써 화가 난 뚱보들처럼 서 있던 짚단들. 심연처럼 어두운, 얼어붙은 개울의 표면. 자정이면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던 시절이었다. -115쪽

"순리대로 사는 게 바로 이 우주의 비밀이지. 잠이 오지 않는다면, 안 자면 되는 거야. 꼭 자야 할 필요는 없어. 죽은 사람이 자꾸 눈에 보인다면, 그냥 눈을 감으면 되고. 보고 싶을 때는 눈만 뜨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까 좋은 거 아닌가?"-143쪽

"비 내리는 밤기차에서 토마스 만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행운을 누리지 못하고 죽으니까."-160쪽

"(...)그러니까 천재의 책 읽기. 천재적으로 책을 읽으려면 작가가 쓰지 않은 글을 읽어야만 해. 썼다가 지웠다거나, 쓰려고 했지만 역부족으로 쓰지 못했다거나, 처음부터 아예 쓰지 않으려고 제외시킨 것들 말이지. 그것까지 모두 읽고 나면 비로소 독서가 다 끝나는 거야. 책을 다 읽는 일은 하루면 끝나는 것인데,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하는 책이 이 세상 수두룩한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지."-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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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사월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구판절판


발이 시렸다.-7쪽

곧 사월이 오리라. 아니, 오직 사월의 첫 보름만이 찾아오리라. 그조르그는 가슴의 왼쪽 한편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월은 이미 그에게 시퍼런 고통으로 다가왔다.-27쪽

속옷을 널곤 하는 창밖 안마당의 철삿줄에 셔츠가 하나 걸려 있었다.
"네 형, 메힐의 셔츠다."
아버지는 마치 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조르그는 형의 셔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뽀얀 셔츠는 바람에 나부끼며 물결을 치다 마치 그 안에 영혼이라도 들어 있는 듯 경쾌하게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형이 살해된 날로부터 일 년 반이 지나, 마침내 그의 어머니가 그날 형이 입었더 셔츠를 세탁해 널었던 것이다. 일 년 반 동안 피로 얼룩져 있던 그 셔츠는 카눈이 지시한 대로 피의 회수를 기다리며 그의 집 위층에 걸려 있었다. 핏자국이 누렿게 변색되기 시작하면 망자가 아직 복수를 받지 못해 괴로워하는 징조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30쪽

날은 아침 나절처럼 여전히 어둑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인처럼 시간을 어림잡을 수 없었다.-57쪽

그는 마치 자신의 웃음이 그녀의 얼굴 앞에 들이댄 성냥불이라도 되어 그것을 꺼뜨려야 할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127쪽

"저 사람은 며칠 전에 살인을 저지르고, 오로쉬에서 돌아오는 길이야."
디안은 차창에서 눈길을 떼지 ㅇ낳은 채,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들었어."
청년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꼼짝도 않은 채, 열에 들뜬 눈길로 젊은 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167쪽

"그토록 먼 곳에서 온 명령에 따라 죽음으로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거인 같은 의지가 필요할 거야. 실제로 그런 명령은 때론 이미 죽고 없는 세대들을 포함하여, 실로 아주 먼 곳에서 오기도 하니까."-172쪽

그녀에게서 뗄 줄 몰랐던 그의 눈이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낯선 여인이여, 나는 이곳에 단지 얼만간만 살다 갈 겁니다!'
남자의 눈길이 그처럼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던 적은 결코 없었다. 죽음이 근접해 있었기 떄문일까, 아니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던 청년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동정심 때문이었을까? 이제 그녀는 차창에 부서진 두세 방울의 빗방울이 그의 두 눈에서 떨어진 눈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헀다.-179쪽

좀더 강해지긴 했지만 아침 햇살은 그것이 유래한 머나먼 출발지의 싸늘한 냉기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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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의 반어법 지식여행자 4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8년 4월
품절


카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시마의 젖은 얼굴을 닦아주었다. 시마도 카챠에게 똑같이 했다.
"일본어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듯 싱싱한 미인'이라는 말이 있어. 관능적인 매력이 넘치는 여자를 보고 하는 말이야."
"하하하, 우리도 기껏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100쪽

"아아, 신이시여! 이거야말로 신이 내려주신 천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거기 수려한 용모의 신동이여! 나는 감동에 겨워서 떨림이 멈추지를 않는구나."
카챠와 시마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봈다. 올가 모리소브나의 반어법이다. 쉰 목소리와 인토네이션도 똑같았다. R도 프랑스어처럼 가래가 섞인 것 같은 R이었다. 기세등등하고 어딘지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올가의 욕설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지아와 핏줄은 연결되어 있을 리가 없지만, 틀림없이 올가의 딸이라고 시마는 생각했다.
올가의 모든 것이 반어법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희극을 연기하는 것 같은 의상과 화장, 그리고 언동은 그 뒷면에 있는 참혹한 비극을 호소하고 있었던 걸까.
"뭐? 다시 한 번 말해보렴, 거기 있는 천재 소년이여! 제 생각에는......이라고! 흥, 칠면조도 생각은 참신하단다. 하지만 결국 수프 국물이 되어버렸지만. 알았니?"
또다시 들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순간에 깨달았다. 올가 모리소브나의 반어법은 비극을 호소하고 있었더 것이 아니라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을......-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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