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쪽이 조선이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진홍빛으로 물들었던 바다가 잿빛으로 어두워진다. 섬을 둘러싸며 휘돌아간 방파제 위에 작은 점처럼 서서 두 사람은 오래오래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기 먼 어디쯤 조선이 있겠지. 조선, 명국은 입 속으로 가만히 불러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 바다 건너 어디에도 조선은 없다. 그건 우리가 잃어버린 나라다. 불어오는 바람에 어둠이 뒤섞인다. 남루한 옷자락에 그 어둠이 묻는다.
(7)
그가 가고 나면 어찌 살 건가. 세월이 소금처럼 입에 씹히리라.
(70)
마치 발을 헛디디기나 하듯 마음이 지상에게로 넘어지던 날을 서형은 잊지 않고 있었다.
(73)
일찍이 나가사끼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영국인 사업가 토머스 글로버가 있었다. 뿌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모델이 된 남자다. 1868년 그는 타까시마탄광의 공동경영에 참여, 일본 최초의 채탄터널, 배수펌프, 석탄을 실어올리는 권상기를 설치하는 등 근대적인 설비를 도입한다. 그러나 1873년 외국과의 합병기업이 금지되면서 타까시마탄광은 관영으로 돌아선다. 하시마 해저탄광의 비극적인 역사는 여기에서 싹이 튼다. 관영이 된 타까시마탄광은 나가사끼형무소의 죄수들을 노동력으로 이용했다. 감옥노동이라고 말해지는, 쇠사슬을 발목에 찬 죄수들에 의해 번성해간 타까시마탄광은 잔혹한 폭력이 일반화, 횡횅하게 된다. 미쯔비시가 타까시마탄광에 이어 1890년 11월 하시마탄광을 매수하면서 타까시마의 잔혹함은 하시마에도 이어졌다. 그 어두운 역사는 세월과 함께 하시마탄광의 전통이 되면서 이곳을 더할 수 없는 인권의 사각지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가장 큰 갱도 출입구를 광부들이 지옥문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이다.
(129~130)
우석이 소리쳤다. 조선말로. "올라가자!" 탄차 옆을 따르는 조원들이 함께 소리를 받았다. 조선말로. "올라가자!" 우석의 목소리가 울음으로 변한다. "올라간다! 창수야, 올라가자!" "올라간다! 창수야, 올라가자!" 일본의 탄광, 그것도 큐우슈우 지방에서 내려오던 관습의 하나였다. 지하갱 안에서 일하던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갱 밖으로 실어내더라도 그의 영혼은 남아서 갱 속을 떠돈다고 했다. 그래서 시신을 밖으로 올릴 때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다 같이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불러가며, 올라가자 올라가자 소리치면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캄캄한 지하에서 떠돌 죽은 자의 혼을 불러가며 함께 데리고 나간다는 뜻이었다.
(187)
멀리 바다를 내다보면서 명국이 말했다. "3백 1흑 1청이라는 게 있었다네. 자네 그런 말 들어봤나?" "처음 듣는 얘긴데요. 무슨 말입니까?" "일본 사람들이 조선에 들어오며 가져가려 한 것들이야. 흰 거 세 가지는 바로 조선의 쌀과 비단, 목화였지. 그리고 검은 건 김이고, 푸른 건 대나무였어. 일본이 조선에서 가장 탐낸 게 바로 그 셋이었다는 건데, 사람이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지 않나. 3백 1흑 1청을 실어나르면서 욕심이 늘어나니까 아예 땅까지 빼앗자고 달려든 거 아니겠어."
(241~242)
"이런 말이 있지요. 열냥 주고 집 사고 백냥 주고 이웃 산다는 말, 아마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물설고 낯설다고 해도 어디 여기에 비하겠습니까. 여기까지 이렇게 와서, 그래도 서로 이웃이 되어 지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고, 다들 어려운 때에 그래도 여러분들이 옆에 계시니 한결 위안이 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자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좋다거나 어떻다거나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는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시니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269)
느리고 느리게, 아침은 끝내 오지 않을 듯이 밤이 지나갔다. 지하여서인가. 밤새 파도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금화가 눈을 떴을 때는 새벽빛이 환하게 밥상보만 한 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455)
시간의 흐름에는 그때 어긋났던 것이 후에 제대로 맞아들어가는 우연이 있다.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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