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지나간 사람들의 세상이다. 먼저 산 사람들이 살다간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다. 그게 좋아 읽는 사람들은 공부를 해야겠지. 그렇지만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물건을 앞에 놓고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요것저것 그 이치를 따져보는 걸로 사는 사람도 있지. 어디 그뿐이랴. 사람들을 줄 세우며 대장 노릇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뭔가 봤다 하면 돈벌이부터 눈에 보이는 사람도 있단다. 명조야 넌 뭘 하며 살래.
(118~119)
청주는 한홉에 2엔이었다. 그토록 배가 고프면서도 주먹밥 하나 사먹기도 아까운 판인데 술을 마시다니. 다들 혀를 내둘렀지만 양씨는 태연했다. "술은 청탁불문이요, 계집은 미추불문이라. 술이라면 내 덫에라도 기어들어가겠다." "벌써 취해삤나. 하기사, 술이란 게 술술 잘 넘어간다고 술이라 안 카나." "이 사람아, 술 먹은 놈은 개천도 좁다면서 건너뛴대. 오늘 하루 기분 좋으면 내일 저승엘 간다 한들 어떻겠나."
(172~173)
공격 제1목표는 코꾸라 조병창 및 시가지, 예비로 선정된 제2목표는 나가사끼 시가지 나까지마강이었다. 시가지를 흐르는 폭이 좁은 이 강에는 둥근 아치 두개가 물에 비쳐 안경처럼 보이는 안경다리를 포함하여 수많은 다리가 놓여 있었다. 정확한 투하 조준점은 강 하류의 토끼와 다리에서 니기와이 다리까지였다.
(389)
그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밤이 되며 빗발은 점점 굵어져 폭우로 변했다. 낱알을 뿌리듯 쏟아지는 굵은 빗발에 하나둘 임시 화장터의 불길이 꺼져갔다. 앞이 안 보이게 두들겨대는 빗발이 나가사끼의 폐허를 뒤덮었다. 경사 심한 나가사끼의 골목골목을 빗물이 흘러넘쳤다. 빗발은 도시 남쪽에 자리해 원폭을 비켜 살아남은, 항구를 내려다보는 전망이 가장 좋은 글로버 저택의 지붕을 쏟아붓듯이 뒤덮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아치형 돌다리인 안경다리의 교각을 때리며 물은 넘실거렸다. 유곽과 유흥가가 자리 잡았던 시안바시 언덕길을 휩쓸며 물은 둑이 터진 듯 쏟아재내렸다. 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검게 그슬려 넘어진 지장보살 석상에 누군가가 묶어놓았던 붉은 천도 빗물에 쓸려내려갔다. 네덜란드 언덕길의 돌계단은 급류가 쏟아져내려가는 물길이 되었다.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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