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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대전이고 일터는 서울인지라, 평균 두 달에 세번씩은 영등포역을 애용한다. 영등포역에는,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바로 옆에 "책, 얼마에 드릴까요?" 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책 가판대와, 3층 역사에 있는 아주 작은 책 가판대 두 군데가 있는데..  대개는, 출발시간이 임박해서야 역에 도착하기 때문에 후다닥 뛰어가느라, 그동안 흘깃 눈짓으로만 봐두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월요일 아침에 일을 마치고 대전에 내려갔다가 목요일 오후에 서울에 올라오는 길. 원래는 내 영혼의 친구 강아지를 데려오려는 심산이었다가 폭우 때문에 마음이 변해 짐도 가뿐했고, 시간도 넉넉하고, 아주 절호의 찬스였던 셈. 휘휘 둘러보니... 음... 생각보다 부실하다. 기차를 타러가는 뜨내기 손님들을 타겟으로 삼았는지, 꿈해몽책과 여행안내서, 철지난 영어회화책들이 그득하다. 하지만 손님도 그다지 없고 이미 너무 오랜 시간 둘러보았기에 그냥 나가기 뻘쭘. 소심한 성격 제대로 발동해서 주인아저씨 눈치를 보며 서가 아랫쪽까지 꼼꼼하게 훑어봤다.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1997> 

1997년에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버전인데, 책표지가 누르스름한 게 아주 고풍스럽다. 표지 디자인도 옆의 그림같지 않고 낯설다. 요즘 이런 분위기의 오래 된 책, 아주 맘에 든다. 가능하면 옛날 버전, 초판본..  읽고 싶던 책이었는데 2000원에 구입.

 

 <한국대표선집-수필/ 이철호 엮음/ 명문당/ 1996>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든 책인데 집에 와서 살펴보니 맨마지막장에 계룡문고라고 적힌 전표(?) 가 붙어 있다. 96년 5월 21일에 이 책은 계룡문고에 있었나 보다. 한창 수능준비를 하고 있던 나도 그 때 대전에 있었는데, 우리 어쩌다가 같이 서울로 올라왔구나. 떠돌다 떠돌다 영등포역 가판대까지 오게 된 사연많은 책. 이런 사연 있는 책도 아주 좋다. 2500원.

 

 <맛따라 갈까보다/ 황교익/ 디자인하우스/ 2000>  

이 책 바로 왼편에 고형욱의 "맛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윽. 정가 주고 산 책을 이런 데서 만나면 괜히 심통 난다. 심통 난 김에 비슷한 유형 같아 집어든 책. 집에 오자마자 술술술술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이런 책은 빨리 읽혀서 좋다. 3000원이었나?

 

 

여기에 있는 책들은 '헌 책'이 아니라 그냥 '오래된 책'이다. 어찌됐든, 오늘처럼 대충대충 보지 않고 꼼꼼하게 서가 밑바닥까지 챙겨본다면 이미 절판된 보물들을 만나볼 수도 있을 듯. 기차 안에서 읽을 책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을 때, 혹은 읽을 분량이 얼마 남지 않아 불안할 때 들러서 한 권 사면 아주 요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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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서재 결혼시키기'의 앤 패디먼이 제안한 '현장 독서'를 언젠가는 꼭 해보리라 다짐했었다. 제일 큰 바람이라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크레타 섬에서 읽는 것. 조르바를 만나는 항구의 술집에서부터 배를 타고 크레타 섬으로 들어가 빈둥빈둥 놀다가 밤에는 군밤을 오도독 깨먹으며 포도주를 마시고.. 늘어지게 자고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잠자리에서 일어나 해변에 나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지리에 익숙해지면 시내 서점에 나가 그리스어로 된 진짜 '그리스인 조르바'를 한 권 사고.. 운이 좋아 조르바가 살아 있을 당시 '꼬마 조르바'였던 그의 혈육을 만나게 된다면 더욱 좋겠고... 더 운이 좋다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를 찾아가 진로 소주 한 잔 올리고... 서른이 되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없는 지금으로서는 단지 바람일 뿐이다. 그리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이 좀 비싸야 말이지. 시간도 돈도 없는 내가 이번 여름에 택한 피서지는 태국. 내 돈은 달랑 15만원만 쓰고 저축왕 언니에게 빌붙어 간 3박 5일짜리 패키지 여행이었다. 외국에 나가는 김에 현장독서를 해보고 싶었지만, 태국 작가 중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 태국 소설도 아는 게 없더라. 나의 무지를 탓하며, 차선책으로 택한 것은 국적모호한 '꿈꾸는 책들의 도시'.

아끼고 아껴둔 후 비행기 안에서 처음 펼쳐본 책. 이런! 국적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인종도 모호하다. 공룡, 늑대개, 외눈박이 괴물, 그 외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괴생물체들.  주인공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 린트부름 요새의 일흔일곱살짜리 청년 공룡이라니! 지금 어느 나라 위를 날고 있는지 모르는 애매모호한 공간에서 읽을 책으론 아주 적합했다. 모든 공룡들이 작가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요새. 그리고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으로 떠나는 여행. 지하 미로 안에서의 여정. 한 작가의 작품을 몽땅 외우는 게 인생의 목적인 부흐링들. 부흐링의 삶도 부럽고, 작가를 대우해주는 상상속의 도시도 부럽다. 온통 부러운 것들 투성이!

비행기 안에서 다 읽지 못하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출퇴근길 전철에서, 잠들기 전 침대맡에서 계속 읽었다. 평소엔 두세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스타일인데, 이번엔 이 책만 주구장창 읽어댔다. 금요일에 술을 마시고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토요일 늦게 비비적대고 눈을 뜨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알람이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깼는데 순간적으로 '부흐링들 동굴에 불이 났는데 어쩌지! 빨리 알려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다급해지기조차 했으니까.. 흑. 내가 이렇게 빠져들었었나. 부흐링들 동굴에 책사냥꾼들이 쳐들어온 게 나의 일상과는 상관없는 가상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5초 가량은 나도 완전히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 시민이었다.

이 책을 읽은 후, 부흐하임에 가보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눌러담기가 힘들다. 다음 휴가 때에는 영국이나 일본의 헌책방 거리에 카메라 하나와 커다란 빈 가방 하나 달랑 메고 하루종일 쏘다닐 테다.

 

아. 전체적인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매우 맘에 들었던 구절 하나.

"주석들이란 서가 맨 아래에 있는 책들과 같습니다. 몸을 굽혀서 보야하므로 아무도 그것을 즐겨 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도 주석이 널려 있구나. 하긴, 졸업논문을 쓸 때, 되도 않는 주석들을 그저 폼 때문에 마구잡이로 써넣곤 했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 주석은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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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실은 종종 책을 훔치고픈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이미 내일모레면 서른이라는 나이에 책을 훔치다가 걸리면 훈방조치로는 끝나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에,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 유혹의 선에서 끝내고 마는데..

얼마 전, 책을 합법적으로 훔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늦은 오전 출근길 전철 안.  모 출판사에서 나온 문고판 책을 읽다 보니 이상하게도 162페이지에서 몇 페이지 전에 나왔던 내용이 그대로 반복되길래,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출판사로 전화를 걸었다. 아주 공손히, 이러저러하니 책을 다시 보내줬으면 좋겠다 얘기했더니 뭐 별로 확인도 하지 않고 바로 책을 다시 보내준다는 게 아닌가.  내가 갖고 있던 책을 반품하라는 말도 없이... 그리고 이틀 후 우편함에 온전한 책 한 권이 담겨져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모든 출판사에 각 한 번씩 전화를 걸어 그 출판사에서 제일 갖고 싶었던 책 제목을 대며 제본 상태가 불량하다고 말한다면... 적어도 그 중 반절 정도는 책을 보내주지 않을까? 읽던 책을 반품하라면, 귀찮으니 됐다고 하면 그만일 테고..

설마 알아챌까? 나는 모든 출판사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될까?

소심해서 못 해보겠다. 해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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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6-10-20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상상도 못했어요 갑자기 충동이 불끈~~

고도 2006-11-0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전 그이후로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답니다 ^^;; 도둑이 제발 저리는 심정이랄까... 혹시라도 성공하면 꼭 말씀해주세요 ㅋ
 
촘스키 하룻밤의 지식여행 1
존 마허 지음, 한학성 옮김, 주디 그로브스 그림 / 김영사 / 2001년 2월
평점 :
절판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하룻밤에 알기엔 촘스키, 너무 벅차다. 영문학을 전공한지라 촘스키의 통사론에 대해선 남들보다 조금은 많이 알고, 또 예전에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꽤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이 책 하룻밤만에 슬슬 읽을 수 있으리라 속단했다. 하지만, 하룻밤에 읽을 분량으로 너무 축약해서인지, 통사론 설명하는 부분에서조차 몇 년전 전공 시간에 배웠던 내용들을 떠듬떠듬 기억해내야만 이해할 수 있었다. 통사론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들에겐 절대적으로 재미없을 듯한 부분이다. 그림은 쫌 귀엽긴 하지만.. 특히 막 그린 듯한 삐죽머리 여자애 그림 좋다. '멋지다 마사루' 식 그림체를 보는 듯..

처음 본 순간 너무 마음에 들어서 전 시리즈를 모두 보관함에 담아두었는데, 정말 읽고 싶은 것만 남겨두고 보관함에서 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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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의할 것 하나.

이 책을 읽다 보면, 소설 속의 소설인 "살인자의 건강법"을 읽고 싶어 미칠 지경에 이른다. 소설 속 주인공 프레텍스타 타슈가 자신을 "필레몽 트락타튀스"라는 이름으로 감춰버린 자전적 미완성 소설인데, 이게 현실에 있을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소설 속 소설의 남녀주인공 꽃미남 꽃미녀를 인용하는 글귀에 가서는, 그 미사여구를 직접 읽고 싶어서 미치고 만다. 하지만 단념할 수 밖에. 고로, 단념을 쉬이 하지 못하는 사람은 읽기를 망설여야 할 것.

그리고.

프레텍스타 타슈가 만든 칵테일 알렉산드라가 눈 앞에 아른거릴지도 모른다. 본성이 술을 좋아하기 ‹š문인지 책 속 술에 관한 부분은 더 애착이 가곤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아멜리 노통, 아주 제대로다.  

프레텍슈타 타슈는 알렉산드라(코냑과 코코아  크림을 2:1로 혼합한 뒤 생크림을 가미한 칵테일)를 좋아했다. 술을 잘 마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홀짝이고 싶을 ‹š면 늘 알렉산드라를 마셨다. 그리고 반드시 손수 만들어 마셨다. 다른 사람들의 혼합 비율을 신뢰하지 않아서였다. 알렉산드라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지닌 뚱보 선생은 다음과 같은 격언을 만들어내어 투지에 불타는 모습으로 읊조리곤 했다. "누군가가 양심적인지 비양심적인지는 알렉산드라를 어떤 혼합 비율로 만드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칵테일 하나에도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프레텍스타는, 사랑에도 굉장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자신만의 독보적인 사랑을 너무나도 열망한 나머지, 결국 역설적으로 그 사랑법에 당하고 말지만. (아니 사실은 그 사랑법에 당한 걸 황홀해 할테지만) 그 당하기 직전까지의 작가와 기자의 설전에 설전에 설전에 설전......을 거듭하는 과정이 꽤나 신랄하고 엽기적이다. 그 와중에 얻은 좋은 구절 하나는....

"쾌감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글을 쓰는 작가는 말이오, 쾌감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여자아이를 강간하는, 강간하기 위해서 강간하는, 악행을 위한 악행을 저지르기 위해 강간하는 파렴치한처럼 추잡스런 그 무엇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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