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서재 결혼시키기'의 앤 패디먼이 제안한 '현장 독서'를 언젠가는 꼭 해보리라 다짐했었다. 제일 큰 바람이라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크레타 섬에서 읽는 것. 조르바를 만나는 항구의 술집에서부터 배를 타고 크레타 섬으로 들어가 빈둥빈둥 놀다가 밤에는 군밤을 오도독 깨먹으며 포도주를 마시고.. 늘어지게 자고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잠자리에서 일어나 해변에 나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지리에 익숙해지면 시내 서점에 나가 그리스어로 된 진짜 '그리스인 조르바'를 한 권 사고.. 운이 좋아 조르바가 살아 있을 당시 '꼬마 조르바'였던 그의 혈육을 만나게 된다면 더욱 좋겠고... 더 운이 좋다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를 찾아가 진로 소주 한 잔 올리고... 서른이 되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없는 지금으로서는 단지 바람일 뿐이다. 그리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이 좀 비싸야 말이지. 시간도 돈도 없는 내가 이번 여름에 택한 피서지는 태국. 내 돈은 달랑 15만원만 쓰고 저축왕 언니에게 빌붙어 간 3박 5일짜리 패키지 여행이었다. 외국에 나가는 김에 현장독서를 해보고 싶었지만, 태국 작가 중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 태국 소설도 아는 게 없더라. 나의 무지를 탓하며, 차선책으로 택한 것은 국적모호한 '꿈꾸는 책들의 도시'.

아끼고 아껴둔 후 비행기 안에서 처음 펼쳐본 책. 이런! 국적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인종도 모호하다. 공룡, 늑대개, 외눈박이 괴물, 그 외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괴생물체들.  주인공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 린트부름 요새의 일흔일곱살짜리 청년 공룡이라니! 지금 어느 나라 위를 날고 있는지 모르는 애매모호한 공간에서 읽을 책으론 아주 적합했다. 모든 공룡들이 작가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요새. 그리고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으로 떠나는 여행. 지하 미로 안에서의 여정. 한 작가의 작품을 몽땅 외우는 게 인생의 목적인 부흐링들. 부흐링의 삶도 부럽고, 작가를 대우해주는 상상속의 도시도 부럽다. 온통 부러운 것들 투성이!

비행기 안에서 다 읽지 못하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출퇴근길 전철에서, 잠들기 전 침대맡에서 계속 읽었다. 평소엔 두세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스타일인데, 이번엔 이 책만 주구장창 읽어댔다. 금요일에 술을 마시고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토요일 늦게 비비적대고 눈을 뜨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알람이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깼는데 순간적으로 '부흐링들 동굴에 불이 났는데 어쩌지! 빨리 알려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다급해지기조차 했으니까.. 흑. 내가 이렇게 빠져들었었나. 부흐링들 동굴에 책사냥꾼들이 쳐들어온 게 나의 일상과는 상관없는 가상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5초 가량은 나도 완전히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 시민이었다.

이 책을 읽은 후, 부흐하임에 가보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눌러담기가 힘들다. 다음 휴가 때에는 영국이나 일본의 헌책방 거리에 카메라 하나와 커다란 빈 가방 하나 달랑 메고 하루종일 쏘다닐 테다.

 

아. 전체적인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매우 맘에 들었던 구절 하나.

"주석들이란 서가 맨 아래에 있는 책들과 같습니다. 몸을 굽혀서 보야하므로 아무도 그것을 즐겨 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도 주석이 널려 있구나. 하긴, 졸업논문을 쓸 때, 되도 않는 주석들을 그저 폼 때문에 마구잡이로 써넣곤 했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 주석은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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