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이대 하서명작선 60
하근찬 지음, 정호웅 해설 / (주)하서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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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청 벼룩시장에서 그야말로 헐값에 건진 책.
여고생들이 박스에 책을 몇 권 담아놓고 500원, 1000원씩에 팔고 있길래
아이구야 이게 웬 횡재냐 하고 집어왔다.
여고생들 말고도 헌책을 파는 이들이 꽤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개장 시간에 맞춰서 1등으로 도착할 걸 그랬지.
점심 즈음, 근처를 지나다가 급작스레 벼룩시장을 기억해낸 어무이 때문에 가게 됐는데
전리품을 건진 건 다섯 식구 중 나 하나뿐.
비닐봉투 가득 책을 샀는데도 만 원도 안 했었지 아마.
어찌됐건, 나로서는 퍽이나 고마운 일.

<수난이대>는 고등학교 때 수능 준비 때문에 읽었던 작품이다.
그 때,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문학작품들 위주로 시험문제 낸다고 해서
이런 종류의 책 무지하게 팔았고, 무지하게 사댔다.
덕분에 이광수의 무정도 읽었고 사랑도 읽었고
심훈의 상록수도 읽었고 염상섭의 삼대도 읽었으니
이만하면 교육의 효과는 톡톡히 본 셈이려나?
그런데 한 가지 폐해라고 한다면,
요즘 서점에서 한국 근대 소설을 좀 살라치면
대부분 표지에 "고등학생이 꼭 읽어야 할"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는 것.
서른을 진작에 넘겨버린 나로서는 그 책을 지하철에서 읽는다는 건,
좀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 아닌가.
흠. 혹시 나를 여고생으로 봐줄지도 모르니 고마운 건지도. (어머나)

어쨌거나.

다시 읽으니 참 좋다.
단편소설은 모름지기 이래야지, 싶다.
요즘 쏟아져나오는 단편들은 대부분 사건 중심이라기보다는
현대사회를 사는 외로운 주인공들의 사유 세계를 따라가는 스타일이 많은데,
난 이런 "오리지날"스러운 단편이 더 좋달까.
게다가 <수난이대>는 읽고 나면 괜히 짠해진다.
 
그래. 단편이란 이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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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이대 하서명작선 60
하근찬 지음, 정호웅 해설 / (주)하서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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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ㅡ오ㅡ하고 슬픔을 토해 놓듯 비련의 시를 쓸 때는 오히려 우수가 더 짙어지는 것 같았는데, 한 편의 소설을 완결시키고 나니 마치 가슴속의 비애를 온통 내쏟아 버린듯한 개운함과 후련함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여제자>-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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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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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읽고 났을 때,
책을 얼굴 위에 덮고 한동안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인생을 두고 저글링하듯 이쪽에서 저쪽으로...
쉴새없이 누군가의 인생, 한 가족의 몇 대에 걸친 역사를 풀어놓는 솜씨에
음... 뭐랄까.. '아연실색'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단순히 '감동'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기엔 그 광풍이 너무나도 거세고...

그러니 "콜레라 시대의 사랑"도 당연히 훌륭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선택.
딱히 전작주의를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마르케스라면 최소한 시간 낭비는 아닐 거라는 믿음!!!

아. <백년의 고독>이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이라지만
'아름다움' 면에서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한 발 앞선다.
특히나 "아직도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니 유감이군요."
"내가 죽는 것이 가슴 아픈 유일한 까닭은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가히 놀랄 만한 명문장! 

미국의 소설가 토마스 핀천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읽어본 작품 가운데 가장 놀랍다고 했는데,
단지 마지막 장 뿐일까.
페르미나 다사가 2시간 동안 비춰졌던 거울을 구하기 위해
1년여의 시간 동안 호텔 주인을 끈질기게 설득했던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마음 또한
놀랍고도 아름답고도 진중하다.
고백하건대, 나는 책을 들고 있는 내내 플로렌티노가 제발 사랑 때문에 죽어버리길 소원했다.
다른 시시껄렁한 이유 말고 사랑 때문에 죽어라! 

이 책은 영화 '세렌디피티'에도 나온다.
우연히 만난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신상명세를 알리지 않은 채
헌 책과 지폐에 전화번호를 각각 적고 헤어지는데,
그 헌 책이 바로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었다.
집에서 메가 티비로 영화를 보다가 책 표지를 보고선 얼마나 놀랐던지!
에라잇, 이런 말랑말랑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마음 속으로 항변만 100번쯤 하다가, 그래도 진솔한 사랑을 표현하기에
이렇게 적절한 책이 또 어디 있겠냐, 시나리오 작가에게 수고했다 텔레파시 보내고.

그 뒤로 일상 속에 파묻혔다가도 불현듯 드는 일관된 생각은...

간혹 뉴스에서 사랑 때문에 자살한 청춘남녀를 보면 한심하다 손가락질했는데
그들이야말로 제일 합당한 이유 때문에 죽는 것이었으리라.
제대로 죽어간 수많은 청춘남녀(백발 성성한 노인이라도 사랑을 한다면 청춘남녀)에게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하지만, 난 용기가 없어요.
나는 그냥 늙어 죽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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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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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는 것이 가슴 아픈 유일한 까닭은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15쪽

어느 날 밤, 그는 식민지풍의 고급 식당인 돈 산초 호텔에 들어가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에 앉았다. 간단한 간식을 먹으러 혼자 갈 때면 습관적으로 항상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때 안쪽에 걸린 커다른 거울에서 페르미나 다사를 보았다. 그녀는 남편과 다른 부부 두 쌍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가 그녀의 찬란한 모습을 거울에서 모두 볼 수 있는 각도에 위치해 있었다. 그녀는 편안한 마음으로 우아하게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고, 폭죽을 터뜨리듯이 요란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눈물 모양의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서 더욱 빛나고 있었다. 앨리스가 다시 한 번 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숨을 죽인 채 그녀를 마음껏 바라보았다. 그녀가 먹는 모습, 포도주에 입만 대는 모습, 가문에서 대대로 운영해 온 돈 산초 호텔의 사 대째 주인과 농담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외로운 식탁에서 그녀와 삶의 한순간을 살았다. 그렇게 그는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 없는 장소에서 눈에 띄지 않게 한 시간 이상을 보냈다. 그런 다음 그녀가 일행과 뒤섞여 나가는 모습을 볼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커피를 -120-121쪽

네 잔이나 더 마셨다. 그들이 너무나 그의 옆 가까이로 지나갔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의 향수 냄새 속에서 그녀의 향내를 맡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이후 거의 일 년 동안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호텔 주인을 끈질기게 공략하면서 돈이든 부탁이든, 아니면 그가 인생에서 가장 갈망한 것이든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줄 테니 그 거울을 자기에게 팔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이 든 산초 씨는 빈의 어느 가구 기술자가 세공한 이 아름다운 거울 틀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지고 있다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다른 틀과 짝을 이루는 둘도 없는 보물이라는 전설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산초 씨가 그 거울을 주자,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자기 집의 거실에 걸어놓았다. 그것은 멋진 틀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을 두 시간 동안이나 담고 있었던 틀 안의 거울 때문이었다.-120-121쪽

그는 당시 모든 사람이 읽고 있던 소설 <펭귄 섬>을 읽는 데 푹 빠져 있었다.-141쪽

두 사람은 마치 부부 생활의 지난한 고통의 언덕을 뛰어넘은 듯했고, 더 이상 머뭇거림 없이 직접 사랑의 심장부로 들어간 것 같았다. 열정의 함정과 환상의 잔인한 조롱, 그리고 환멸의 신기루를 극복하고, 인생을 달관한 것 같은 늙은 부부처럼 조용히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사랑이지만,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그 사랑의 농도는 진해진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326쪽

"계속 갑시다. 계속해서 앞으로 갑시다. 다시 라 도라다까지 갑시다."
페르미나 다사는 몸을 떨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한 옛날 목소리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선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로 그들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선장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엄청난 영감의 힘에 지각을 잃고 어리둥절해졌던 것이다.
선장이 물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대답했다.
"태어난 이래, 나는 진심으로 하지 않은 말이 단 한마디도 없소."
선장은 페르미나 다사를 쳐다보았고, 그녀의 속눈썹에서 겨울의 서리가 처음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런 다음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그의 꺾을 수 없는 힘, 그리고 용감무쌍한 사랑을 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는 때늦은 의구심에 압도되었다.
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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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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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뜨겁고 슬픈 똥에서 나온 부드러운 수증기가 이 도시는 죽은 게 확실하다고 사람의 영혼 속 깊은 곳에서 부추기고 있었다.-35쪽

"아직도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니 유감이군요."-71쪽

사실 그녀에게 있어 그 편지들은 심심풀이용으로, 자기 손은 불에 넣지 않으면서 뜨거운 불길을 유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면에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한 줄 한 줄마다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124쪽

일데브란다는 사랑에 대해 우주적인 사고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랑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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