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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거의 언제나 대부분,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19번 <파리대왕>은 정말 아니올씨다.
물론, 책을 사기 전 알라딘에서 땡스투 적립금을 타먹기 위해 먼저 읽은 이들의 리뷰를 꼼꼼하게 읽으면서
번역의 상태가 심히 메롱스럽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정말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거다.
마치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영어 숙제로 해석 열 번씩 해갔던 딱 고 정도의 국어실력이랄까.
의역이 아니라 완전 직역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옛날스러운 말투는 또 어떻고.
몇 가지 짚어 보자면,
먼저, "야코가 죽은 것이다."
엥? 야코? 처음엔 야코라는 애가 죽은 건가 했는데, 이 단어 진짜 오랜만에 들어본다.
정확하게는 콧대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는데 정말 옛날 영화에서나 한번씩 들어봤던 단어.
그냥 "기가 죽었다" 라고 해도 되지 않나? 굳이 옛날 속어를 써야 돼? 나 이 책 헌책방에서 산 것도 아닌데?
뒷부분에는 "치도곤을 놔주었어." 나 "귀쌈을 질러박았어." 같은 문장도 있다.
"그 녀석들이 나를 소경으로 만들었어." 라는 문장도.
여기 주인공들 분명히 아저씨가 아니라 소년들인데. 헐.
그리고 "I am..." 이라고 시작되는 문장은 "나는..." 이라고 꼭꼭 직역해 주기.
"나는 계속했어. 나머지는 내가 보낸 거야. 그러나 나는 사냥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나는...."
그래. 나도 중1 때 이랬었지. 나는 학교에 갑니다. 나는 친구를 만납니다. 나는 밥을 먹습니다. 나는 학생입니다....
한 술 더 떠,
잘 모르는 단어는 영어단어 그대로 써놓고 밑에 각주를 달아놓기.
"분홍색의 표석이 뒤죽박죽 굴러 있고 그 위로는 사탕을 입힌 것처럼 구아노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응? 구아노? 구아노가 뭐길래 다닥다닥 붙어 있나 의문스러운데 마침 각주가 달려 있다.
---해조의 똥이 쌓여서 굳어진 것으로 비료로 쓰이는 경우도 있음.
에잇, 뭐야. 그럼 그냥 "해조류의 똥이 굳은 채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다 읽고 나서 용산역 뿌리서점에 갔다가 <파리대왕>을 발견했는데 심각하게 다시 사서 읽을까 고민했을 정도.
제대로 된 번역으로 읽었다면 2배 정도는 더 재미있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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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번역 핑계로 나는 9월 16일부터 홀로 내팽개쳐진 채 <파리대왕>을 읽기 시작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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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에 M양을 만나 홍대 바이은에서 커피를 마실 때도 핸드백엔 이 책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내 핸드백 안을 흘깃 보더니 요즘엔 무슨 책을 읽냐고 물어보는 M.
꺼내서 번역이 메롱스럽다 어쩐다 흉을 보는데
혹시 파리대왕이 프랑스 파리의 왕 이야기냐고 너무나도 조심스레 묻는 M!
안 그래도 M의 별명이 '로마 출신 파리지엔느'이기 때문에 당연히 농담으로 받아들였는데
정말로 정색을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창피 당할까봐 너한테 살짝 물어보는 거라는 수줍은 고백!!!
ㅋㅋㅋㅋㅋㅋ 완전 웃겨서 커피가 코로 들어갈 뻔 했는데,
생각해 보니 나는 M 앞에서 무라카미의 신작 1Q84를 '아이큐 팔십사'라고 읽은 사람인 걸.
어쩜 이리도 끼리끼리인지. ㅋㅋ
그나저나 바이은 커피는 언제 먹어도 최고!
직접 만든 베이글도 먹어봐야 하는데 항상 배가 부른 상태로 가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