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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결투 - 일본 현대문학 대표작가 에센스 소설
다자이 오사무 지음, 노재명 옮김 / 하늘연못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무릇 소설이라는 게 작가의 허구적 창작물이거늘, 다자이의 소설에서는 아무리 안 그러려고 해도 절벽 위의 그가 떠오른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나에겐 절벽 위에서 정부와 함께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그의 모습만이 선연하다. 첨벙, 첨벙, 첨벙, 첨벙.... 네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가까스로 죽음에 성공한 다자이. 그건 죽음에 대한 '성공'일까, 삶에 대한 '실패'일까. 난 아무래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래서 그의 소설이 더 각별하게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다. 후광효과 한 번 확실하다.
책에 나온 다섯 개의 소설 중 <광대의 절규>엔 실제로 여자와 함께 물에 뛰어들었다가 실패(삶에는 성공)한 그의 모습이 보인다. 요양원에서 호기롭게 친구들과 웃고 떠들지만, 그게 더 쓸쓸해 뵌다.
"안심이 되더군. 지금 바다로 뛰어들면 어떤 것도 문제될리가 없었지. 빚도 학업도 고향도 후회도 마르크시즘도. 그리고 친구도 숲도 꽃도 이제 아무래도 좋은 거였지. 그걸 깨달았을 때 나는 저 바위 위에서 웃었다. 안심이 되어서 말야."
그런 자조적인 태도는 그가 '바다로 막 흘러들어가려는 강물의 상태'였기 때문이리라. 장편소설 <쓰가루>의 다음 구절은 그 나이 때의 다자이 모습을 그대로 투영해 준다.
"강이라는 것은 바다로 흘러들기 직전에 기묘하게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역류라도 하려는 듯이 물의 흐름이 둔해진다. 나는 강물의 느린 흐름을 바라보며 방심했다. 다른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내 청춘도 강에서 바다로 흘러들기 직전이었다."
단편 <걸식 학생>에서는 또 이렇게 외쳐댄다. "천 개의 지식보다도 하나의 행동!"
그가 바다 위에 몸을 던진 건 천 개의 지식보다도 더 중대한 하나의 행동이었을까? 아아, 시종일관 우울해 미치겠다. 아무리 안 그러려고 해도 다자이의 죽음만 자꾸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리 '천 개의 지식보다 하나의 행동'이라 해도 차마 죽음이라는 행동을 따라할 수 없는 현실 속의 나는, 그저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을 찾아 여행이라도 해봐야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아직 강물일까, 벌써 바다일까, 아니면 다자이처럼 강물에서 바다로 흘러들기 직전일까.
기어이 그에게서 옮은 우울함은 책 마지막에 소설가 한수산이 쓴 <내 취재노트 속의 다자이 오사무>에 이르러 절정의 아름다움이 되고 말았다. 슬픔과 아름다움은 상통한다더니, 그 말 맞긴 한가보다.
마침, 얼마 전 유용주가 자신의 산문집에서 한수산의 <부초>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걸 보고, 인터넷으로 그의 책을 주문해 놓은 참이었다. 한 달 전만 해도 한수산의 존재조차 몰랐었는데, 이렇게 다자이의 소설에서도 그의 묵직함을 느끼다니, 왠지 기분 좋은 우연이다. 한수산은 일본에서 다자이의 흔적을 찾는 여행을 한다. 마을 유지였던 다자이의 커다란 집이, 한수산이 찾아갔을 때는 '사양관'이라는 여관으로 변모했던 모양이다. 그 여관엔 다자이의 유년시절과 한숨과 아름다움과,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흔적으로 남아 있을 터. 하지만 지금은 문학박물관으로 용도변경했다고 하니, 다자이와 다른 시대 같은 공간에서 잠이 드는 호사는 포기해야겠다.
아, 한수산도 궁금해했던 건데 나도 궁금한 것 한 가지. 일본의 독자들에게 다자이는 애정과 경멸을 함께 받는다던데 정말일까?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하면서 창피해했다는, 한수산이 만난 여자배우처럼? 한 다리 건너 아는 재일교포한테 건너건너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