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초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8
한수산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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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이 떨어져내리며 한순간에 허옇게 드러난 잿빛 하늘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따. 그러고 보니 하늘 한번 넓네."
멀리 봄빛이 스민 하늘, 잘 갈린 칼날처럼 푸른빛이 돋아나는 겨울 하늘을 바라보는 덕보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아들어간다. 하늘이 저런 빛일 땐 고향에서 두엄을 내곤 했는데...... 보리밭에도, 비탈진 고추밭 자리에도. -18쪽

"참, 아편하던 사람이 그걸 안 하면 몸이 열네 군데가 아프다면서요?"-182쪽

"엄마는 어쩌고. 난 아무보고도 어머니 안 할 거다."
"어머니라고 해야 한다. 난 엄마고 그분은 어머니다. 그래야 잘난 남자 돼."
"그럼 엄마가 둘이야? 훌륭한 사람은 엄마가 둘이래야 돼?"
"그럼, 그럼."
"거짓말 마, 나도 다 들었어. 광호 형이 그러는데 난 거기 가면 맨날 얻어맞는대. 나도 다 안단 말야."
"엄마 말을 들어야지. 광호가 그까짓 게 뭘 아니?"
"나도 다 알지만 따라가는 거야. 엄마가 가라니깐 공부하러 가는 거야. 이담에 엄마 찾으러 꼭 올 거야. 꼭 그래야 한대. 안 그러면 개새끼래, 광호 형이 그랬어."-223쪽

그렇다. 하명은 벌떡 일어섰다. 아저씨도 칠룡이도 지혜도...... 우리는 손님들 앞에서 관객이었다. 그렇지만 우릴 구경하던 손님들도 천막을 나가면 거기선 곡예사야.-284쪽

칠룡아, 네가 피에로 하는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아냐. 가만히 보면 단체에 들어와서 처음 무대에 설 때엔 누구나 피에로부터 시작해, 그렇지? 그런데, 늙어서 재주 못하게 될 때 곡예사는 또 피에로를 하더구나. 이제 생각해 보면, 우리 한 세상 왔다 가는 것도 손님들이 실없이 웃으며 온갖 바보짓이나 골라하는 네 꼴을 보고 앉았다가 옷 털고 돌아가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냐.-311쪽

"난 우리만 무대 위에 있고 남들은 다 구경꾼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외로웠던 거야. 그건 잘못이야. 그게 아니야. 갈보가 구경오면 그게 구경꾼이지만 우리가 갈보집에 가면 그땐 우리가 구경꾼이잖아. 난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아. 사람들이란 저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살아간다는 거야. 못난 놈도 제 딴에는 자기가 가진 거 남김없이 다 털어서 살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 그래...... 이 세상바닥도 써커스바닥이나 똑같아. 손님이 따로없다 뿐이지 분 바르고 옷 갈아입고 재주 피며 살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야. 어디로 가게 될지 아직은 정처가 없다만......"-312쪽

"어디엘 가 있든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이 무대가 아니겠어. 하늘이 천막이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목숨 가지고 어디든 발을 붙여 볼란다. 어느 동네든 실수해서 떨어지면 죽고 다치기는 매일반일 테니까."-312쪽

"호랑나빌 보면 그해 좋을 징조라던데, 올해 처음 호랑나비를 봤네."-33쪽

사라져가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뒷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이리라.-100쪽

"아저씬 고향이 함경도라 그러셨지요?"
"두만강변이지."
"그런데도 아저씬 어떻게 이북 사투리를 전연 안 쓰시데요."
"이 사람아, 열다섯에 집 나와서 만주땅부터 팔도강산 안 돌아다닌 데가 없는데 사투리가 입에 붙어 있겠나."
"허긴 그럴 법도 하네요."
"그런데 말일세 이사한 건 사람의 입맛이라는 거야. 말은 다 잊어버리는데도 입맛은 남아 있거든. 그쪽에선 한겨울이면 동치미에 냉면을 말아먹는데 그 맛을 이 나이가 되도록 잊질 못하니 희한한 일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면 사람 사는 이치라는 것도 참 묘한 거야."-120쪽

"지혜가 다칠 때 전 깨달았어요. 천막 속의 우리랑 구경하는 남들이랑 어떻게 다른 건지 알 수 있었어요. 우리는 죽어가면서라도 곡예를 보여주어야 하는 이 바닥에서 한 걸음도 물러설 수가 없지만 그렇지만 저들은 우리를 바라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모두들 천막을 떠나 사회로 나가고 싶어 하지. 그것도 네 말처럼 결국 구경하는 쪽에 앉고 싶어서야."
"곡예사라는 게 뭡니까. 사실 줄 위에서 사람은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게 원칙이에요. 그런데 이건 구경꾼이 가진 원칙이죠. 그러나 줄 위에서도 사람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 이건 곡예사의 진실입니다. 곡예사는 몸으로 이 가능과 불가능을 뛰어넘어야 하나 봐요."-141~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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