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초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8
한수산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아름다운 책이다.

유용주가 그의 산문집에서 "비단결 같은 서정의 눈물방울"이라고 찬사를 했던 감성의 작가 한수산의 부초. 꼭 읽어보리라 체크해뒀는데, 다자이 오사무의 <여자의 결투>를 읽고 나니 맨 뒤에 한수산의 취재일기가 들어있다. 다자이의 흔적을 좇아 이리저리 헤매는 한수산의 모습이 어쩐지 부초를 연상시키더라니. 괄호 안에 한자가 써 있는 것도 아니어서 처음엔 부초가 뭔가 했는데 책 아래 영어로 써 있는 걸 보고야 알았다. 'Floating weeds'. 이렇게 완벽한 제목이 또 있을까. 짧게는 열흘에서 길게는 열닷새마다 한 번씩 이리저리 떠다녀야 하는 서커스단원들의 모습이 이렇게 완벽하게 표현될 수 있을까. 그런데 다 읽고 보니 부초는 서커스단원들의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네 모습도 부초, 그 자체다.

갈보가 서커스를 보러 오면 갈보들이 구경꾼이지만, 서커스단원들이 갈보집에 가면 서커스단원들이 구경꾼이다. 그들은 서로가 구경꾼이 되기도 하고 곡예사가 되기도 한다. "손님이 따로 없다 뿐이지 분 바르고 옷 갈아입고 재주 피며 살기는 마찬가지"다. 서커스단 천막 안에만 무대가 있는 게 아니다. 하늘이 천막이고 발을 붙이면 그곳이 무대다. 줄 타다 떨어져 죽으나, 공 굴리다 깔려 죽으나, 교통사고로 죽으나, 과로해서 죽으나, 그게 다 마찬가지였던 거다. 우리는 서커스단원들을 보며 '그래도 내가 걔들 처지보단 낫네'라며 자위할지 모르지만, 내일은 내가 그들의 곡예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고 살까. 떠돌고 또 떠돌지만 인생의 진실을 먼저 알아차린 건 그들이니, 그들이 인생의 선배다.

문장 하나하나가 수려한 건 이루 말할 수 없다. 일부러 눈물을 빼는 것 같진 않은데 읽다 보면 눈물이 난다. 특히 내 눈물은 '개새끼'라는 단어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통 굴리는 여자의 아들 '석이'의 대사다. 

"나도 다 알지만 따라가는 거야. 엄마가 가라니깐 공부하러 가는 거야. 이담에 엄마 찾으러 올 거야. 꼭 그래야 한대. 안 그러면 개새끼래, 광호 형이 그랬어."

'엄마 없는 하늘 아래'나 '엄마 찾아 삼만리'가 이보다 더 아릿할까. 가슴이 저며서 읽고 읽고 또 읽었다. 태어날 때부터 아빠 없이 엄마랑 서커스단에서 자라서 세상의 쓴물을 다 맛본 일곱살 어린애가 '개새끼'라는데, 그 버릇없는 말투가 그 어떤 최루성 영화보다 더 가슴을 적셔온다.

하명과 지혜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도, 난쟁이 병신 칠룡이의 효심도, 수전증이 있는 마술사 윤재의 죽음도, 그 어느 것 하나 슬프지 않은 게 없다. 서정적인 문체가 그 슬픔을 억누르는 듯 하면서도 결국엔 폭발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졌다. 문학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가 이런 거였나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