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못난 점은 최대한 숨기고, 조금이라도 잘난척 할 만한 일이 생기면 자랑하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예를 들면, 수학 18점 맞은 건 입 꽁 다물고 가만히 있다가도 영어 96점 맞은 건 "어떡해, 아는 건데 하나 틀렸어."라고 울상짓기 같은 것.
남자친구가 반지를 사주면 일부러 입 탕탕 두드려가면서 하품하는 것. (이것도 20대 중반 이후론 뚝 끊긴 일... ㅠㅠ)
좋은 물건은 일부러 책상에 올려놓고 타인의 질문을 유도해 "이거 어디서 샀어?"라고 물으면 "뉴욕에서" 라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말하기 같은 것.
그러니까, 그렇게라도 안 하면 내가 똑똑하고(?) 예쁘고(??) 센스 있는 거(???) 몰라줄까 봐 안달이 나는 거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옷을 찢고 튀어나오듯이 잘난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두각을 나타내는 법이건만,
내가 가진 지식과 인성의 송곳은 너무나도 무디어서 내가 직접 꺼내서 휘둘러 보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
다시 말하자면, 나는 그르넬가 7번지의 고급 아파트에서 27년째 수위로 일하고 있는 쉰네 살의 르네 아주머니와는
인간 판형 자체가 다른 부류다. 아, 모닥불에 얼굴을 묻은 심정. 화끈화끈.

르네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위 아줌마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을 한다.
이를테면 "<전쟁과 평화>는 역사의 결정론적 관점을 소설화한 것이죠" 라고 말하는 대신에
"쓰레기 창고의 문 경첩에 기름을 치는 게 좋겠어요" 라고 말하는 훌륭한 위장술을 구사하는데,
덕분에 자신의 소중한 18평짜리 방에서 혼자만의 지적 유희를 즐길 자유를 얻는다.
그곳에서 르네는 비디오로 고전영화를 감상하고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다.
심지어 그녀의 고양이 이름은 레옹 톨스토이의 이름을 따서 '레옹'이다.
지식은 충만하고 취미는 고상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2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 어느 누구도 르네의 우아함을 알지는 못한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 이사 온 일본인 부호 오즈 씨와 참으로 안나 카레니나적인 운명의 만남을 갖는 르네!
그 집의 전주인에 대해 얘길하면서 르네가 화제를 돌리려 "아시다시피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죠"라고 중얼거리는데
오즈 씨가 곧바로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불행한 이유가 다양하지요."라고 맞받아치는 그 순간!
둘 사이에 전류가 찌르르 흐른다!!!
이 대화는 바로 <안나 카레니나>의 첫부분이었던 것! (아, 빨리 제대로 읽어봐야지.)
게다가 오즈의 고양이는 '키티'와 '레빈'!!!
이쯤 되면 '레옹'과 절친 되기는 식은죽 먹기!

그렇게 드디어 르네의 알 껍질이 벗겨지고 오즈와 르네는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게 우정을 나눴...... 으면 좋았으련만... 
아, 예측하지 못했던 결말!!!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비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러나 시간은 가도 사람은 남는 것.
르네의 우아함, 그러니까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정말 다행이다.
혼자서 조용히 생각할 공간을 찾기 위해 수위실로 찾아들었던 분홍안경테 소녀 팔로마,
호두를 먹을 땐 식탁보를 깔고, 아몬드를 넣은 튈과 마들렌, 튀김과자의 일종인 페드논을 귀부인스럽게 먹을 줄 알았던 파출부 마누엘라,
암으로 기력을 잃어가면서도 마지막 순간 르네와 함께 극장 데이트를 했던 소박한 낭만쟁이 남편뤼시앵,
르네와 쌍둥이인 양 취향을 공유하고, 그녀의 트라우마까지 감싸주었던 엣지있는(?) 일본신사 오즈,
그리고 마약으로 야위어가는 영혼 때문에 힘들어하다가 르네가 안뜰에 심어놓은 동백꽃 덕분에 기적처럼 살아난 장 아르텡스....

거 봐, 낭중지추라니깐.
숨길 수가 없는 우아함이란. 

 

+++
2009년에 읽은 책 중 베스트5 에 들어갈 정도로 훌륭하다.
별을 5개 밖에 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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