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 빈처 올 에이지 클래식
현진건 지음 / 보물창고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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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이 살아 있는 글이란 바로 이런 글이 아닐까 싶다. 종이위에 놓여진 까만 글자들이 어느새 머리속에 영상을 펼쳐보이듯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하는 글이라니 읽을수록 맛깔스러운 현진건의 단편소설들이다. 어려서는 우리말로 쓰여진 소설인데도 무슨 말인지를 몰라 글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낀데다 생사고락과 같은 이야기가 도통 와닿지 않으니 그저 학교 숙제로 어쩔 수 없이 읽어야했던 재미없던 책이었는데 지금은 그 느낌들이 살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니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일까?

 

제목만 들어도 다 알만한 '운수좋은날, 빈처, 술권하는 사회, B사감과 러브레터'등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의 경우 앞서 익숙한 제목의 단편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처음엔 날것 같은 문장들이 어느새 익숙해져 정확히 알지 못하는 단어들일지라도 이야기 흐름상 대충 어떤 말인지 이해하게 되니 우리 말이란 그래서 좋은듯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술술 읽히는 현재의 소설들과 달리 무언가 그 느낌이 색다른 말을 서술해 놓은듯한 문장은 무성영화 시대 변사의 대사를 듣는듯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가슴이 어째 답답해지며 누구하고 싸움이나 좀 해 보았으면, 소리껏 고함이나 질러 보았으면, 실컷 울어 보았으면, 하는 일종 이상한 감정이 부글부글 피어 오르며 전신에 이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듯, 옷이 어째 몸에 끼이고 견딜수가 없다.' ---p14

 

[빈처]의 너무 속이 상한 남편의 문장이 그 절심함이 느껴질 정도로 리얼하다. 살림이 어려워 아내의 옷가지까지 내다파는 지경을 보면서 그 남편이 처음엔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아내가 천사 같다가 어느 한순간 자신을 원망하는 듯 하자 원수로 변했다가 또다시 자신을 위로해주자 천사로 변하는 그 과정이 어찌나 생생하고 흥미진진한지 사람 사는 게 다 이런거지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술권하는 사회]에서는 조선사회를 불평하고 신세한탄을 하며 사회가 술을 권한다는 남편의 말에 사회가 어느 요리집 이름이나 되는줄 아는 아내와 아내의 답답함에 또다시 밖으로 나가는 남편을 보며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하는 아내의 말은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B사감과 러브레터]의 이야기는 한때 사춘기를 지나면서 러브레터라는 단어에 괜히 가슴설레어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참 이상한것이 결말이 도통 떠오르지가 않는다. 읽고보니 노처녀B사감이 왠지 불쌍하게 여겨졌으며 [희생화]라는 단편에서는 유교적관습과 집안의 차이가 주는 이루지 못하는 사랑으로 인한 비참한 최후가 참으로 가슴시리게도 한다. [운수 좋은날]을 읽을적에는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하는 문장을 기억하고 그 부분이 제일 슬펐다며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소설이었다고 말하는 딸아이에게 깜짝 놀라기도 했다.

 

'호기의 눈을 번쩍이고 있던 상춘은 이야기가 끝나자 웬일인지 그 여자를 여지없이 타매하였다. 어디 밀회할 곳이 없어서 그 어둠 침침한 층층대 밑에서 그런 짓을 하느냐는 둥, 필연 여학생 모양을 한 은근짜나 갈보라는 둥, 내가 그런 일을 당했으면 꼭 붙들어 가지고 톡톡히 망신을 주었으리라는 둥, 그리 못한 학수가 반편이라는 둥......' ---p117

 

이 문장은 [까막잡기]라는 단편의 한구절로 여자 한번 꼬셔보겠다고 음악회에 친구를 데려갔다가 오히려 여자에겐 심드렁한 친구가 보드라운 여인의 손길로 까막잡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샘을 내는 참 재미진 문장이다. 어찌보면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 들이닥친 생각지도 못한 층계참에서의 까막잡기는 이야기의 반전을 주기도 하는 작가의 이야기구성이 돋보인다. 형편이 어려워 정신나간 친구를 간호하다 결국 자신이 미쳐가는 [사립병원원장]이나 고통스러운 밤을 피하려 집에 불을 내고 마는 [불]이나 오늘 내일 하면서도 끝끝내 다시 털고 일어난 할머니에게서 결국 화창한 봄날 부음소식을 듣게 되는 [할머니의 죽음]등은 삶이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들이다.

 

그러고보니 이 책을 읽으며 시러베아들놈이라느니, 비렁뱅이, 설설한, 아지머니, 비대발괄 등등의 낱말들이 참 재밌게 여겨졌으며 어린시절엔 알지 못했던 삶에 대한 공감과 글읽는 재미를 맛보았는데다 무엇보다도 비록 숙제로 읽은 책이지만 문장까지 기억하고 있는 딸아이와 함께 소통하며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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