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자주 내린 올 겨울,
저자의 러시아 여행길에서 만난 눈을 보며 떠올린 글이 참 좋네.
나이 들어가면서 귀차니즘이 더해져 점 점 눈에 대한 감흥이 그닥 별로인데
이 글을 읽으니 다시 눈이 펑펑 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눈의 세상
이르쿠츠크는 러시아의 그 어느 도시보다도 츠웠고 정말 많은 하양을 품고 있었다.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인 동네는 왠지 더 고요하게 느껴졌다. 눈이 덮여 있으면 온 세상이 적막해진다. 그 적막을 뚫고, 사람들이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소리, 저벅저벅 걷는 소리, 자동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그 가운데 우리의 발자국이 남았다. 가장조용한 흔적이다. 눈길을 걷다 보니 곳곳에 노랗고 진한 얼룩들이퍼져 있었다. 잘못하여 그 위를 밟을 뻔한 내 두 발 - P66
을 사촌 동생의 순발력이 구해냈다. 분명 이름 모를강아지들이 흘리고 간 그들의 영역일 것이다. 그 혼적들은 꽤 많았다. 그들의 영역과 발자취가 동네방네, 그리고 온 세상에 드러나 있었다. 나는 눈이 내리는 걸 보면, 그것들이 떨어지고 다시 흩어지는 모습에 눈길을 주고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길을 걷다가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보고, 집에 누워 있다가도 몸을 일으켜 방창문을 연다. 그렇게 눈 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면 일전에 스쳐지나갔던 얘기들이 불쑥 다시 떠오르곤 한다. 그것은 한때 마음을 앓고 잠 못들게 했던 비밀이기도 하고, 하루를 무탈하게 보낸어느 날의 행복했던 일이기도 했다. 눈이 내리면 평소에 볕이 넘치게 들던 가장 좋아하는 카페로 가 커피를 마시기도 했고, 지금 이 순간가장 먹고 싶은 무언가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리고또 미루고 미뤄두었던 일들과 미처 시작하지 못했던 일들의 앞부분을 실행시켰다. 눈이 그칠 때쯤에는 오래 만나지 못한 누군가에게 오늘도 안부를 전 - P67
눈은 누군가의 흔적을 담고 있다. 거음 내리는눈을 보고, 어쩔 줄 몰라 뛰어다닌 어린 강아지들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찾아오곤 했다. 모습을 담고 있으며, 유달리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가 촘촘한 흔적에서는 누군가의 고된 하루가 느껴진다. 그보다 좀 더 멀리 듬성듬성 넓게 남아 있는자국은 지금 이 풍경을 가장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기 위해, 이 하얀 것들이 녹기 전에 그 사람에게 가려는 들뜬 누군가의 흔적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은밀한 비밀들을 엿듣고 품은 하얀 눈은이내 녹아버리고나면 다시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그 비밀을 지켜낼 것이다. 눈이 내리던 하룻밤 동안 오롯이 걱정과 고민에끙끙 앓다가 잠을 설친 다음날 아침 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던 날이 있었다. 속으로만 끙끙 앓던 힘든 일은 눈과 함께 모두 털어내보낸 것처럼 마음이개운했다. 그렇다 해서 모든 고민이 없던 일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 새로 시작하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았다. 눈이 내리는 날은 속마음을 꺼내놓고 싶다. 하얀 - P68
눈은 그 온 밤 동안 내 이야기들을 들어주었고, 그비밀을 지켜줄 것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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