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살에 대하여 - 죽음을 생각하는 철학자의 오후
사이먼 크리츨리 지음, 변진경 옮김, 하미나 해제 / 돌베개 / 2021년 7월
평점 :
이분 막판에 지친 게 틀림없다. 무책임하다고 할 정도로 결론이 아쉽지만 책이 전반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저자 크리츨리는 자살을 크게 둘로 구분한다. 1) 죽음이 삶의 괴로움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인 경우 2) 죽음 자체가 목적인 경우. 둘 중 우리를 더 두렵게하는 것은 후자다(납득할만한 설명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1번의 경우는 목적에 따라 다시 세분할 수 있다. 1-1)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피하기 위한 죽음 1-2)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대의를 위한 죽음 "(119) 대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전우, 조국, 정당, 저항운동 또는 신을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1-3) 개인 또는 사회에 대한 보복이나 앙갚음으로써의 죽음(여기에 해당하는 살인-자살 현상에 대해 저자는 "(110) 굳이 원한다면 당신 목숨은 버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죽이지 마"라고 드물게도 강력히 규탄한다).
크리츨리의 관심은 2번의 경우에 더 쏠려 있는 듯하다. 그저 죽음을 원한다는 이유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질문은 왜 죽는지가 아니라 왜 사는지가 될 것이다. 이를 탐구하기 위해 그는 에두아르 르베 <자살>,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장 아메리 <자유죽음>을 가져온다 (역시 이 책 읽어야 하나). 죽음이 삶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해서 자살을 택한다면 죽음의 순간이 삶의 복잡성을 지워버리는 방식으로만 일관성이 획득될 것이다. 즉, 자살이라는 치명적 순간으로만 삶이 해석되는 걸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일관성 획득은 무용하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대응은 자살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끝까지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오류이다. 의미 찾기에 실패한 인간에겐 존재의 이유가 없다는 잘못된 결론이 도출될 위험이 있다. 자살은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이 힘을 지니고 있는 한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다. 그렇다고 그 힘을 당장 사용할 필요는 없다. "(135) 죽음이 어떤 문제든 해결해주고 보상과 보복과 응징을 하고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세계의 고통스러운 혼란으로부터 구해줄 거라는" 건 "낙관주의적 망상"이다. 자살을 통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인용하며 삶의 정지된 순간에서 '일종의 충분함'을 찾기를 촉구한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눈 속에서 황홀감이 솟아오른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뭐라는 거야?! 앞서 말했듯 결론이 좀, 많이, 미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