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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슬럿 - 젠더의 언어학 ㅣ Philos Feminism 3
어맨다 몬텔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평점 :
저자의 인간적 매력이 글을 뚫고 나온다. 솔직하고 유쾌하고 똑똑하고 포용적이되 자기 주관과 취향이 확실한 사람. 곁에 있다면 딱 친구 삼고 싶은 유형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반성을 많이 했다. 내가 영어를 배우면서 규준으로 받아들였던 많은 것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전문적이고 자신감이 없어보이니 하지 말라고 배웠던 많은 말습관들이 실은 매우 효과적인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사용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말습관이 공격당하고 기피당하는 까닭은 주도적인 사용자가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154) 사람들은 남성이 그렇게 말하는 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저 여성이 말할 때 신경을 긁는 일이 된다. 우리 문화가 보컬 프라이, 업토크, '라이크'에 대해서 드러내는 억하심정은 사실 그 발화 특질과 그리 관련이 없다. 현대에 여성들이 그 특질들을 먼저 사용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보컬 프라이, 업토크, '라이크like' 같은 필러를 통한 헤지hedge는 불안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권위와 관련이 있다. 말이 지나치게 단정적이거나 명령조로 들릴까봐 청자를 배려해 타협한 결과에 더 가깝다.
보컬 프라이는 주로 발화의 끝에 목의 힘을 빼고 낮은 저음으로 말을 하는 걸 가리킨다. 나는 이걸 '먹는 소리'로 느낀다. 발화를 시각화할 수 있다면 글자가 바깥으로 나가서 퍼지는 것이 아니라 목으로 다시 빨려들어가는 모습일 것이다. 보컬 프라이에는 목을 긁는 듯한 쇳소리가 살짝 섞이곤 한다. 이 소리 때문인지 나는 누군가가 보컬 프라이를 할 때 그걸 섹시하다고 느낀다. 목에 힘을 풀고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소리가 작아지고 발화가 불분명해지므로 이걸 기피해야 한다고 배웠다. 내 경우 의도적으로는 하지 않지만 말을 아주 많이 했을 때 목이 피로해지면 저절로 말끝에 보컬 프라이가 일어나곤 했다. 그럴 때의 나는 뭔가 좀더 원어민(?)스러워 진 것 같아서 남몰래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걸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메시지의 분명한 전달과는 별 관련이 없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보컬 프라이가 '권위'와 '지루함'의 표현이므로 감히 여성이 이걸 하는 게 거슬렸던 거다.
업토크나 '라이크'는 소위 말하는 밸리걸 억양을 떠올리면 된다. 업토크는 끝을 올려서 말을 맺는 걸 가리킨다. 영어를 쓸 때 말끝을 올려서 맺지 말고 '라이크'를 지나치게 섞어서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들도 많이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밸리걸 억양이야말로 내가 캘리포니아 사람들을 친근하게 느꼈던 계기였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모노톤으로 쏘는 듯이 빠르게 말을 뱉던 뉴욕 사람들과 비교해서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노래하는 듯한 억양으로 느긋하게 말을 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상을 요약하면 "서부 사람들 너무 친절해!" 쯤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다정하다는 인상은 많은 부분 그렇게 쓰지 말라던 밸리걸 억양과 '라이크'에서 오는 거였다. '라이크'가 다 같은 '라이크'가 아님을 이 책은 조목조목 설명한다. 평서문도 의문문처럼 끝을 올려서 말하는 것 역시 말하는 내용에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한다. 말의 내용이 강할 때 끝을 내려서 말하면 가르치거나 강압적으로 지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므로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을 일으키기 위해 끝을 올리는 거였다. 듣는 사람에게는 이게 대화로 초대하는 것으로 느껴질 테고 '내가 말을 해도 안전하구나'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는 위와 같은 발화 방식들을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금지하고, 화자의 인격까지 모독하는 이유는 화자를 깎아내림으로써 우위를 점하고 그의 목소리를 빼앗기 위함일 것이다. 나는 하지 말라는 걸 안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내가 영어로 말할 때 실제로 늘 자신감이 없고 불안하기 때문에 특정 말습관이 불안하고 전문가답지 않아 보인다는 지적이 나라는 과녘의 정가운데를 관통한 것이다. 딱 거기에서 생각을 멈추고 나는 그걸 그냥 받아들여버렸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지적을 받기 전까지 내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말투를 이후로는 거슬려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럼으로써 나에게 그런 생각을 주입한 이들에게 힘을 보태고 그에 동조한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데서 폭력과 악이 시작되는 건데.
맞춤법이 말의 내용이나 화자를 무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 역시 비슷한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보다 전방위적으로 일어나며 대상이 반드시 여성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맞춤법은 어떤 사람의 인격이나 지적 능력을 판단할 근거가 못된다. 맞춤법을 잘 지킨다는 건 그저 그 사람에게 맞춤법을 배울 기회와 자원이 있었다는 뜻일 뿐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이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194) 문법과 도덕은 사실상 별 상관이 없다. 그리고 적들의 형편없는 문법을 지적하는 일은 당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입증해 주지 못한다. 이 말은 당신이 교육받을 기회를 더 가졌음을 의미하고, 더 많은 시간을 표준 영어를 배우는 데 들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누군가가 하는 말의 도덕적 중요성은 내용에 있지 문법에 있지는 않다.
(195) 교육을 많이 받은 이들이 문법 경찰로 나설 때, 그들은 여성들이 업토크나 보컬 프라이를 할 때 여성 혐오자들이 하는 일과 같은 걸 하는 셈이다. 누군가가 어떻게 말하는가에 비추어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다. 식견 있는 청자라면 오히려 누군가의 문법에 대해 언급하는 행위가 그저 메시지를 피하려는 것임을 안다. "언어를 가지고 현학적인 척하는 건 속물 행위이고 속물 행위는 편견에 근거하죠." 캐머런은 말했다. "그리고 그건, 장담하건대, 자랑스러울 일이 못 돼요."
페미니즘을 접한 이래 내가 억압자의 언어와 사고를 빌려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구나, 피억압자인 내가 그들의 억압을 돕고 누군가를 억압하고 있었구나, 깨달을 때마다 소름끼치게 부끄럽곤 하다. 이 책을 읽고도 어마어마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평생 모르고 살 뻔했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이 부끄러움은 하찮기 그지없다. 앞으로도 나는 더 부끄러워야 하고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책을 더 만나고 싶다. 책이 나의 인식과 관점을 바꿔놓았다는 걸 나의 부끄러움이 증언한다. 좋은 것(언어)과 좋은 것(페미니즘)이 만나 반드시 더 좋은 게 되지는 않는데 이 책은 그 일을 해냈다.
아래는 이번 달 <정희진의 공부>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연상되어 인용한다.
1. 낙태금지법을 두고 싸우는 대신 성관계에 피임은 필수라는 걸 남성들에게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 관련
(222) 그런 세상을 얻을 수 있으려면 여성들에게 위해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가르칠 게 아니라 남성을, 이상적으로는 굉장히 이른 시기부터 가르치는 데 달렸다. 세상이 전부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야 한다. 남자들이 어린아이일 때, 양육자이자 선생님으로서 우리는 남성성에 대한 문화적 상상을 깨부술 필요가 있다. 남성이 여성에게 공감해도 괜찮다. 다른 남성이 언어로나 다른 방법으로 여성을 쓰러뜨리려 할 때 남성이 여성에게 공감하고 동조하고 지지해도 괜찮고, 정말 권장돼야 한다.
여기에 더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를 좋아할 확률은 아주 낮다는 것도.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를 좋아한다면 그건 기적이고 그저 그에 무한히 감사하라는 것도. 너를 싫어한대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거기에 대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꼭 가르쳐야 한다.
2. '자매애는 불가능하다' 관련
(330) "저는 늘 '여성의 인식을 표현한다'는 언어에 담긴 생각에 회의적입니다. 그게 어떤 인식이고, 어떤 여성에게 속하게 되는 걸까요?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인식의 집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집단적 자매애를 느끼는 건 좋지만, 여성의 경험은 복잡한 스펙트럼을 구성하고, '자매애'는 하나만 의미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