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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가볍고 사치한 글을 읽고 싶었는데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엄청난 것을 읽어버렸다. 이건 조작되고 왜곡되고 은폐된 어느 여성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해럴드 배너가 쓴 장편소설인 <채권>, 앤드루 베벨이 대필작가를 통해 쓰고자 했으나 미완으로 남게된 자서전 <나의 인생>의 초안, 아이다 파르텐자의 회고록인 <회고록을 기억하며>,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 <선물>. 각기 다른 화자가 각기 다른 형식으로 밀드레드 베벨의 초상을 진술하고 있다.
이 소설을 라쇼몽에 비유하는 건 게으른 선택이다. 이건 오히려 밀드레드 베벨의 진실에서 가장 먼 순서대로 배열된 이야기를 따라 진실로 가까이 다가가는 여정에 가깝다. <채권>과 <나의 인생>의 허구 속에서 일말의 진실을 발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각자의 입장에 따른 각자의 진실이 있고 실체는 모르는 것이란 식의 해석을 들이댄다면 나는 그 사람을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게으르다'는 언급이 그에게 주어지는 가장 관대한 평이 될 것이다. <채권>과 <나의 인생>은, 지나치게 뛰어나서 전통적인 성 역할로 도저히 가둘 수 없는 한 여성을 '미친 여자'나 '가정에 충실한 순종적 아내'로 뒤틀고 축소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문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각 부가 각기 다른 작품이라고 할 때 내가 매길 별점은 각각 별 2개, 별 1개, 별 5개, 별 4개가 될 것이다. 그토록 너른 스펙트럼을 보여준 에르난 디아스에게 바칠 별은 결과적으로 다섯 개가 되었다.
처음엔 1부가 소설 속의 소설인 줄 모르고 읽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기준이 되었다. 벤저민 래스크가 앤드루 베벨이고 헬렌 브레보트가 밀드레드 베벨이겠구나, 하고 읽다가 3부에서 완전히 세계관이 재편됐다. 3부에서 비로소 "세상의 원형이 뒤집혀 있다는 걸 알았고, 현실이 뒤집혀 있어도 한눈에 이해(334)"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부의 화자인 아이다 파르텐자는 앤드루 베벨이 세상에 자신만의 버전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고용한 대필작가이다. 최종 면접에 남은 후보자들을 보고 아이다는 강렬한 유사성을 느낀다. 그건 베벨이 대필작가로, 아내인 밀드레드와 유사한 사람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다는 밀드레드에게 쉽게 공통점을 느끼고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래서 베벨이 아이다가 재구성한 밀드레드의 이야기를 가차 없이 편집할 때 배신감을 느끼며, 베벨이 극도로 제한한 정보 속에서 밀드레드에게 실체를 부여하기 위해 아이다가 자신의 어린시절에서 가져온 이야기를 베벨이 마치 본인의 생각인 것처럼 이야기할 때 "기억을 표절당하는 데"서 오는 "엽기적인 폭력성(406)"을 느낀다.
(이하 스포일러 있습니다)
베벨의 표절에는 전적이 있다. 그가 금융업계의 신화가 된 데에는 그가 쌓아올린 막대한 부도 한몫했지만,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예측하고 한발 앞서 대응하는 그의 수학적 정확성이 더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밀드레드의 일기에서, 사실 베벨의 신화를 형성한 사업적 능력이 밀드레드의 것이었으며, 베벨이 대공황 때 엄청난 자본력을 바탕으로 재난을 유도했고 시장의 혼란을 키웠다는 게 밝혀진다. 이후에도 베벨은 티커 키보드 관리자를 매수해서 미리 시세를 알아내는 범죄 행위를 저질렀고 이 모든 과정에서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자신이야말로 미국의 경제 성장에 이바지했고, 금융 체질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으며, 한 개인에게 금융시장 전체를 움직일 힘은 없다던 베벨의 말이 더욱 오싹하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그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며, 만약 실수가 있다면 "현실을 조정하고 구부려서" 현실을 일관성 있게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소설 속 화자들이 앞서 글을 쓴 사람이 왜 그런 글을 썼는지 의도를 모른다는 데서 기묘한 틈이 생긴다. 가장 먼저 밀드레드의 일기가 쓰였겠으나 이건 공개되지 않았다(회고록을 쓰던 시점의 아이다에게 유일하게 발굴된다). 밀드레드 사후 베벨 부부를 겨냥한 배너의 장편소설 <채권>이 세상에 나온다. 그 소설에 반박할 목적으로 베벨이 자서전을 기획했고, 아이다는 50년 후 이 모든 걸 되짚어 회고록을 쓴다. 아이다는 모든 문서에 접근 가능했던 유일한 사람이지만, 본인이 직접 개입하지 않았던 두 글에 숨겨진 의도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 밖의 세계에서 이 모든 글을 쓴 것은 결국 작가 에르난 디아스이다. 디아스는 이러한 소설적 장치를 통해 장편소설 <채권>을 읽고 아이다가 <채권>의 작가 배너에게 품는 의구심을 노출함으로써 독자에게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1부를 반추하고 재평가하라는 독법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독자가 충분히 숙고할 시간을 준 뒤 아래와 같이 하나의 답까지 제시해준다. 얼추 그 답에 근접하게 베벨과 배너의 의도를 읽어냈던 나는 퀴즈를 잘 맞췄다는 기쁨과 동시에 작가의 손에 놀아났다는 (즉, 작가가 의도한 이상으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패배감을 느꼈다.
(346) 자서전을 써야겠다는 베벨의 결심은 많은 부분 아내의 오명을 벗기고 그녀가 배너의 소설에 나오는 은둔한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어보니, 베벨은 밀드레드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그녀를 완전히 특징 없고 안전한 인물로 바꿔놓는 것을 더 원했던 것 같다--베벨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당시에 읽었던 위대한 남자들의 자서전에 나오는 아내들과 똑같이 말이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어쩌면 해럴드 배너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똑같은 일을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왜 소설에 밀드레드의 망가진 모습을 그린단 말인가? 이건 <채권>을 처음 읽은 이후로 내가 자문하고 또 자문한 질문이었다. 밀드레드는 그토록 명석했던 게 분명한데, 왜 그녀를 미친 사람으로 만드나? 세월이 지나며 나는 여러 가지 답을 생각해보았지만--질투, 복수심, 단순한 악의--배너의 인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몰랐기에 늘 같은 결론으로 돌아왔다. 배너가 밀드레드의 정신과 몸을 망가뜨린 것은 단지 그게 더 나은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었다고(설령 밀드레드에게 모욕이 되고 결국은 배너 자신을 파괴할지라도, 그가 쓰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던 이야기인 것이다). 배너는 역사 전체에 걸쳐 출현한 비극적 운명의 여주인공, 자신의 파멸을 구경거리고 내놓는 그런 여주인공이라는 고정관념에 억지로 밀드레드를 끼워맞췄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디아스는 소설의 독법뿐 아니라 작법도 엿보게 해준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살짝 등장하듯 글을 쓰다 막힐 때마다 아이다는 문체나, 캐릭터나, 어휘와 배경을 얻기 위해 공립도서관으로 가서 필요한 책들을 훑고 필요한 것들을 얻어낸다.
(311) 나는 브루클린 공립도서관에서 그런 책 몇 권을 빌릴 수 있었고, 이어지는 주에는 혼란스럽고도 무계획적인 방식으로 그 책들을 훑었다. 별 체계 없이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건너뛰며 출처를 적지 않은 채 아무 내용이나 메모했다. 나는 문서 연구에 대해서나 서지 정보를 제대로 다루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훈련받은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게 이점이었다. 나의 거칠고 타협의 여지 없이 비체계적인 접근법 덕분에 책들은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 남자들 각각의 개인적인 특징은--카네기의 자족적인 독실함, 그랜트의 근본적인 품위, 포드의 딱딱한 실용주의, 쿨리지의 수사적 검양 등등--당시 내가 생각하던 그들 모두의 공통점 앞에 무너져내렸다. 즉, 그들은 모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말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자신들의 결점 없는 삶에 관한 이야기는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고. 그들 모두가 내 아버지에게 있던, 바로 그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아이다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로 무정부주의자이다. 아이다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철저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묻힌다. 권력자인 베벨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배버의 소설과 인생이 어떻게 소거되는지 그 과정을 보면 역사를 구성하지 못한 이야기들의 면면을 추측해볼 수 있다. 역사는 당대에 그걸 주무를 자격이 있었던 자에게만 유효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서 구겨지고 버려진 조각들 속에 권력의 눈에 거슬렸던 수많은 약자들의 목소리가 숨어있을 것이다.
(291) 당시 저택은 가장 융성할 때였고, 내게 끼치도록 고안된 모든 영향을 끼쳤다. 저택은 내가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나 자신이 어색하고 더럽게 느껴졌다. 뭘 달라고 하는 입장도 아닌데 거지가 된 것 같았다. 그래, 난 압도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딸답게, 나는 역겨움과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저택 때문에든, 저택에 대한 나의 순종적인 반응에든.
나는 아이다가 처음 베벨의 저택에 발을 딛으며 느낀 감상을 고급 호텔의 로비에 들어설 때 느끼곤 한다. 특히 반얀트리나 워커힐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기 어려운 호텔일수록 더.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고난 자체가 내가 그곳을 이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임을 증언하고, 언덕을 지나 마침내 호텔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비싼 외제차나, 평일 낮인데도 호텔의 야외 골프장에서 한가로이 골프를 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난 그걸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거지가 된 것 같아진다. 내겐 이게 역사가 우리를 배제하는 방식에 대한 은유로도 느껴졌다. 개인의 욕망이 무관해지는 압도적이고 철저한 배제.
(267) 베벨 투자회사에서 시험과 면접을 보는 동안 나는 평생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할 기회가 생긴 한 가지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권력의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주위가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권위와 돈은 침묵으로 스스로를 둘러싸고, 사람은 누군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그들을 둘러싼 침묵의 두께로 측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