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순례의 길과도 같아서 그 길을 통해 자기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속성이 있다. 아니 그 속성만 있다. 그 속성으로 구원받고자 함이 사랑이라면, 사랑한다는 말은 대단한 말이 아니라 구원받겠다는 말이다.
한 사람은 내가 메고 다니는 배낭의 브랜드를 힐끗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와, 너, 콜롬비아에서 왔구나." 나는 한국에서 왔고 이건 단지 가방 브랜드일 뿐이라고 했다. 안 그래도 '요즘 왜 이렇게 콜롬비아에서 온 여행자들이 많지?'싶었다면서 그는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중략)
그런 사람들을 만날 적마다 이상하게 속이 시원히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한 점 티 없는 것은 찬물처럼 가슴을 씻어내준다. 진짜로 많은 것을 몰랐던 오래전의 나로 돌아가는 마음이 되면서 심장까지 맑아지고 순해졌다. 조금 안다고 뭐 그리 대수겠는가.
많이 아는 체하는 날들은 고개 숙이지 못하게 한다. 고개를 숙이지 못하면 남보다 먼지를 더 들이마시게 되고 그 먼지는 씻겨나가지 못하고 몸안에서 굳어지고 딱딱해져서 생각과 함께 돌이 된다. 조금은 바보 같기로 한다. 눈을 감고 잠시만이라도 모르기로 한다.
-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나의 퇴락은 어쩔 수 없겠으나 세상에 대한 갈증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보는 것에 대한 허기와, 느끼는 것에 대한 가난으로 늘 내 자신을 볶아칠 것만 같습니다. 이 오만을 허락해주십시오.
밑줄긋기를 하려다가..
다 읽고 나서야 이 책에는 쪽수가 안 적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람이 부는 11월이 좋다. 쓸쓸해서 좋다. 덤으로 주어진 달 같아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