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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단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폴오스터는 늘 주인공이 극한 상황
도저히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하도록 놔둔다.
비행기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대학교수 짐머도 그가 단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무성영화시대의 한 배우인 헥터만에 대해 집착하게 되고
그를 위한 연구서까지 쓰도록 하는데..
주인공의 독백처럼 그는 단지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정은 폴 오스터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발견된다.
달의 궁전에서 극한의 굶기 상황이라든가, 우연의 음악에서 정말 이성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벽을 쌓아야만 하는
행동들이 그렇다.
그의 소설들에서는 하나같이 주인공이 집요함의 고수이다.
헥터만에 관한 연구를 위해 짐머가 보여주는 행동들이 그렇다.
그에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수집하는데 광적인 집착을 보인다.
(사실 소설에서는 그렇게 광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데 정상적인 현실에서
보았을때 그렇다는 말이다.) 몇개월을 외부와의 일체의 접촉없이 그에 관한
책을 쓰는데 보낸다. 공공도서관에 그의 자료를 찾기 위해 나갔던 두번만 제외하고는
그는 하나의 것에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그 근원을 캐나간다.
나는 이 부분에서 늘 궁금한것이 있다. 소위 사회인으로써 관계라는 것이 있다.
나 의외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폴 오스터는 너무나 잘 배제시킨다.
그게 미국이라는 특성때문일까. 그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지독하게 개인주의적이어서
일까. 그냥 허구적인 상상력의 소산인가. 그 지독한 개인주의가 가끔은 부럽다.
과연 폴 오스터는 하나의 소설을 씀에 있어 기초가 탄탄하고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
인듯하다. 헥터만의 영화중 하나를 묘사하는데 마치 내가 하나의 영화를 보고있는 것
같다. 사실 그 (존재하지 않는)영화를 보는 유일한 사람은 오스터이지만
그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읽어주는 사람도 오스터이다.
완벽한 시나리오 대본을 보는 것 처럼 그가 읽어주는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현실인지 짐머의 현실인지 헥터만의 현실인지.. 혹은 각각에 대응하는
허구인지 헤깔린다.
어떤 소설을 읽을 때 소설의 내용이 빛을 발하고 기억되는 것들이 있는 반면
폴 오스터의 소설들처럼 개개의 소설들보다 그것들이 하나로 뭉뚱그려져서
소설가의 특성을 점점 강하게 만드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그것이 그의 저력인것 같다. 비슷하고 반복되는 주제일것 같지만 각각이 너무나 독특해서
자꾸 중독되는..
정말 갈때 까지 가보고 싶게 만드는 그의 소설들은 참으로 재미있다.